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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수줍은 순애보, 가오루 모리의 <엠마>
이다혜 2005-07-08

19세기 말 영국. 엠마는 메이드고, 그녀와 사랑에 빠진 윌리엄은 부잣집 도련님이다. 그런데 이들은 신데렐라와 백마 탄 왕자에 대입이 되지 않는다. 섬세한 필체로 그려넣은 장면들을 보고 있자면 책장이 유리창이 되어 엠마의 삶을 엿보는 기분이 드는데, <엠마>를 보면서 어느새 나는 “메이드와 사랑에 빠졌다”. 메이드는 에로영화(혹은 만화), 라는 공식에 익숙해 있던 내게 이런 변화는 엄청난 것이었다(순정만화는 거들떠도 안 보던 남동생도 <엠마>에 미쳐 있는 걸 보면 물건은 물건이다).

주인공 엠마는 메이드로 예쁘고 말이 없으면서 수줍음도 많다. 엠마는 오랜 가정교사 생활에서 은퇴한 스토너 부인의 시중을 들고 있다. 스토너 부인의 제자였던 부잣집 도련님 윌리엄은 아무래도 좋다는 식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닌 남자로 엠마를 좋아하게 된다. 어느 날 스토너 부인이 죽으면서 두 사람의 운명은 흩어진다. 윌리엄은 집안에서 정해준 정혼자 엘레노아가 있고, 두 사람은 자주 얼굴을 보기도 힘들어진다.

신분의 차이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엠마와 윌리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서로를 향한 마음도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터라 극적인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윌리엄과 엘레노아의 약혼 파티에 우연히 윌리엄의 어머니와 함께 참석하게 된 엠마라든가, 서신 왕래를 하던 중 윌리엄이 엠마를 찾아간 장면들은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즐거움을 안겨준다.

작가 가오루 모리는 “그려보고 싶은 것들”이라는 이유로 엠마와 윌리엄을 다양한 무대에 몰고간다. 만국박람회 장면이나 형제들을 무더기로 등장시킨 이유는 19세기 말 영국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그림을 그리는 게 즐거워서 곤란할 지경이랍니다”라고 고백하는 작가는 각종 자료서적과 애정으로 한칸한칸을 메워나간다. 이번에 발매된 5권에서는 윌리엄 부모의 젊었을 때 이야기가 나오고, 윌리엄의 혼사는 좀더 진전되며, 윌리엄과 엠마의 감정은 더욱 깊어진다. <엠마>의 가장 큰 매력은 완급조절에 있다. “자동차도 오토바이도 아닌 자전거로 전력질주하는 것 같은 만화”라는 평을 들었다고 만화가가 이야기하는데, 그 표현이 적확하다. 자전거를 타고 전속력으로 질주하듯, 숨이 턱까지 차올라 숨이 넘어갈 듯해도 주행거리는 얼마 안 된다는 게 <엠마>의 가장 큰 아쉬움이다. 5권이 끝나는 순간 6권 발행까지의 기나긴 시간을 어떻게 보내나 괴로워지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