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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도 재밌게 읽을 수 있는 동화 8편 [1]
박혜명 사진 서지형(스틸기사) 2005-08-12

잃어버린 ‘마음의 눈’을 찾아서

신발이 가득 걸린 나무의 이야기를 엄마가 들려주자 아이가 물었다. “엄마, 나도 그 나무 보고 싶어요.” 어른이 되면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터무니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면 동화책을 읽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정확히 말하면, 읽고 나서 그 터무니없(다고 여겨지)는 얘기에 감동받고 그것을 곱씹어 간직하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최근 미하엘 엔데의 장편동화 <모모>가 TV드라마에 등장하면서 서점가 베스트셀러 1위 목록에 올랐다. 이런 계기라도 있지 않으면 어른이 돼서 동화책을 들춰볼 일이 또 있을까(물론 그림책을 즐겨보는 만 4∼10살의 자녀를 둔 부모들은 제외하고). 어른이 읽어도 좋을, 혹은 어른도 읽어야 하는 동화를 여덟권 모아보았다. 40쪽 안팎의 만 4∼6살용 그림책이 대부분이지만, 100여쪽짜리 초등학교 고학년 문고와 300쪽이 넘는 장편도 있다. 동물과 어린아이가 등장하는 단순하고 밝은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역사적 지식이나 문학작품에 대한 참조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희한한 동화책들도 있다. 아름다운 그림, 공인된 문학성, 깊이있는 시각을 고루 갖춘 동화책을 통해 잠시라도 잊고 지내던 동심을 돌이켜보시길.

나의 악몽이 누군가에겐 맛난 음식

<꿈을 먹는 요정>

<꿈을 먹는 요정>은 딸을 위해 먼 길을 떠나는 아버지의 이야기이자, 단꿈을 방해하는 악몽에 관한 이야기다. 숙면을 최상의 가치로 치는 ‘단잠나라’에서 단꿈공주는 악몽 때문에 잠자기를 거부한다. 심각한 국사(國事)를 해결해줄 사람을 나라 안에서 찾지 못하자, 왕은 몸소 먼 길을 떠난다. 춥고 어두운 땅을 걷던 왕은 메마른 금작화들 사이에서 서슬 퍼런 달빛의 요정을 만난다. 커다란 입에 가시가 돋친 머리에 주름살 많고 말버릇 고약한, 못난 악동 같은 요정은 “빨리 맛있는 악몽을 배불리 먹었으면 좋겠다!”며 왕을 닦달한다. <끝없는 이야기> <모모> 등 아이들을 위한 길고 긴 책을 써낸 미하엘 엔데는 아이들에게 꿈, 희망, 사랑, 용기만을 속삭이지 않고 어둠과 그림자, 절망과 죽음까지 말해온 작가다. 그의 또 다른 작품 <오필리아의 그림자 극장>은 주인없는 그림자들의 존재를 다루며, <보름달의 전설>은 허무한 세상을 등진 채 진리를 추구하던 은자(隱者)의 어리석은 교만을 전하는 동화다. <꿈을 먹는 요정>도 다르지 않다. ‘나에게 고통스런 악몽이 누군가의 맛난 음식’이라는 기괴하고 어두운 상상을 곱고 부드러운 그림체로 덮은, 무거운 동화책이다. 악몽 먹는 요정을 초대하는 주문도 왠지 외워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단꿈이 있는 한 악몽도 끝나지 않는 거라고 이 책이 당부하고 있으니까.

책 속에서/ “조금도 이상할 것 없어! 고슴도치가 뱀과 달팽이를 가장 잘 먹는다는 걸 몰라? 나도 말하자면 꿈을 먹는 고슴도치이기 때문에 악몽을 더 좋아하는 거야. 나는 처음부터 악몽을 먹고살게 만들어졌고, 또 그게 바로 내가 이 세상을 사는 이유야. 어때, 아주 간단하지?”

토끼 아저씨와 나눈 친밀한 대화

<토끼 아저씨와 멋진 생일 선물>

두 손바닥 합친 크기밖에 되지 않는 작은 동화책 <토끼 아저씨와 멋진 생일 선물>은 엄마의 생일 선물을 고민하는 여자아이와 그를 기꺼이 돕는 토끼 아저씨의 대화로만 이루어진 간결한 이야기책이다. 엄마가 좋아하는 색깔을 소녀가 말하면 토끼 아저씨는 그 색깔을 띤 물건들 중에 선물할 만한 것을 제안한다. 빨간 불자동차 혹은 빨간 지붕, 노란 유치원차 혹은 노란 버터, 초록색 에메랄드 혹은 초록색 애벌레. 아이는 맘에 드는 대목이 나올 때까지 나름 이유를 들어 제안에 반대한다. 스토리는 터무니없이 무료하지만, 작가가 써내려간 소박한 문장들은 읽을수록 입가를 맴돈다. 엄마가 속삭여주던 자장가의 가사처럼. 글을 쓴 샬롯 졸로토는 아동문학의 독자적 영역을 개척한 선구자로 인정받은 작가이며 1998년 자신의 이름을 딴 상이 제정되는 영예까지 누렸다. 달이 뜰 때까지 선물을 찾아다닌 두 존재 사이의 친밀감을 서정적으로 그려낸 삽화가는 모리스 센닥이다. 유대계 미국인 3세로 태어나 병약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아이들의 갈등과 고통을 이해하는 그림책들로 세계의 어린이문학상인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 미국도서관협회가 수여하는 로라 잉걸스 와일더 상, 미국의 대표적인 그림책 상인 칼데콧 상 등을 수상했다. 노랫말 같은 글과 수채화 엽서 같은 그림으로 만들어진 작은 동화책 <토끼 아저씨…>는 1963년 칼데콧 명예상 수상작품이다.

