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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시행착오와 그 해법
2001-07-20

`오차율 5%`, 실패한 꿈을 넘어서

+ , `표준형` 블록버스터 도전기

“이기 뭐꼬?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아이가.” 지난 7월9일 부산의 중심가 중앙동 거리를 지나던 행인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내던지며 낯설기 그지없는 풍경에 넋을 잃고 있었다. 알록달록 새 옷을 입은 듯한 간판에는 ‘無門’, ‘居酒屋’,‘石の花’ 등의 글자가 적혀있고, 전봇대나 벽에는 일본어로 된 ‘投融社’나 식당의 안내광고 전단이 다닥다닥 붙어있으며, 길바닥에는 일본제 식료품을 담았던 종이박스가 굴러다니고 있는 것 아닌가. ‘아무리 일본인 관광객이 넘실거리는 부산이라지만 이 정도까지…’라는 생각이 스쳐갈 때 쯤 “슛 들어갑니다∼. 자,레디∼ 액션!”하는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퍼졌다. 그제서야 ‘영화의 도시’ 시민들은 “그러면 그렇지…”라는 반응을 보이며 “장똥거이가 나오는 그 영화”라며 본격적인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1945년 당시 한국이 일본의 강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는 역사적 가정 하에 2009년 한국의 미래상을 그리는 영화 는 이날 촬영으로 8부 능선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순제작비 50억원이 넘는 대작, 소위 블록버스터 영화인데다 신인 감독이 현장을 지휘하고 있는 탓에 주변에서 수근거리는 소리가 부담스러웠던 제작진은 이제 가뿐 숨을 고르고 있는 분위기였다. 물론 몇 개의 대형 액션신을 남겨두고 있는 상황이지만, 비슷한 규모의 다른 영화에 비해 일정에서나 제작비 면에서나 당초의 계획을 비교적 잘 지켜나가고 있다는 자체 판단 때문인지 제작진의 표정에선 나름의 여유를 읽을 수 있었다. 이들의 여유에는 나름의 ‘블록버스터 전략’이 성공적으로 실현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도 묻어 있었다. 이 영화에서 제작사인 인디컴과 이시명 감독이 설정한 블록버스터 전략의 구호들은 그동안 비슷한 규모의 다른 한국영화가 추구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출현한 이른 바 ‘한국적 블록버스터’들의 케이스 스터디 결과를 반영해서인지 그 구호 아래 담긴 내용물은 유별나게 촘촘해 보인다.

#1전구 5개=200만원? - 예산안의 함정

이 영화는 보통 영화의 몇배에 해당하는 세트장에서 촬영이 진행됏다. 가까운 미래란곤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다보니 미술, 의상 등 시각 파트에만 10억원이 훨씬 넘는 예산이 배정됐을 정도. 블록버스터영화답게 시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치밀하고 정교하며 큰 규모의 세트가 필요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세트는 복잡한 구조를 갖추게 됐다. 어느날 한 감독급 스탭이 이미 완성된 세트장 한쪽에 전구를 추가로 대여섯개만 더 달자고 제안했다. 5천~6천원 정도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김윤영 프로듀서는 당연히 그러자고 했다. 하지만 다음날 제작부 스탭이 가져온 청구서를 본 김 프로듀서는 경악햇다. 200여만원의 액수가 적혀 있었던 것. 전구를 달기 위해선 전기선이 추가로 공급돼야 했고 이를 위해서 `아시바`를 세워야 했으며, 이를 옮기기 위해선 이동차를 사용해야 하는 등의 내용이었다. 이처럼 하나를 바꾸면 다른 요소가 `줄레줄레 따려오는`일은 복도 세트를 연장한다든가 하는 일마다 발생해 제작진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런 `딸려오는` 상황은 제작비는 물론이고 일정에도 영향을 끼쳤다.

