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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금자씨> [1]

박찬욱의 복수 3부작 최종편 <친절한 금자씨>

복수는 그녀처럼 아름답게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가 7월29일 관객과 만난다. 이 작품은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에 이은 복수 3부작의 대단원으로 “화사하고 서정적인” 복수극이 될 것이라고 예고돼왔다. 영문 제목 <심퍼시 포 레이디 벤전스>(Sympathy for Lady Vengeance)가 뜻하듯 금자씨(이영애)의 복수 행각에 대해 넘쳐나는 동정이 서정을 넘어 서글픔을 안겨준다. 쉼없이 떠오르는 회상장면을 통해 금자씨의 정체와 사연을 서술하는 순간들에서 박찬욱표 스타일이 흘러넘치며 과하지 않은 유머들은 비극성을 증폭시킨다. 확실히 <복수는 나의 것>이나 <올드보이> 같은 팽팽한 긴장의 순간들은 이완되고 지연된다. 그런데 3부작 마지막에서 희망을 보게 되리라던 박찬욱 감독의 ‘공언’은 명쾌히 지켜진 것일까? 정말 희망이 있긴 있는 걸까? 결국 이번 특집에선 <친절한 금자씨>를 중심으로 복수 3부작이 전하는 희망의 윤리학이 무엇인지, 폭력과 스타일로 넘치는 박찬욱의 미학이 어디쯤 위치한 것인지 다시 한번 탐구해야 했고, 더불어 감독에게 묻고 또 물어야 했다. 여기에 국내외 평론가의 4인4색 비평을 함께 싣는다. <버라이어티>의 수석국제평론가 데릭 엘리, 영국의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즈, <스크린 인터내셔널>의 달시 파켓, 그리고 김소영 영상원 교수. 이들 모두 <씨네21>의 초대에 기꺼이 응해 7월18일의 첫 시사회에 참석해주었다.

P.S 박찬욱 감독은 시사회에서 “3분의 2 지점에서 다른 이야기처럼 예상밖으로 진행된다. <올드보이> 같은 충격적 반전은 아니고 이것이 비밀이라면 비밀이어서 스토리를 미리 공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이 대목을 그냥 지나치고는 <친절한 금자씨>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했다고 할 수 없는 딜레마가 생겼다. 단순한 반전이나 비밀이 아닌 영화의 가장 굵은 골조를 이루기 때문이다. 영화사 역시 어디까지가 스포일러이고 어디까지가 아닌지 선을 긋기 어려워했다. 이번 특집에서 스포일러를 피한다고 피했으나 불가피하게 그 흔적들이 드러나곤 한다. 특히 4인4색 비평에 ‘스포일러 지뢰밭’이 깔려 있다. 독자의 이해를 구한다.

“너나 잘하세요.”

금자씨(이영애)가 출소하면서 무표정하게 처음 내뱉는 이 말은 복수 삼부작의 최종 결론이자 박찬욱 잔혹극의 윤리학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다. 금자씨가 13년 만에 감옥 문을 나서자마자 마주하는 건 그의 구원을 애타게 고대하던 전도사(김병옥)다. 금자씨는 신의 심부름꾼이 내민, 다시는 죄를 짓지 않기를 바라는 상징인 두부를 거부하며 싸늘하게 말한다. “너나 잘하세요.”

나는 나대로 잘할게요

이 말 앞 혹은 뒤에는 당연히 이 말이 생략돼 있다. “나는 나대로 잘할게요.” 나의 구원은 신조차 해결할 수 없는 나의 문제인 것이다. 회피하든 돌파하든 어김없이 조여오는 비극적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응할 것이냐는 건 결국 개인의 선택에 달렸다. 시스템이 해줄 수 있는 건 없다. 신의 종(전도사)은 순수 악(백 선생-최민식)과 모종의 거래를 트며, 수사기관(최 반장-남일우)은 진범을 체포할 능력을 상실했고 나아가 금자씨가 진범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감옥으로 보낸다. 또 국가가 관장하는 감옥 안의 질서는 정글이다. 교도관의 존재는 유령처럼 느껴진다. 감옥의 주인은 금자씨의 친구이거나 사라져주어야 할 폭군이다. 복수를 대신해야 할 재판이라는 심판 기구는 인민재판으로 대체될 수밖에 없을 만큼 무기력하다고 피해자들은 만장일치를 본다. 새삼스러운 건 아니다. <복수는 나의 것>의 동진(송강호), <올드보이>의 오대수(최민식)를 지원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사랑하는 연인조차. 그러니 금자씨가 신과 우리에게 너나 잘하세요라고 말할 만하다. 이런 점에서 금자씨가 전도사가 내민 두부를 거절하고 자신이 직접 만든 두부 모양의 케이크에 얼굴을 박는 건 참으로 일관성 있는 행동이다.

