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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여름을 책임질 신간 추리소설 베스트 9
이다혜 2005-07-29

인간의 구매충동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지름신의 존재를 혹시 알고 있는지? 추리, 스릴러, 공포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지금 바짝 긴장할 것. 그분이 올 여름 한국에 강림하신다. 헌책방에서 어렵게 구한 <십각관 살인사건>을 자랑하는 사람이나 일본어 원서로 1048페이지에 이르는 <망량의 상자>를 읽었다는 사람을 부러워했다면, 이제 부러워하기를 그치고 지갑에 든 돈부터 확인하는 게 좋다. 신본격 추리소설의 대표작 중 하나인 <모든 것이 F가 된다>와 <우부메의 여름>, 한 작품으로 두터운 마니아층을 확보한 요괴전문가 교고쿠 나쓰히코의 <망량의 상자>, 일본 정부를 상대로 복수극을 펼치는 사람들의 이야기 <와일드 소울> 등 올 여름에는 해외에서 각종 추리소설 관련 상을 수상한 작품들이 쏟아져나온다. 어떤 책부터 읽어야 할지 갈등 중인 분들을 위해 올 6월과 7월에 발표된 신간 추리, 스릴러 소설을 꼼꼼히 읽고 읽을 만한 책들을 골랐다. 장르가 공포에 가까워 이 글에는 소개하지 못했지만, 홀로 남아 흡혈귀들과 싸우는 한 남자의 고군분투를 그린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도 놓치지 말 것. 영화 <새벽의 저주> <28일후…>를 재미있게 본 사람이라면 더더욱.

결론은 하나. 질러라! 이렇게 읽을 만한 추리, 스릴러가 한꺼번에 나오는 것은 해마다 있는 일이 아니니까.

귀신잡는 탐정의 귀신같은 추리술

<망량의 상자> 상·하

key/ 요괴 전문가 교고쿠 나쓰히코의 교고쿠도 시리즈 두 번째 이야기.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기묘한 사건을 쫓는 시리즈물. 상·하권의 분량이 1060페이지에 달하지만, 일단 이야기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중간에 멈추기 힘들다. 소녀 가나코 살해미수, 가나코 유괴미수, 가나코 유괴 및 연구소 직원 살인사건, 토막연쇄살인사건, 이렇게 네 사건의 해결을 위해 시리즈 첫 번째 이야기 <우부메의 여름>에서 이미 활약을 보여준 주요 화자이자 소심한 소설가 세키구치, 음양사 겸 고서점 주인 교고쿠도, 사람의 기억을 읽는 영능력자이자 탐정 에노키즈가 다시 한번 사건 해결을 위해 뭉친다.

유괴라고 해도 사실 소녀는 경찰 수십명이 지키고 있는 가운데 사라져버렸고, 토막연쇄살인이라고 해도 오직 팔다리만이 연속적으로 발견되는 기이한 사건의 연속이다. 모든 사건은 개별적이지만 동시에 통합적으로, 작가 교고쿠 나쓰히코가 이야기를 풀어가는 솜씨 역시 전작에 비해 능숙해졌기 때문에 빠른 호흡으로 읽어갈 수 있다. 하이라이트인 음양사 교고쿠도의 사건 해설 과정은 추리물의 매력을 제대로 느끼게 해준다. 책을 덮고 나면 인형이라거나 상자, 그리고 책 표지 그림이나 뒤표지의 발췌 글만 봐도 소름이 끼친다.

책 중에서

“아츠코씨의 오라버님이 그렇게 무섭습니까? 근골이 강대하고 구름을 뚫을 만큼 건장한 사람입니까?”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하, 교고쿠도는 근육과도 뼈와도 상관없네. 건장하기는커녕 고목 같은 남자일세.”

“근육도 뼈도 없는 그런 목이버섯 같은 사람이 무섭나요? 이해가 안 가네.”

나는 교고쿠도를 표현할 때 그가 즐겨 사용하는, 가능한 바보 같은 비유를 선택하기로 했다.

“자, 도리구치군. 자네가 터널 한가운데 있다고 생각해보게. 출구는 두 군데일세. 앞문에는 불같이 화가 난 도치니시키(스모 선수, 우승 10회)가 손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네. 뒷문에는 엄청나게 원망스러운 표정을 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유령이 흐릿하게 떠 있지. 자네라면 어느 쪽으로 갈 텐가?”