#2총을 둘러싼 모험 - 액션장비 수급의 먼 길

블록버스터를 추구하는 이 영화에서 인물들이 갈등하고 대립하는 구도는 총기를 이용한 액션을 통해 많이 드러난다. 때문에 자작진은 비교적 일찍 총기를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정보는 미국에서 총기를 들여와 촬영한 다른 영화의 제작진. 그는 총기 반입 절차와 문제가 발생할 경우, 어디어디에 `기름칠`을 해야 하는지까지 비교적 상세한 내용을 알려줬다. 하지만 웬걸, 20여정의 총기는 촬영이 임박했는데도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김 프로듀서가 해결을 위해 미국으로 날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미국에서 총기를 해외로 보내는 것을 관장하는 부처가 국무성이고 수출 기준이 총기의 수량과 계절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됐다. 결국 그 절차대로 서류를 제출하자 수개월이 걸려도 해결되지 않던 총기수입은 이틀 만에 가능했다. 그제서야 김 프로듀서는 “얕은 요령은 적법적인 절차보다 효율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총기와 관련된 또 하나의 시행착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사용되는 총기는 M60 기관총 한정이었다. 그런데 미 총기거래상이 “나 같으면 두정을 가져갈 텐데...”라며 지나가던것. 그저 장사꾼의 입바른 소리겠거니, 하고 넘겼던 김 프로듀서가 그 미국인의 `깊은 뜻`을 알아차린 것은 한국에 돌아온 직후엿다. 기관총이라는게 한번에 오래 사용하면 무리가 가 자주 휴식을 취해야 하고 고장도 잦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 후회는 약이 됐다. 사카모토(장동건)와 사이고(나카무라 도오루)가 타고 다니는 고급 스포츠카를 일본에서 들여올 때 제작진은 이와 비스름하게 생긴 자동차 한대를 더 섭외했고, 이 자동차는 두고두고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었다.

#3나카무라 도오루 수송작전 - 해외캐스팅의 복병

이 영화 블론버스터 전략 중 하나는 해외, 특히 동남아시아에도 먹히는 영화를 만들자는 것. 이 정도의 제작비 규모라면 해외수출을 통한 자본회수에도 상당부분 신경을 써야 하는 탓이다. 때문에 제작진은 일본배우 8명을 기용했다. 하지만 외국배우, 특히 일본의 유명배우와 국내배우의 차이점을 몰랐던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일본의 경우 영화제작이 배우를 중심으로 이뤄지며, 제작진의 배려도 남다르다. 예컨대 상대방에게 얻어맞는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애초 계획에 없던 와이어를 배우의 등에 붙이고자 할 때, 한국 같으면 “이거 이렇게 해야 하는데”라고 감독이 지시하면 배우는 “그러지 뭐”식으로 반응하지만 일본배우의 경우 매니저부터 시작해서 배우에게까지 매우 조심스럽고 정중하게 지시, 아니 제의를 해야 했다. 만약 배우가 “그건 좀 아닌데”하는 식의 반응을 보이면 그 방식은 포기해야 했다. 또 일본의 경우 조연급 배우까지 향후 6개월 동안의 스케줄이 빡빡하게 구성돼 있기 때문에, 우리 식대로 촬영일정을 계획보다 며칠씩 미루다보면 모든 일정을 재조정해야 하는 치명적인 경우까지 생길수 있다는 사실 역시 나중에야 알게 됐다. 중국에서 촬영을 마친 나카무라를 일본으로 보내기 위한 `작전`도 땀나는 순간이었다. 일본 <후지TV>의 드라마 촬영 때문에 일본으로 향해야 하는 나카무라를 가로막은 것은 국내 항공사의 파업. 제작진은 베이징, 상하이 등 다른 루트를 긴급 수배하는 등 난리법석을 떨었지만, 결국 그를 일본으로 돌려보내는 임무는 성고하지 못했다. 물론 제작진의 탓이 아니었지만 노발대발하는 나카무라쪽을 달래야 하는 일은 고스란히 이들의 몫으로 돌아왔다.