딜레마는 여기서 다시 시작된다. <친절한 금자씨>의 곳곳에 흐르는 비발디의 바로크 선율이 암시하는 것. 바로크 비극은 페허와 죽음을 향한 멜랑콜리다. 육신의 죽음은 부활로 새 생명을 얻으리라 확신하고 죽음을 예찬할 수 있었던 중세의 믿음이 종결되면서 찾아온 사조. 사람들은 해골이 피할 수 없는 자신의 허약한 결말이며, 해골은 그냥 해골로 끝난다는 걸 알아버렸다. 바로크 비극은 바로 그 체념의 멜랑콜리를 노래했다. 나만 잘한다고 해서 나의 최종 심급을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박찬욱은 거듭 말한다. “최후의 선택인 복수로도 구원받을 수 없다. 다만 그 구원을 향한 수고에 아름다움이 있고 희망이 있다.” 음악이 아니더라도 <친절한 금자씨>는 바로크 비극의 테두리 안에 있다.

그럼 구원 따위는 애초부터 기대하지말고 체념한 채 나만 잘하자? 여기서 금자씨는 <복수는…>의 동진이나 <올드보이>의 오대수보다 ‘진화’된 윤리학을 보여준다. 금자씨 이전까지 박찬욱의 과잉된 스타일은(그게 미니멀하든 화려하든) 영화 전체에 뿌려져 있었지 개인에게까지 닿아 있지 않았다. 동진은 머리든 옷이든 말투든 뭐든 자기 스타일을 돌아볼 여력이 없었다. 오대수는 그래도 낫다. 그는 (성나서 그랬겠지만) 사자머리에다 선글라스를 쓰고 복수를 스타일화한다. 게다가 복수극과 뒤엉킨 것이긴 해도 섹스까지 즐긴다.

무조건 예쁜 게 좋아

금자씨에 이르면 영화만큼이나 자신의 스타일이 중요해진다. 시대에 좀 뒤처진 듯해도 자신과 잘 어울리는 물방울 무늬와 꽃무늬 원피스를 즐겨입고, 알랭 미클리 선글라스를 벗으면 채도 높은 빨간색 아이섀도가 그의 눈을 장식하며 심벌로 작동한다. “힐은 없니?”라거나 복수의 흉기가 될 총의 제작을 주문하면서는 “예뻐야 돼. 무조건 예쁜 게 좋아”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말로 자기 스타일을 드러내는 경우는 삼부작 중 처음이다. 복수의 처단식장에선 검은색 가죽 롱코트로 서구적 여전사의 풍모마저 내비친다. 또 그의 손끝에선 총알이 튕겨져나가 귀여운 강아지의 숨을 끊어놓기도 하지만 맛이나 모양에서 예술품에 가까운 케이크를 빚어내기도 한다. 그리고 섹스. 오대수의 그것과 달리 금자씨는 복수극과 무관하게 섹스를 이끈다. 금자씨는 끝내 영혼을 구원받지 못했다고 슬퍼하지만 낙차 큰 연하의 꽃미남 애인과 어여쁘고 야무진 딸을 그의 곁에 남겼다. 죄의식을 개운하게 털어내지는 못했지만 금자씨는 이들과 더불어 예쁜 여생을 보냈을 것 같다. 그래서 금자씨의 윤리학 앞에 미(美)란 단어를 추가할 만하다. 미적 윤리학. 미적 윤리학이 그나마 그를 살 만한 존재로 만들어준다.

미적 윤리학이 스타일에 국한된 건 아니다. 앞선 두편의 복수극과 달리 <친절한 금자씨>의 가장 큰 비밀이자 승부수인 마지막 3분의 1 대목에서 금자씨는 타인에게 진정한 친절을 베푼다. 생의 유일한 동력처럼 남았던 복수의 제의, 즉 백 선생 처단식을 남에게 선뜻 양보한다. 금자씨의 미적 윤리학이 말하는 최후 진술이자 바로크 비극의 교훈은 이렇게 수정된다. “너나 잘하세요. 좀 아름답게.”

그리고 폭력은 계속된다

아무리 미적 윤리학이라 해도 이것으로 <친절한 금자씨>를 충분히 만끽할 순 없다. 복수 삼부작은 폭력적이다. 그 이미지들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곳곳에 뿌려져 있다. <복수는…>에서 류(신하균)가 장기밀매업자의 경동맥을 찔러 분수처럼 피를 뿜어내게 하거나 복수한 신체를 씹어먹는 직접적인 이미지도 그렇거니와 죽음의 문턱에서 고통으로 헉헉거리는 류의 누나가 뱉어내는 신음을 정사의 교성으로 착각하는 청춘들을 보여주는 상황의 아이러니도 폭력적이다. <올드보이>에선 오대수의 몸 자체가 폭력의 포획물이다. 15년간 사적으로 감금당하고, 계획된 스케줄대로 정사를 나누며, 스스로 혀를 잘라낸다. 박찬욱 감독이 신체를 다루는 방식에서 ‘폭력의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이 떠오르는 건 이상하지 않다. “고통받는 모든 인간은 고기다. 고기는 인간과 동물의 공통영역이고 그 둘 사이를 구분할 수 없는 영역이다.”

