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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CAF2005 가이드 [4] - 공식경쟁단편+개막작
오정연 김도훈 2005-08-10

선풍기와 꽃이 사랑에 빠졌을 때?

<타락한 예술>

모두 18편의 작품이 상영되는 공식경쟁단편 일반부문에서는 낯익은 이름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얼마 전 한국에서 회고전이 열렸던 핀스크린 기법의 대가 자크 드루앵의 <흔적>, 앞에서 소개한 이고르 코발료프의 <밀크> 등은 단편애니메이션이 지닌 예술성을 또 다른 단계로 끌어올린 작품들. 하지만 관객에게 가장 반가운 것은 엽기적인 애니메이션 <난 이상한 사람과 결혼했다> <뮤턴트 에일리언>으로 유명한 빌 플림턴의 신작일 것이다. 선풍기와 꽃이 사랑에 빠진다는 당황스러운 내용의 <선풍기와 꽃 이야기>는 지독하게 간결하다. 색채는 실종되고 다만 하얀 도화지에 흑백 사인펜으로 주욱주욱 그어놓은 듯한 이미지들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선풍기와 꽃의 비극적인 로맨스가 아름답게 결실을 맺는 순간, 겨우 7분짜리 흑백애니메이션은 마술처럼 보는 이의 가슴을 울린다. <사이드 웨이>의 폴 지아메티가 친근한 목소리로 내레이션을 담당했다. 폴란드 출신 토멕 바진스키 감독의 <Fallen Art>는 병사들을 높은 곳에서 떨어뜨려 죽인 뒤, 다양한 사체들의 사진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즐기는 장군의 괴상한 취미를 묘사한 작품. 전체주의의 잔인한 속성을 낄낄거림을 멈출 수 없는 섬뜩한 풍자정신으로 그려냈다. 한국 단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한태호 감독의 <Africa a.F.r.I.c.A>다. 아프리카의 한 소녀가 난민배급소에서 받은 옥수수 수프를 슬픈눈을 가진 고래에게 나눠준 뒤, 고래등을 타고 날아올라 숲과 강으로 뒤덮인 아프리카의 이상을 본다는 내용. 기아로 허덕이는 아프리카의 현실에 대한 소묘인 동시에, 마술 같은 이미지로 검은 대륙의 슬픔을 위안하는 작품이다.

<선풍기와 꽃 이야기>

<Africa a.F.r.I.c.A>

학생부문에는 모두 28편이 출품되었다. 독립운동가 청년과 그를 돕다가 희생양이 된 기생의 이야기를 그리는 <초혼>은, 대중가요의 뮤직비디오에 나올 법한 이야기를 애잔한 정서까지 고스란히 전달하는 서정적 비주얼에 담아낸 작품이다. 프랑스에서 온 <음악이 준 변화>와 <트루 컬러>는 각각 초현실주의 미술을 연상시키는 폐허의 미래상과 획일화된 도시에 색채의 자유를 불어넣는 로봇을 통해 희망적인 미래상을 3D로 표현한 작품들. 이외에도 프랑스, 한국, 독일, 슬로베니아, 영국 등에서 찾아온 젊은 학생들의 싱싱한 단편들이 관객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애니메이션의 미래를 향한 새로운 재능들의 고사리 손짓을 건드릴 수 있는 드문 기회다.

개막작 <르나르 이야기>

친근한 이솝우화의 3D 변주

<르나르 이야기>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솝우화를 비롯한 유럽의 우화 속에서 여우는 약삭빠른 꾀돌이, 늑대는 응큼한 악당이었다. 프랑스의 중세우화를 원작으로 하는 <르나르 이야기>는 익숙한 전제를 따뜻한 첨단의 비주얼로 표현한 애니메이션. 좀도둑이긴 해도 아담한 가정의 듬직한 가장인 르나르는 먹을 것을 슬쩍하던 중 우연히, 불로장생의 약이 숨겨져 있는 곳을 가리키는 지도를 손에 넣게 된다. 지도를 이용해 왕권을 차지하려던 야비한 늑대 귀족 버나드는 르나르를 찾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한다. 2년 반에 걸쳐 80여명의 인원, 약 60억원의 제작비가 투여된 대작이지만, 위엄있는 사자왕, 하얀 눈에 묻힌 숲속 나라, 악당의 퇴장까지 잊지 않는 친근한 권선징악의 결말 등 그 구성요소는 지극히 고전적이고 가족적이다. 저녁마다 TV 앞에서 눈을 떼지 못했던 어른들에게 낯익은 2D애니메이션의 부드러운 질감, 섬세한 색채의 배경을 유려하게 표현한 3D애니메이션의 뛰어난 비주얼이 이루는 소박한 조화가 인상적이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슬랩스틱, <Kungfu Fighting>을 배경음악으로 연출된 마지막 군무 등에서는 주된 관객층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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