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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보고] 리들리 스콧 신작 <글래디에이터> 시사회 [2]
황혜림 2000-03-21

서사스펙터클로 돌아온 리들리 스콧 감독, 러셀 크로, 호아킨 피닉스 인터뷰

"성전이다. 매일"

감독 리들리 스콧 인터뷰

-피보다 눈과 흙이 날리는 첫 전투장면은 폭력적이라기보다 시적인 분위기로 인상에 남는데.

=별로 폭력적이지 않다니 재미있군. 눈은 의도했던 것은 아니다. 전투 장면을 찍는데, 러셀이 눈을 보는 첫 장면부터 이미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지난해 2월, 겨울에 런던에서 찍었으니까. 불필요한 폭력은 감독으로서 내가 점점 더 깊이 생각하게 되는 문제다. 그래서 검투사를 내세운 로마시대 영화를 한다는 것은 까다로운 일이었다.

-첫 영화 <대결자>도 나폴레옹 시대 두 병사의 결투를 그린 시대극인데, 그 경험이 어떤 영향을 끼쳤나.

=음… 뭐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 그뒤로도 많은 영화를 찍었고, 2천여편의 광고를 찍었다. 광고는 영화만큼 제작규모가 크지는 않으니까, <대결자>를 찍었던 경험이 도움이 되긴 했겠지만 직접적인 것은 아니다.

-전투 장면, 하늘에 대한 묘사 등 CF처럼 감각적인 시각 이미지가 돋보인다.

=난 영국에서 7년간 미술학교를 다녔다. 3년은 순수회화를 했고, 4년은 그래픽을 했다. 왕립미술학교에서. 그 경험은 아직까지도 내게 가장 유용한 것이다. 성전이다. 매일.

-영화를 크게 사실주의적인 드라마와 영적인 판타지의 세계로 이분한 것 같은데, 특별한 의도가 있었나.

=그렇다. 가장 좋은 예는 손으로 밀밭을 스치며 지나는 첫 장면일 것이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하는 남자로 옮겨가는데, 그는 집을 생각하고 있다. 나중에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집에 대해 얘기해보라고 하자 집을 묘사하는데, 나무며, 담장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사실상 천국이다. 왜냐하면 그가 가장 가고 싶어하는 곳이 천국과 같은 의미니까. 궁극적으로는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운명이란 주제에 이르려 했고. 밀밭을 쓰다듬듯 지나는 손은 일상 생활에서 그가 농부였기 때문이다. 매번 싸움터에 나선 그가 흙을 집어 냄새를 맡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고, 또한 그가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의미를 담는다.

-당신의 영화들은 시각적 감각이 뛰어난데, 이미지의 표현력에 집중하는 이유가 있다면.

=기본훈련이 그랬고, 순수회화도 했고. 그런 마인드를 갖고 있다. 어려서부터 보통 이상으로 그림을 그려왔다. 그래서 미술학교에 들어가던 17살 무렵에는 실력이 꽤 앞서 있었다. 한때는 심각하게 화가가 될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림은 너무 고립적인 작업이라 생각했다. 영화가 그림과 같은 작업을 할 기회를 줄 거라고 생각진 못했는데, 그런 기회를 줬다. 게다가 영화에서 내 생각을 더 많이, 더 강하게 드러낼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사람들이 더 잘 알아보니까. <글라디에이터>에서 특히 흥미로운 점은, 이른바 주류 영화인데 보통 주류 영화와 잘 어울리지 않는 요소들을 집어넣은 교묘함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다 알아들을 것이다. 그게 재미있고, 새롭다.

-주류 영화와 잘 어울리지 않는 요소들이라니.

=(영웅조차도)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 주류 영화에서 쉽게 나오지 않는 얘기다. 아직 편집중일 때 시사회를 하면서 문제가 되지 않을까 했는데, 다들 이해했다. 결국 주요인물들을 감정적으로 강화하고, 그가 임무를 다할 때까지 살아남을 이유가 됐다.