“으음, 도치니시키는 살아 있는 거지요? 그렇다면 도치니시키쪽으로 가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며 사과하겠습니다. 상대가 유령이어서야 뒤끝이 좋을 리 없으니까요.”

“그렇지? 그런 종류의 무서움일세.”

<부활하는 남자들> 1, 2

key/ 비리를 파고드는 나이 든 경찰, 하지만 그 자신도 청렴과 거리가 멀다면 심판은 누가 받아야 할까.

2004년 미국 에드거 앨런 포상을 받은 <부활하는 남자들>은 에든버러를 무대로 펼쳐지는 레버스 경위 시리즈의 15번째 작품이다. 장수 시리즈답게 레버스 경위뿐 아니라 주변인물의 성격과 사생활, 심리까지 두루 파고들며 재미를 유발한다. 회의 도중 상사에게 화를 내며 컵을 던졌다는 이유로 존 레버스 경위는 경찰학교 교정 프로그램에 보내진다. 팀워크를 통해 과거의 미해결 사건을 수사한다는 이 ‘반항 경관 부활 과정’에서 레버스는 자신이 그다지 깨끗하지 않은 방식으로 연루된 사건을 재수사하게 된다. 레버스 경위는 잠입 수사를 하다가 어쩌면 자신이 목표물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문제는 이 작품이 시리즈의 무려 15번째 이야기라는 것. 인물이 너무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초반에는 뭐가 어떻게 풀려가는지 종잡기 힘들다. 그러나 이 책을 끝내고 나면 레버스 경위 시리즈의 다른 책들의 출간도 기대하게 된다.

<모든 것이 F가 된다>

key/ 외딴섬, 창문도 없이 고립된 건물, 탈출할 수 없는 밀실에서 한 여인의 시체가 발견된다. 힌트는, ‘모든 것이 F가 된다’.

“범인은 우리 중에 있다!”식의 밀실추리물. 모리 히로시는 관 시리즈로 유명한 아야쓰지 유키토와 더불어 신본격 미스터리의 기수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컴퓨터와 수학을 도구로 추리를 펼쳐나가는 교수 사이카와와 그의 천재 제자인 모에가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로, 밀실살인사건과 연쇄살인사건이 긴장감을 유발한다. 논리로 무장한 주인공이 가상 현실과 현실을 넘나들며 트릭을 깨는 순간의 즐거움은 <모든 것이 F가 된다>의 유명세를 이해하게 해준다. 등장인물들이 끝없이 니코틴과 카페인을 섭취하는 장면은 역시 90년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 작품은 제1회 메피스토 상을 받았으며 ‘사이카와 & 모에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 신본격파는 트릭 깨기, 극한의 수수께끼 풀기로 반전이 다수 등장, 추리소설 특유의 재미를 준다. 신본격파의 대표작 중 한편으로 이미 절판되어 전설(?)로만 떠돌던 아야쓰지 유키토의 <십각관의 살인> 재출간 소식도 들려온다.

국가를 향해 쏴라

<와일드 소울> 1, 2

key/ 죄를 지은 게 개인이 아니라 한 국가라면? 자신과 가족을 사지로 내몬 정부에 복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 책의 목적은 범죄의 내막을 밝혀 범인을 검거하는 것이 아니다. 독자 입장에서도 범인을 말리고 싶지 않다. 전후 식량난과 빈곤에 허덕이던 일본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한 남미 이주정책 때 브라질로 간 사람들은 밀림에서 짐승처럼 생활하다 풍토병으로 하나둘 목숨을 잃는다. 40년 뒤, 살아남은 자들이 복수를 위해 일본으로 돌아온다.