#4일본 `영화물가`를 몰랐다 - 해외로케의 걸림돌들

영화의 내용 자체가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내용이긴 하지만 일본에서 최고가를 받고 수출하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는 이 영화에선 일본 로케이션도 중요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영화제작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없었던 제작진은 빡빡한 상태에서 일본 촬영을 진행해야 했다. 인건비가 비싸고 근무시간에 대한 태도가 철저한 일본 스탭의 경우, 약속시간을 정확하게 지키는 반면 예정된 촬영시간이 넘어서면 발전차를 꺼버리기도 했다. 그쪽이라고 `유도리`가 없었겠냐마는 한국의 영화풍토에 젖어 있던 제작진은 어떤 방식으로 의사를 전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해 한동안 고생해야 했다. 또 장비 대여료가 엄청나게 비싸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야 하는 부분. 한국에선 흔히 쓰이는 지미집 카메라를 쓰자고 했더니 일본쪽에서는 “꼭 지미집을 써야 하나? 물론 쓸수는 있지만 너무 비쌀것”이라며 달리를 쓰자고 제안했다. 그나마 카메라가 들써거리는 낡은 기자재라 박현철 촬영감독은 고생스러운 작업을 해야 했다. 하지만 김태영 인디컴 대표는 “그렇다고 외국 촬영이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스탭 대부분이 경력 10년 이상의 베테랑이었기 때문에, 우리 제작진한테 저들을 선배로 모시고 `배운다`는 자세로 임하라고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고 말한다.

#5남은 과제들 - 문제는 결국 시스템

아무리 드라마 구조를 보조하는 역할이라고는 하나 이 영화에서 볼거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었다. 만약 액션장면이나 CG화면이 어설프게 보인다면 오히려 극적 리얼리티를 떨어뜨리는 역효과를 빚을 터이므로 최대한 정교하게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하고 싶어도 한국 기술수준이 따라오지 못하는 문제도 있었ㄷ. 대표적인 경우가 서해대교 폭파장면, 제작자와 프로듀서는 서해대교에 헬기가 떨어져 폭파되고 다리가 끊어지는 장면에 이시명 감독이 큰 기대를 걸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인허가문제는 물론이고 한국 수준에선 어려운 기술이라고 판단해 과감하게 포기했다. 만약 한국의 특수효과, CG 기술수준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면 불필요한 작업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 프로듀서는 이같은 시행착오와 관련해 “결국 문제는 시스템”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지적하는 시스템의 문제란 “블록버스터영화의 경우 제작부를 현장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파트, 감독과 작품내용을 조율하는 파트, 회계를 관리하는 파트로 나누고 전체 인력도 12명은 넘어야 하다”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예산에 관한 개념이 불분명하고, 50억짜리 프로젝트와 20억원짜리 프로젝트의 진행이나 인력을 똑같게 끌고가려는 것 등 구조적인 부분가지 나아간다.

그렇다고 해서 가 온갖 시행착오에 빠져 허덕이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오히려 이 영화는 이 문제점들을 비교적 가뿐하게 넘어서고 있다. 애초 잡았던 촬영 종료 시점이 7월 하순에서 8월 15일로 미뤄졌고, 제작비도 52억원에서 57억원 정도로 불어난 정도여서 블록버스터영화란 점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선방`한 셈이다. “목표했던 바와의 오차를 5% 이내로 줄인다”는 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비용과 일정이 끝도 없이 늘어났던 다른 블록버스터와는 커다른 차이를 보인다. 또 콜럼비아 관계자의 “할리우드에서 그런 영화를 만든다면 제작비를 그보다 몇배 더 들이거나 2009년에 찍을 것”이라는 우려도 뛰어넘은 셈이다. 이는 영화에 등장하는 2500여컷을 모두 콘티로 그려낼 정도로 철저한 사전준비와 제작사와 투자사의 긴밀한 관계정립을 토한 합리적인 예산안, 액션 등 볼거리보다는 드라마와 캐릭터에 집중하려는 노력 등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런한 점에서 볼 때 “우리의 경험이 그저 잔머리를 굴려 위기를 빠져나가는 요령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제작 준비 때부터 마무리에 이르기까지 참고할 수 있는 하나의 정통적인 텍스트로 수용되길 원한다”는 김윤영 프로듀서의 이야기처럼 의 값진 경험은 한국영화계에의 거름 역할을 해줄 것이 분명하다. 글 문석 기자 ssoony@hani.co.kr사진 이혜정 기자 hyejung@hani.co.kr디자인 장광석 bright8@hani.co.kr 사진제공 R&I커뮤니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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