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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그곳에서 나는
오정연 2005-07-29

그곳에서 나는 고양이이고 싶다. “슛 들어갑니다!” “조용!” 어떤 촬영현장에서건 슛 사인이 난 뒤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대로 멈춰야 한다는 불문율은 동일하다. 좁은 세트장에서 고요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상황이라면, 침 삼키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다. 물론 각 파트의 감독들이 수정이 필요하다면, 배우가 아직 액션에 들어갈 준비가 안 됐다면, 갑작스런 ‘타임’은 가능하다. 그러나 치열한 현장 한구석에서 펜대만 굴리고 있는 기자에겐 어림도 없는 일. 잘 보이는 좋은 자리를 미리 잡아놓을걸 후회해도 소용없다. 까치발로 자리 옮기다가 녹음기사에게 들키는 날엔 대략 낭패다. 목에 방울을 달고도 소리없이 온 집안을 활보하는 우리집 야옹이가 부럽다.

그곳에서 절실한 것은 내 몸을 조그맣게 만들어줄, 앨리스의 물약. 컷 사인이 떨어지면 마법이 풀린 것처럼 스탭들은 일제히 움직인다. 카메라가 세팅을 바꾸기라도 할 참이면, 분주함은 배가된다. 그 현장이 촉박한 개봉일정에 쫓기듯 진행되고 있다면, 육체에 대한 원망은 극에 달한다. 길이에 있어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너비에 있어 그토록 심각한 내 몸이라니. 좁은 공간에서 진행되는 촬영, 길목을 막고 있다가 무거운 장비를 옮기던 스탭 누군가를 주춤거리게 만들 때가 있다. 주요 스탭만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공간에 모니터가 자리잡을 땐 몸을 접어버리고 싶을 지경. 모니터가 보고 싶어도, 연기를 확인하는 배우, 조명과 소품을 점검하는 스탭들의 앞을 가로막을 수 없어 어깨와 어깨 사이로 빠끔히 화면을 짐작하기도 한다. 물론 그 머리 위로 내려다볼 ‘기럭지’ 따위 절대 받쳐주지 않는다.

그곳에선 차라리 투명인간이라면 좋겠다. 어째서 감독과 배우들은 함께 모니터링을 한 뒤에 저 멀리서 대화를 나누는 걸까. 물론 사람마다 성격도 제각각이니 어떤 감독은 모니터 앞에서 바로 지시를 내리기도 하고, 사람 많은 현장 한복판에서 스스럼없이 연기지도를 하기도 한다. 문제는 종횡무진 동분서주하면서 돌아다니는 감독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모든 대화를 엿듣는 것은 그 어떤 강력 철판도 당해내지 못할 일이란 것. 입장 바꿔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인터뷰를 진행하는 내 옆에 앉아 모든 질문을 감시하듯 바라본다거나, 낑낑대며 기사를 써내려가는 모니터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러니 결국 바랄 수 있는 건 모든 감독님들이 메가폰을 십분 활용하는 현장 정도?

현장에는 실로 많은 일이 벌어진다. A 감독은 배우와 이렇게 소통하고, B 배우는 감독과 의논한 뒤 저렇게 달라진 연기를 선보이고, 심지어 X 연출부는 모니터를 슬쩍 확인한 뒤에 소품의 위치를 미묘하게 바꾼다. 그러니 여기저기 자리를 옮기며 촬영을 지켜보고 싶고, 찍힌 화면을 기어이 확인하고 싶고, 감독과 배우의 은밀한 대화를 기어코 훔쳐듣고 싶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할밖에. 공짜로 영화를 볼 수 있고, 배우의 육성을 들을 수 있고, 만든 이에게 직접 물을 기회가 주어진다는 건, 분명 영화기자의 특권이다. 그러나 (적어도 나에게는) 그 영화가 만들어지는 따끈따끈한 현장을 엿볼 수 있다는 것도 중요한 특권(이고 의무)이다. 앗, 그렇게 제작진을 귀찮게 만들면서 얼마나 훌륭한 기사를 썼냐고요? 그렇게 물으신다면, 그냥 웃지요. 허허.

ps. 모든 현장 취재에서 이처럼 주눅이 들어 있는 건 아니다. 몇십명 규모의 취재진이 포토라인에 붙어서서 관전해야 하는 대규모의 현장공개 행사는 우선적으로 제외다. 감독이고 배우고 목소리도 들을 수 없는 상황에서 무슨 눈치를 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