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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경>에서 듣는 내 마음의 소리, <아주 오래된 시와 사랑 이야기>

시인 고형렬이 저자로 되어 있어 사랑을 노래한 시들을 모아놓고 감상을 적은 그렇고 그런 시 선집인 줄 알았다. 그런데 펼쳐보니 중국 고전 <시경>(詩經)에 관한 책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시경> 해설집, 일종의 고전 해설서로 짐작했더니 그것도 아니다. 더구나 초등학교 고학년에게도 적합한 책으로 분류돼 있다. 읽어보니 <시경>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읽어낸’ 솔직한 감상문이며, 연령대를 불문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글투와 내용이다.

무궁화 꽃잎색처럼 맑고 깨끗한 신부가 옆에 있으니 남자는 꿈결처럼 눈부시기만 하다. 이제 이 아름다운 여인과 함께 길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그 길이 멀고 험하다 해도 이런 노래가 절로 나온다. ‘나와 함께 길을 가는 여인/ 얼굴이 무궁화 같네./ 왔다갔다 거닐면 패옥 소리 잘가당잘가당./ 어여쁜 강씨댁 맏딸이여, 기리는 말 끊임없겠네.’

<시경>이 유교 경서의 하나이고 보니 많은 사람들이 딱딱한 교훈시로 가득할 것이라 지레 짐작하곤 한다. 그러나 <시경>은 고대 중국에서 불린 사랑 노래, 노동요, 민요 등이 중심을 이룬다. 요즘 말로 하면 ‘최신 히트송 모음집’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고대 중국에는 유행가와 소문을 채록하는 관리가 따로 있었다. 그러니 저자가 <시경>을 ‘읽을 때마다 부드러운 바람이 가슴에 일렁인다’고 고백하는 것도 결코 헛말이 아니다.

‘동녘의 달 같은/ 저 아름다운 여인이 우리 집 안에 와 있네./ 우리 집 안에 와서는, 내 뒤만 따라다니네.’ 이 시를 노래한 고대 중국의 어느 무명인에게 아름다운 여인은 동녘의 달과 같았다. 이에 비해 괴테에게는 사랑하는 이가 아름다운 경치보다 앞선다. ‘사랑하는 릴리여, 그대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이러한 경치가 어찌 기쁨을 주리요.’ 고형렬 시인은 이를 두고 동서양 시 정신의 차이점을 지적한다.

<시경>을 마음만이 아닌 머리로도 만나고 싶다면, 마르셀 그라네의 <중국의 고대 축제와 가요>(김태완, 신하령 옮김/ 살림 펴냄)를 읽어볼 일이다. <시경>의 유교적 해석을 유보시키고, <시경>의 많은 시들이 고대 농경사회의 계절제와 노동생활에서 나온 농요, 노동요, 민요, 연애가임을 밝힌 중국학 분야의 고전이다. 두책을 겹쳐 읽으면 시인의 마음과 학자의 머리가 뜻밖에 깊이 통하는 것에 놀라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