아무리 갈아엎어도 농토가 되는 대신 물에 잠기는 땅과 전염병이 끝없이 도는 땅. 그들에게 브라질은 그저 녹색의 지옥일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살아남는다. 복수를 한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오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이들도 알고 있다. 무고한 사람들을 해치는 것으로 힘을 보여주겠다는 것도 아니다. 한 국가를 상대로 한 복수극에 독자들을 몰입하게 하는 것은 바로 주요 등장인물들의 매력이다. 매춘을 하는 여자의 이야기를, 마약을 거래하는 남자의 인생담을 따라가다보면 가장 합리적인 대응 방식은 복수뿐이라고 믿게 되기 때문이다. <와일드 소울>은 일본 추리작가협회상,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신인상, 오야부 하루히코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책 중에서

“우기여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체는 곧 썩기 시작했어. 배가 부풀어 오르고 얼굴에 이상한 반점이 생기더군. 피부를 누르면 꾹 들어갔어. 눈과 입에선 파리가 들끓었고. 콧구멍에도. 나중에는 구더기도 나왔어. 나는 겁이 났지. 눈물도 나오지 않더군.”(중략)

가족 이외엔 아무도 없는 이민지의 작은 세계. 그리고 그 세계를 가꾸어나간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이에게 전능한 신과 같았다. 그 신에게서 구더기가 나오고 썩어간다. 그래도 아이는 신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 그 과거에 대해 복수하기 위해 여기에 와 있는 것이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key/ 첩보 스릴러의 대가 존 르카레의 대표작 중 하나. 잔혹한 국제적 음모 속 스파이를 찾아라.

스릴러 팬이라면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이다. 첩보원 조지 스마일리와 소련 정보부 수뇌 카를라의 대결을 다룬 <카를라를 찾아서> 삼부작 중 첫 번째 이야기.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로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는 존 르카레의 전작 19편이 열린책들을 통해 국내 출간되는데, 그 첫 번째 작품이기도 하다. “키가 작고 땅딸막한데다 중년의 신사인 그는 외관으로 보아 큰 상속 재산은 있을 것 같지 않은, 영락없는 런던 무지렁이였다”고 묘사되는 스마일리는 은퇴한 영국 정보부 첩보요원. 소련 정보부에서 수십년 전 고급 스파이를 영국 정보부에 심어두었다는 정보를 입수한 스마일리는 두더지를 찾으려 애쓴다. 이 책은 치밀한 두뇌싸움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스파이들의 세계를 숨막히게 그린 스릴러물로, 60년대 냉전하에 있었던 케임브리지 출신 엘리트의 소련 이중간첩 실화를 소설화했다. 옛 <스타워즈> 시리즈의 오비완 캐노비, 알렉 기네스 경이 출연하는 TV시리즈물로 제작되기도 했다. 작가는 책 말미의 후기를 통해 작품을 쓰기까지의 이야기 등을 털어놓는다.

<라파엘로의 유혹>

key/ 시공간의 입체 퍼즐을 맞추는 미술사 미스터리. 라파엘로, 파르미자니노 등의 500여년 전 명화들이 품고 있는 수수께끼는?

이 책을 이야기하기 전에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작품이 있다. <다빈치 코드>를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보다 깊고 훨씬 재미있는 책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같은 저자가 쓴 <핑거포스트, 1663>을 꼭 읽어볼 것. 그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이언 피어스의 이름만으로 이 책을 주저없이 집어들 것이다.

젊은 미술사학도 아가일은 라파엘로의 미발견 걸작이 이탈리아의 한 작은 성당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가일 사건을 수사하던 미술품 절도반 보탄도 반장은 그와 함께 그림의 행방을 좇는다. 이언 피어스의 매력은 탄탄한 글솜씨와 구성에 있다. 역사와 미술을 소재로 한 작품들에서 장기를 보이는 그의 우아한 문장은 추리소설을 읽을 때의 짜릿함과 문학 작품을 읽을 때의 뿌듯함(?)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영국의 모스 경감을 아시나요?

<사라진 보석>

key/ 홈스보다 인기있는 영국의 모스 경감,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그의 알 수 없는 성적 매력.

영국인들이 셜록 홈스보다 더 좋아한다는 엄청난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모스 경감 시리즈 선집이 해문출판사를 통해 나오고 있다. 원작 발표 순서와 국내 발표 순서가 어긋난다는 점은 아쉽지만, 영국식 유머가 섞인 이 정통 추리물 시리즈는 ‘즐거운 책읽기’를 선사한다. <옥스퍼드 운하 살인사건> <숲을 지나가는 길> <사라진 보석> <제리코의 죽음>이 해문을 통해 소개되었고, 다른 작품들도 계속 나올 예정이다. <사라진 보석>은 한 여인의 죽음 그리고 중세 보물의 증발과 함께 시작된다. 그리고 보물의 행방을 추적하던 수사팀은 잇따라 터지는 살인, 자살 등의 사고와 맞닥뜨린다. 모스 경감의 매력은 인간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천재가 아니다. 안락의자에 앉아 사돈의 팔촌 얘기까지 들먹이거나, 콧수염을 배배 꼬며 회색 뇌세포 운운하며 거만을 떠는 타입과는 거리가 먼 모스 경감은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발군의 헛다리 짚기와 삽질 실력을 보여준다. 그는 직접 발로 뛰면서 정보를 수집하고, 엉뚱한 길과 막다른 골목에도 부딪혀가며 꼼꼼하게 진실을 더듬어간다.