책 속에서/ “우리 엄마는 빨간색을 좋아하세요.” 아이가 말했어. “빨간색? 하지만 빨간색을 선물할 수는 없잖아.” 토끼 아저씨의 말. “그러니까 무언가 빨간 거요.” 아이의 말. “아, 무언가 빨간 거.” 토끼 아저씨가 말했어. “뭐가 빨갛지요?” 아이가 물었어. “가만, 빨간 속옷이 있군.”

너무나 귀여운 나의 동물 친구들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

영국의 고전동화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은 (수많은 명작 동화들의 시작이 그렇듯) 부모가 자식을 위해 지어낸 이야기에서 비롯됐다. 작가 케네스 그레이엄은 마흔살에 얻은 외아들 엘레스테어가 선천적으로 약한 시력을 잃어가는 걸 보며 숲속 동물들의 이야기를 꾸며 들려주기 시작했다. 제목부터 다정한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은 네 마리의 동물을 주인공으로 한다. 소심하지만 충성스러운 두더지 모울, 인내심 많고 너그러운 물쥐 래트, 호기심도 정도 많은 두꺼비 토드 그리고 지혜로운 오소리 아저씨 배저. 이들의 이야기는 어느 화창한 봄날, 대청소가 하기 싫어진 모울이 땅속 집을 뛰쳐나오면서 시작된다. 그레이엄의 이야기는 동물들의 숨찬 모험담보다 그들이 순간적으로 겪는 심정, 상황의 묘사에 더 힘을 기울인다. 집을 보여주기 부끄러워진 모울이 양 앞발로 얼굴을 가린다든지, 따뜻한 난롯가 앞에서 시를 쓰던 래트가 졸고 있다든지, 자동차에 반해 넋이 나간 토드가 친구들의 부축을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든지 하는 대목들에서 느껴지는 작가의 시선은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길처럼 섬세하고 부드럽다. <곰돌이 푸우>로 유명세를 얻은 삽화가 어니스트 하워드 셰퍼드는 그레이엄을 이렇게 회고했다.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지 물었더니 이러더군요. ‘나는 작품 속의 동물들을 사랑합니다. 그들을 친절히 대해주십시오.’”

책 속에서/ 래트는 날렵하게 노를 저어 강을 건너와서 배를 붙들어 맸다. 그리고 모울이 조심스럽게 배에 올라타려고 하자 앞발을 잡아주었다. “나한테 기대. 그리고 힘차게 발을 디뎌 봐!” 놀랍고 황홀하게도 모울은 진짜로 고물에 앉게 되었다. “여긴 날씨가 참 화창하구나! 난 태어나서 한번도 이걸 타본 적이 없어.”

일곱살부터 열세살까지 우린 무얼 보았을까

<북경 이야기1: 우리는 바다를 보러 간다> <북경 이야기2: 아버지의 꽃은 지고, 나는 이제 어린애가 아니다>

대만에서 활동하는 동화작가 린하이윈의 <북경 이야기>는 작가의 자전적 기억을 토대로 쓰여진 책이다. 린하이윈은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남베이징에서 보낸 중국인이다. 그때 모습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고향을 대한 뒤 (상처를 받아서) 작가는 어린 시절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 글을 썼다. <북경 이야기>는 총 5개의 에피소드를 두권의 책에 나눠 담고 있다. 애인에게 버림받고 아기마저 잃어 미친년이 되었다는 여자, 남동생의 학비를 대기 위해 도둑질을 했다는 아저씨, 젊고 예쁜 첩에게 마음을 두었다가 들키고 만 아버지, 제 아기는 젖동냥을 보내고 남의 집 유모로 들어온 아줌마, 그리고 전교 1등으로 졸업하는 모습을 아버지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열세살 소녀 잉쯔. 이 다섯명의 이야기를 한데 아우르는 시선은 일곱살 소녀 잉쯔다. <북경 이야기>는 일곱살이던 잉쯔가 열세살이 될 때까지 만나고 이별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모든 에피소드는 이별로 막을 내린다. 마지막 에피소드의 제목은 <아버지의 꽃이 떨어졌다>다. 린하이윈은 잉쯔의 6년 속에 1920∼30년대 베이징의 풍경을 (낙타의 방울소리까지) 세밀히 담아넣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림을 그린 관웨이싱도 중국 출신이다. 맑은 수채로 테두리 없이 완성된 그림은 볼로냐국제어린이도서전에서 2년 연속 일러스트상을 수상했다.

책 속에서/ 여름이 가고, 가을도 가고, 다시 겨울이 돌아왔다. 낙타도 다시 왔다. 하지만 한번 가버린 어린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겨울 햇살 아래서 낙타의 되새김질을 따라하던 바보 같은 짓은, 나 역시 다시는 하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