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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로 신이야, <와호장룡>의 주윤발
김현정 2000-01-25

지금 떠나는 곳에 죽음이 있으리라는 것을, 두 남자는 모두 안다. 그럼에도, 운명을 믿느냐고 묻는 친구에게 그는 “운명? 내가 바로 신이야”라고 답하며 앞서 떠난다. 오만하지 않으면서도 저항할 수 없을 것 같은 그 말에 미련 따윈 묻어나지 않는다. 어느 뒷골목에 버려져도, 햇빛도 닿지 않는 하수구 어딘가에 묻혀 버려도,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오직 친구를 위해 가망없는 싸움에 총을 들었던 이 남자는 속인들의 계산법을 무용하게 만든다. 이것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경계를 무너뜨리는 시대 불명의 신화, 오래 전 어디엔가쯤 있었을 법한 남자들의 이야기다. 말 그대로 <영웅본색>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윤발(44)을 설명하는 데 다른 수식어는 필요하지 않다. 그는 그저 ‘영웅’, 눈물 없이도 울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영웅이다. <영웅본색2>에서 죽음을 향해 가는 그의 발걸음은 영화에 여백 같은 순간을 부여하며, 죽음 직전 연인을 찾는 그의 손길은 누구보다 성실했던 경찰의 본분을 저버리도록 만든다(<첩혈쌍웅>). 눈물과 피와 땀의 자취가 배어 있는 주윤발은 ‘거지들의 왕’이다. 초라한 관을 썼으나 위엄있는, 세계의 중심처럼 군림하지만 누구도 지배하지 않는.

임영동의 <감옥풍운>은 주윤발의 그런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영화다. 모두가 똑같은 제복을 입었지만, 모두가 동등하지는 않은 감옥. 강자와 약자, 지배와 소외가 존재하는 그곳에서 주윤발은 동료를 보호하려다 린치를 당하고 독방에 갇힌다. 그는 항상 삶의 과정보다 죽음의 순간을 중시했으므로, 예정대로 복수와 징벌이 이어진다. 그러나 영화가 비극으로 치닫으려 할 때 주윤발은 예의 그 웃음으로 돌아온다. 한덩이 밥에 목숨걸어야 하는 죄수지만, 그는 혼자 살아남으려 버둥거리지 않는다. 또 그는 경제적인 연인이기도 하다. “어렸을 때 매우 가난했다. 지금은 유명한 배우가 되었지만, 아직도 내가 초라하다고 느낀다”는 고백처럼, 주윤발에게 턱시도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10년 전 선물했던 것과 같은 팔찌 하나로 떠났던 여자에게 다가서려 하는 사람이다(<우견아랑>). 인연을 약속하는 것도 자그마한 반지로 족하다(<화기소림>). 이런 남루함과 소박함, 그 사이의 여유는 절대성 위에 인간이므로 감수해야 하는 비애를 덧씌운다. 그렇게 서구에서 잊혀졌던 비극적인 영웅의 전설을 되살린 그는 타란티노를 비롯한 비디오광들의 우상이 되었다.

초대와도 같은 그들의 열광으로 주윤발은 이제 할리우드에 있다. “어린 시절 <대탈주> 같은 할리우드영화들을 좋아했”던 주윤발에게 이것은 꿈의 실현이다. 망설임도 있었다. “마흔의 나이에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할리우드는 주윤발을 원했고, 그것은 <리플레이스먼트 킬러> 같은 액션 영화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애나 앤 킹>에서 홍콩배우로는 처음으로 할리우드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었다. 율 브린너와 달리 아시아인이므로, 주윤발이 재현하는 몽쿠트 왕은 좀더 진중하고 지혜로우며 진정 왕다운 시야를 지닌 사람이다. 고집세고 완고한 애나도 때로 그의 무게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그러나 할리우드에서의 주윤발은 아직 어두운 영웅일 뿐이다. 그는 더이상 선과 악의 구획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신화가 아니지만, 어쩌면, 청나라 시대로 돌아간 리안의 신작 <와호장룡>에서 다른 모습을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두 여인의 인연에 관한 이 영화는 극단을 달리는 감정의 대립에 서 있으며, 그것은 주윤발이 할리우드의 이분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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