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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댄스 댄스 댄스
유재현(소설가) 일러스트레이션 신용호 2005-06-17

생전 댄스와는 담을 쌓고 살아왔다. 그렇다고 댄스를 무시한 적은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트위스트를 추고 싶었고, 중학교 시절에는 멋지게 고고를 추고 싶었으며, 공업고등학교 시절 끝 무렵에는 기똥차게 디스코를 추고 싶었다. 댄스에 대한 이 줄기찬 나의 욕망은 80년대에 들어서 시대의 어둠 밑바닥으로 죄의식과 함께 깔려버렸다. 10여년 전 <서울의 달>이란 드라마가 장안의 전파가(價)를 올릴 때 한석규처럼 제비가 되어볼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인생이 막장인가 싶던 세월이었으므로 못할 일도 없었지만 하필 제비였던 것은 <서울의 달>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는 춤 한번 멋지게 추어봤으면 했던 오래전의 꿈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하여 서울 변두리의 카바레에까지 견학까지 가기에 이르렀는데 애당초 될 일이 아니어서 이내 포기해버리고 말았다(막장의 인생에서는 되는 일이 없게 마련이다).

다시 세월은 흐르고 두달 전 쿠바, 카리브해를 낀 남부의 트리니다드(Trinidad). 이른 아침에 아바나를 떠나 해가 진 뒤에야 도착한 탓에 녹초가 되었는데도 마요르(Mayor) 광장 뒤편의 음악회관에서 공연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이 절로 동했다. 음악회관 앞에서는 이제 막 한바탕의 연주가 끝나고 다음 연주가 시작될 참이었다. 젊은이들과 늙은이들이 섞여 연주팀을 이루고 있는 것이 이채로웠다. 회관 마당에 마련된 작은 무대 앞에는 스테이지에 해당하는 공간이 있고 그뒤로는 테이블과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관객의 대부분은 관광객들인 듯했다. 물론 트리니다드 젊은이들도 눈에 띄었다. 연주가 시작되자 살사판이 벌어졌다. 듣던 대로 정열적이고 다이내믹했다. 리듬은 그다지 격렬한 것으로 들리지 않는데도 춤꾼들의 스텝과 허리놀림은 빠르고 격렬해 나 같은 인간은 다음 세상에서나 한번쯤 도전해볼 수 있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분위기는 이미 한껏 고조되어 있는 중이었다. 이날 밤 가장 돋보이는 커플은 관광객으로 보이는 서양여자와 트리니다드 살사교습소 강사쯤으로 보이는 건장한 뮬라토 청년이었다. 아마도 살사란 5분간의 연예와 같다는 속설을 그대로 믿는 것처럼 보이는 여자의 남자친구가 헤벌쭉 실실 웃으며 카메라를 눌러대는 앞에서 둘은 천생연분의 커플처럼 돌기도 잘 돌았다. 여하튼 댄서들도 관객도 흥겹고 즐거운 밤이었다.

그렇게 돌기를 여러 번, 어느 때였을까 슬그머니 새 손님이 나타났다. 작은 키에 곱슬머리, 얼굴에는 온통 주름이 가득한 노인이었다. 남루하지만 그래도 신경을 써 차려입은 검은색 양복 상의와 목에 걸린 은색의 체인이 아니었다면 그저 평범한 촌로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노인이었다. 노인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간단히 목례를 보내고는 잠시 연주가 끝나기를 기다리더니 다음 연주가 시작되기 전에 예의 관광객 여자에게 춤을 청했다. 적당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살사에 푹 빠져 쿠바에 오지 않았나 싶은 여자는 마다지 않았고 뒤이어 문외한인 나도 감동하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 벌어졌다. 방금 전까지 여자와 돌던 청년이 트리니다드의 댄스교습소 강사라면 노인은 트리니다드의 살사신(神)이었다. 누구라도 그것을 알 수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여자와 돌던 청년과 달리 노인은 마치 구름 위를 걷는 신선처럼, 돌기는 돌되 멈추어 있는 것처럼, 젊은 여자의 격렬한 스텝과 허리놀림을 모두 빨아들여 무화시키면서도 변함없이 온후한 표정. 게다가 노인의 이마에는 한 방울의 땀도 배어들지 않았고 호흡조차 평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노인은 관광객 여자와 두번의 춤을 추었다. 그리고 음악회관 앞마당에서 벌어진 저녁 연주회는 막장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마지막 연주가 시작되기 전 노인은 계단 옆 나무 아래 서 있던 여인에게 춤을 청했다. 트리니다드의 평범한 중년 여인이었다. 그녀 역시 검은 원피스를 차려입기는 했지만 너무도 뭉툭하고 굵은 몸매여서 마치 항아리를 보는 느낌이었다. 자, 음악이 시작되자 둘은 춤을 추었고 노인의 이마에 마침내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는 것쯤으로 이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것이 좋겠다. 다만 여러분들은 트리나드의 광장에서 기념품을 파는 평퍼짐한 중년의 여인을 지나치거나 농민시장 옆 골목 담벼락 아래 쭈그리고 앉아 조악한 시가를 빨고 있는 노인을 지나칠 때에 모쪼록 그분들이 살사의 신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시었으면 한다.

아, 댄스는 아름다워라. 인생은 아름다워라. 혁명은 아름다워라. ¡La danza es bella! ¡La vida es bella! ¡La revolucion es bel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