-전작을 통틀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디스토피아에 가까운 것 같다.

=난 당연히 환경의 산물이다. 환경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는다. 그래서 내가 살고 있는 환경이 어떤 의미인가 생각하는 바대로 창조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지 않은 영화도 있다. <블레이드 러너>는 안 그랬던 것 같다. <블레이드 러너>는 낭만적인 관점을 가진 영화다. 낭만적으로 어두운 만화 같은 영화. 내가 사는 세계와 같진 않다.

"장군을 위해 몸만들기 했다"

러셀 크로

3시간에 걸친 인터뷰 장정 끝에 마지막으로 한국 취재진 앞에 나타난 러셀 크로. 20분 인터뷰를 10분으로 줄여달라고 했다는 그는 빠듯한 일정에 지쳐보였다. 전날인 11일 폴란드에서 날아와 저녁에 미국감독협회(DGA)시상식에 참석했고, 13일에는 아카데미상 후보들의 오찬이 있다며, “미친 스케줄” 때문에 더 여유있게 얘기하지 못함에 양해를 구한 크로는 신중하고 진지하게 질문에 답했다. 이런 과정을 즐기냐며 취재진에게 되묻는 그에게는 아무래도 할리우드 홍보시스템 차원에서 기계적으로 진행되다시피하는 인터뷰가 답답했던 모양. 머잖아 크로는 호주의 문화대사로 1주일간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영화에서 그의 배역은, 로마제국의 재상에서 노예 검투사로 전락하는 막시무스.

-리들리 스콧과의 작업은 어땠나.

=마이클 만이 스콧에 대해 “영화사상 감독들 중 톱 2% 안에 드는 감독”이라고 묘사한 적이 있는데, 공감한다. 리들리 스콧은 비주얼 아티스트고, 그와 A.D.185년을 무대로 일한다는 것, 복합적인 인물을 맡는다는 것은 놓칠 수 없는 일이었다. 완성된 각본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꽤 어려웠다. 우리가 가진 것은 컨셉과 각자가 쏟을 능력에 대한 믿음이었다. 시작은 캐릭터에 대한 준비다. 맥시머스의 관점은 제프리 와이갠드(<인사이더>의 역할)와 당연히 다르니까. 와이갠드 역할을 준비할 때 육체적 요구가 없었다면, 로마의 장군 연기는 그 반대다. 난 맥시머스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몸을 만들고자 했다. 그냥 ‘G.I.조’ 버전의 인공적인 한 장면이 아니라.

-보기 드물게 네오 누아르풍의 어두움을 가진, 선이 굵은 연기가 할리우드 주류 배우들과 또다른 미덕으로 보이는데.

=캐릭터의 깊이는 연극을 했던 것에서 나온다. 영국 북부부터 미국 남부, 독일, 프랑스 등 내가 연기했던 연극들에서 특정 역할을 위해 몸을 만드는 것, 억양 등을 배운 것처럼. 당신이 ‘할리우드 배우’라고 말한 이들과 내가 다른 점은, 알다시피 내가 할리우드 출신이 아니라는 것일 게다. 난 뉴질랜드에서 태어났고, 인생의 2/3를 호주에서 보냈다. 그리고 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LA에 살지도 않고, 일 사이사이에 내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일과 일 사이에 겪는 실제 삶이 연기를 채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관점이라니. 좀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다른 곳 출신이니까. 난 돈에 구애받지 않고, 할리우드의 문화적 분위기에 좌우되지도 않는다. 난 다듬어지지 않은, 아주 거친 사람이다. 하지만 내 마음을 말할 준비는 돼 있다. 스크린상이건, 스크린 밖이건. 그게 차이다. 내 속에 있는 것이 대단한 숙고의 과정이 아니라 할지라도, 자신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영화 형식을 예술로 진지하게 여긴다는 것도 중요하다. 그냥 머리 모양이 어떻고, 예쁘게 보이는 것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에게 영화는 훨씬 큰 매체다. 사람들과 여행에 나서는 것, 그러기 위해 역할을 리얼리티로 채우는 것이다. 그리고 대사와 대사 사이, 그냥 나 자신과 내 눈빛만 있는 순간에도 사람들의 상상력을 채워주는 내러티브의 일부가 돼야 한다.