<친절한 금자씨>는 화사하고 서정적이긴 하지만 폭력을 포기하진 않는다. 사실, 길고 긴 처단식이야말로 삼부작 중에서 가장 끔찍스런 기억으로 남을 만하다. 특히 그 가운데 제시되는 아이 처형 장면은 눈의 호흡을 멈추지 않고는 볼 수 없는 순간이다. 그토록 사랑스런 금자씨에게조차 복수가 당신을 구원하는 건 아니라고 모범답안을 제시하면서, 그 지극히 윤리적인 결론에 이르기까지 충격적이며 파괴적인 이미지를 나열해야만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냥 악취미?

극한의 폭력은 숭고의 미학

이런 모순의 순간들이 제조해내는 전율과 공포의 순간들은 숭고의 체험으로 이어질 만한 것들이다. 숭고는 “인간의 합리적 인식의 한계를 넘어선 것을 체험하는 불편한 쾌감”이거나 “파괴의 고통에 의해 감성이 극도로 예민하게 되고 초월적 희열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순간”에 일어난다. 순간 포착되는 폭력적인 이미지에서 이런 체험이 일어날 수도 있겠고, <친절한 금자씨>에서 유괴되고 살해당한 아이의 부모가 분노와 더불어 미묘한 욕망의 순간을 내보일 때 느끼게 되는 당혹감도 이런 종류의 것이라 할 만하다.

J. F. 리오타르는 숭고의 미학을 훌륭한 충격이라고 높이 평가한다. “예술은 아름답기만한 예술을 모방하는 것은 접어두고 숭고의 미학에 자극받아 강렬한 효과를 추구하고 놀랍고 비일상적이며 충격적인 결합을 시도할 수 있고 해야 한다. 그리고 일어나고 있다는 것,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어떤 것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 박탈이 지연되고 있다는 것은 훌륭한 충격이다.”

숭고의 미학은 질서와 합리라는 아폴로적 세계에 대항한다. <친절한 금자씨>의 서사와 캐릭터에서 모든 질서와 권력, 즉 기독교, 감옥, 경찰, 법 등이 조롱받는 대상이라는 걸 되새겨보면 숭고의 미학으로 박찬욱의 폭력을 이해하는 건 무리가 아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폭력적인 그림은 고전적인 미의 원칙에 입각해 아름답게 재현할 만한 원본은 없으며 그렇게 해봐야 당신에게 득될 게 하나도 없다는 강경한 발언이다(이렇게 놓고 보면 김기덕의 폭력과 박찬욱의 폭력은 통하는 데가 있다).

그런데 박찬욱의 숭고 미학이 체계적인지는 의문이다. <공동경비구역 JSA> 이래 그의 서사는 지극히 합리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캐릭터가 왜 여기서 이런 표정을 짓고 이런 짓을 하는지 그 원인과 결과를 완벽에 가깝게 설명할 준비가 그에겐 늘 되어 있다. 그의 머릿속에서 구상된 캐릭터와 사건사고는 잘 짜여진 거미줄을 따라 예의 그 바로크 비극을 완성한다. 이렇게 기승전결이 꽉 짜인 서사구조는 합리적이고 고전적인 미의 원칙과 부합한다. 여기서 좀 혼란스럽다.

그에게 미학의 혁명가가 돼라고 요구할 수는 없지만 그는 자꾸 뒤돌아보면서도 한 발짝 그 길로 나서고 있다. 자본의 수익률 싸움에 한쪽 목숨을 확실하게 내놓은 현재의 한국영화에서 그는 누구도 쉽게 하지못할 짓을 벌일 힘을 가졌고 그걸 사용한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씨의 온몸에 광채를 발하게 하는 동시에 그 뒤편에 금자씨의 첫 번째 동지가 살해한 기둥서방의 유령을 태연히 등장시키는가 하면, 비록 꿈이긴 하나 금자씨가 개의 몸을 한 백 선생을 눈 쌓인 절벽 위에서 사살하는 초현실주의적 회화를 그려내기도 한다. 이런 장면은 꽉 짜인 서사를 살짝 혼란스럽게 하거나 비용 때문이라도 쉽게 시도하기 힘든 흥미로운 이미지다. <친절한 금자씨>가 너무 친절하게 설명적이거나 윤리적이더라도 몹시 흔쾌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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