책 중에서

당뇨병 환자에게 소위 ‘균형’이 필요하듯이 다시 말하면 혈당조절을 위해 적당한 인슐린 주입이 필요하듯이 모스 역시 스스로가 건강한 성욕이라고 진단내린 것이 요구하는 것에 부응하기 위해 가끔은 적당히 야한 취향으로 ‘균형’을 잡아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주 초, 걸프전으로 값이 폭등한 기름을 재규어에 가득 태우고 일간지들 위로, 가장 높은 선반에 죽 진열된 포르노 성향의 잡지들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남성전용’ ‘에스코트’ ‘나쁜남자’ ‘비디오 XXXX등급’ 같은 상당히 낯익은 제목들과 다시 해후했다. 그 밖에도 많았는데, 그런 잡지들은 하나같이 표지에 큰 가슴과 요염한 몸매로 선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여자가 등장해 자극에 약한 운전자들을 유혹했다.

그가 그중 한권을 집어서 가볍게 훑어보고 난 직후, 하필 자료조사과의 호지스가- 젠장, 저놈의 눈!- 신문 가판대로 다가와 ‘데일리 미러’가 쌓여 있는 곳에서 맨 위의 딱 한부만 집어드는 것이 아닌가. 모스는 즉시 ‘더 타임스’를 집어들었다.

<게임의 이름은 유괴 - g@me>

key/ 유괴범과 피해자가 파트너가 되어 유괴 게임을 벌인다. 청춘의 데드마스크.

어머니와 딸의 영혼이 바뀌는 이야기를 다룬 히로스에 료코 주연의 영화 <비밀>과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된 <호숫가 살인사건>의 원작소설을 쓴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성공을 거듭하던 사쿠마 순스케는 자신의 기획이 무시당하자 패배를 받아들이는 대신 복수의 칼을 간다. 그는 부사장 딸 주리의 가출 현장을 목격하는데, 공교롭게도 주리 역시 자신을 무시하는 아버지에게 단단히 질려 있다. 두 사람은 힘을 합해 부사장을 공격하기로 한다. 사쿠마 순수케는 유괴범이 되고 주리는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백야행>의 어둡고 애절한 분위기와 달리 <게임의 이름은 유괴 - g@me>은 가볍고 경쾌하다. 진지하고 복잡한 두뇌싸움 없이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 이 작품 역시 일본에서 영화화되었다.

<열녀문의 비밀- 백탑파白塔派 그 두 번째 이야기> 상, 하

key/ 한국의 역사 추리 시리즈. 거짓 열녀를 적발하라는 정조의 특명.

역사물에 장기를 보이는 김탁환의 백탑파 시리즈 두 번째 작품. 외국 인명, 지명보다 한자가 낯선 사람이라면 초반에 폭주하는 한자 인명, 지명, 직위명, 표현 등에 당황할 수도 있다. 시리즈 첫 작품인 <방각본 살인사건>보다 <열녀문의 비밀- 백탑파白塔派 그 두 번째 이야기>쪽이 더 추리적인 면이 탄탄하다. 열녀를 강요하는 조선시대 사회 분위기와 사건이 자연스레 맞물린다. 검서관으로 등용된 서얼 출신 백탑파 인재들인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서이수. 이덕무가 5년 만에 적성 현감으로 부임하게 되자, 이들은 개혁을 이루고 실용적인 사회 건설을 할 수 있는 북학을 실천한다는 열망에 들뜬다. 거짓 열녀를 적발하라는 명을 받들던 이들은, 죽음으로 그 존재가 잊혀진 여자 천재 김아영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수상쩍은 사건의 냄새를 맡는다. 김탁환의 환상적 요괴소설인 <부여현감 귀신체포기>도 읽어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