"거의 심판대에 오른 심정"

호아킨 피닉스

방에 들어오자마자 한 바퀴 돌면서 취재진 모두에게 악수를 청하는 호아킨 피닉스는 스타연하는 오만한 무게나 판에 박힌 정중함과는 거리가 멀다. 담배를 피워도 되겠냐는 그의 첫마디에 취재진 일부가 사실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고 하자 얼마든지 피우라며 “난 악영향이야”하고 웃는 모습부터, ‘Thank You’가 한국말로 뭐냐며 기어이 한마디 배워가는 호기심어린 소년 같은 분방함까지 그렇다. 국내에 조아킨으로 많이 알려진 이름은 정확히 발음하면 ‘와킨’에 가까운 호아킨. 막시무스와 숙명의 대결을 벌이는 사악한 황제 콤모두스가 <글라디에이터>에서 그의 배역.

-삐딱한 비주류 인생들을 많이 해왔는데, 황제가 된 기분은 어땠나.

=음, 그처럼 보기 드물게 다층적인 캐릭터를 연기하고 창조할 수 있었던 건 배우로서 큰 기회였다. 대부분 영화에서 악한은 판에 박은 악한의 전형에 따르는 경향이 있는데, 이 영화에서는 좀 차별화할 기회가 있었다. 근데 다들 영화를 재미있게 봤나.

-그런 편이다. 그런데 콜로세움에서 결전을 벌이고 죽는 결말이 만족스러웠나.

=음, 내 생각엔, 그건 그러니까… 잘 모르겠다. 잘 모르겠어! (웃음) 그렇게 정점으로 치닫는 대접전 종류의 결말을 해 본 적이 없어서 사실 흥미진진하긴 했다. 영웅, 주인공이 영화 끝에 죽는 것도 드문 일이라고 생각했고, 결국 가족들을 찾아가고 하는 아름다운 영적 요소들도 좋았다.

-평범해 보이는데 영화마다 변신을 하는 배우가 있는가 하면 자기 색깔이 분명해서 영화에서 돋보이는 배우가 있는데, 자신은 어떤 배우라고 생각하나.

=모든 종류의 역할을 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좋아한다. 종종 어떤 배우들은 전체 폭을 보여줄 기회를 차단당한다. 뛰어난 배우들이 많은데 불행히도 할리우드는 같은 배우에게 같은 유형의 배역만 맡기는 경향이 있으니까. 난 각각 다른 역할을 창조하고 다른 영화들에서 연기할 좋은 기회가 많았다고 생각한다. 난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만하게 말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웃음) 어떤 기회든 좋아할 것 같다. 근데 왜 여기자들만 질문하는지 물어봐도 되나? (장내 웃음) 아니 괜찮은데, 별 상관은 없는데, 그냥 궁금해서…. (수줍어서 그렇다고 하자) 어, 부끄러워할 필요없다. 날 봐라, 난 거의 재판대에 오른 심정인데.

-<악의 꽃>에서처럼 선량한 역할이건, <글라디에이터>처럼 악역이건 상관없이 항상 복합적이고 비주류적인 연기를 보여주는데.

=그게 내가 영화에서 찾는 바다. 대부분 영화에서 90분 플러스 알파의 시간 동안 캐릭터를 소개하고 그 인생의 운명을 보여줘야 하는데, 사람은 한 가지만 가진 게 아니다. 우리 모두 너무나 많은 면, 층을 가지고 있다. 난 캐릭터의 그 모든 다른 면들을 탐사하고 보여주려고 애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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