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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도 재밌게 읽을 수 있는 동화 8편 [2]
박혜명 사진 서지형(스틸기사) 2005-08-12

고릴라랑 고릴라 구경갈래?

<고릴라>

<고릴라>는 고릴라를 좋아하는 소녀 한나가 한밤중에 고릴라와 고릴라 구경을 떠나는 이야기다. 한나의 아빠는 너무 바빠서, 동물원에 같이 가주세요, 한번만, 하며 조르는 딸의 소원을 들어줄 수 없다. 생일 선물로 “고릴라 한 마리”를 말한 딸에게 팔뚝만한 작은 고릴라 인형을 선물해주고 만 아빠. 그날 밤 한나는 아빠만큼 커다란 진짜 고릴라 옆구리에 끼어 나무를 타고 동물원을 구경간다. <고릴라>의 세계는 고릴라에 푹 빠진 한나의 눈에 비친 세계다. 한나의 집에 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모나리자>의 얼굴이 고릴라이고, 한나가 보는 영화 속에서 슈퍼맨 복장을 입고 나는 것도 고릴라다. 한나의 집에서 내다보이는 숲도 고릴라 형상을 하고 있다. 이처럼 어른들도 웃게 만드는 재기발랄한 유머 감각으로 앤서니 브라운은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는 동화작가가 되었지만, 정작 그의 그림책이 감동적인 순간은 사실적인 그림체가 완벽한 구도 그리고 여백과 만났을 때다. 아빠를 조르는 한나의 조용한 뒷모습, 어두운 방구석에서 TV화면의 불빛에 둘러싸인 채 혼자 앉아 있는 한나의 작은 모습은 우리가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외로움의 기억을 깊이 들추어낸다. 이 정서적인 울림은, 부녀가 손을 잡고 동물원으로 향하는 마지막 페이지의 작은 뒷모습으로까지 길게 이어진다. 영국 작가 앤서니 브라운은 지난 2000년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을 수상했다.

책 속에서/ “한나야, 놀라지 마. 널 해치러 온 게 아니야. 동물원에 가고 싶지 않니?” 고릴라가 따뜻하게 웃었기 때문에 무섭지는 않았어. “나, 정말 동물원에 가고 싶어.” 한나와 고릴라는 살금살금 아래층으로 내려갔어. 한나는 자기 코트를 찾아 입었고, 고릴라는 아빠 코트를 입었지. “꼭 맞는데?” 고릴라가 속삭였어.

꿈을 향해 모험을 떠나 볼까

<발랄라이카를 연주하고 싶은 생쥐>

유럽 어느 마을의 작은 여관 겸 술집에서 태어난 생쥐 트루블로프는 음악을 사랑한다. <발랄라이카를 연주하고 싶은 생쥐>는 술집 전속 악단의 음악을 넋놓고 듣느라 잠잘 시간도 놓치는 그 생쥐가 발랄라이카(세모꼴 몸통에 줄이 3개 달린 우크라이나 민속 악기) 연주자가 되는 과정을 섬세한 눈길로 담은 동화책이다. 이름도 예술가스러운 트루블로프는 목수 일을 하는 할아버지로부터 작은 발랄라이카를 선물받았지만 연주 방법을 몰라 속상하다. 훌륭한 연주가가 되어 청중의 박수갈채를 받는 꿈을 밤마다 꾸던 트루블로프는, 추운 겨울날 떠돌이 집시 악단을 좇아 가출한다. 영국식 제도교육의 엄격함을 적응하지 못해 친구없는 학창 시절을 보냈던 존 버닝햄의 <발랄라이카…>는 작가가 생쥐의 키만큼 눈높이를 낮춰 그린 그림책 같다. 트루블로프는 집시 음악가의 손만큼 작지만 그 옆에 나란히 앉아 그와 똑같은 포즈로 연주 연습을 하고, 집에 돌아가서는 사람들이 머무는 술집에서 갈채를 받으며 발랄라이카를 연주하게 된다. 대안학교에서 미술을 배우기 시작한 버닝햄의 독특한 그림체는 이런 편견없는 눈길에 따뜻한 힘을 더한다. 불균일한 컬러링과 거친 스케치, 투박한 캐릭터 등 일러스트레이션이 갖춰야 할 강박적인 조건들 없이 완성된 그의 그림체를 평론가들은 ‘아이들의 순수한 무의식에 가장 가까운 표현’이라 평하기도 했다.

책 속에서/ 어느 날 저녁 집시 할아버지가 술집에 있는데, 구석에서 끼익 끽 괴상한 소리가 들려왔어요. “이리 와 보렴.” 집시 할아버지가 부르자, 트루블로프는 발랄라이카를 들고 머뭇머뭇 다가갔어요. “이런, 쯧쯧. 내가 가르쳐주고는 싶지만 오늘 밤에 떠나야 한단다.” 집시 할아버지의 말에 트루블로프는 몹시 실망했어요. 하지만 곧 좋은 생각이 떠올랐죠.

어린 시절 뛰놀던 고향 프라하

<세 개의 황금 열쇠>

한 남자가 열기구를 타고 날아가 텅 빈 듯한 도시에 다다른다. 자신의 고향집이 있는 곳 근처다. 그는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살려 집 앞까지 도착한다. 대문은 굳게 잠겨 있고, 세개의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 남자는 세개의 열쇠를 찾아 나서기로 한다. “매들린…” 하고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시작되는 동화책 <세 개의 황금 열쇠>는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망명한 작가 피터 시스가 어린 딸에게 자신의 고향 이야기를 남겨주고자 그리고 쓴 책이다. 어린 시절 들었던 프라하의 전설들을 하나씩 되새길 때마다 작가의 손에는 황금열쇠가 하나씩 쥐어지고, 열쇠를 찾아 누비는 골목마다 차오르는 것은 겨울낮 썰매를 끌거나 여름밤 늦도록 뛰놀던 아련한 추억들이다. 작가는 혼잣말을 하듯 짧은 글을 쓰고, 수만개의 섬세한 터치들로 고향 프라하를 그렸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도시 전체, 추억이 흐르는 작은 골목들, 어릴 때 즐겨찾던 도서관과 시계탑 안. 버드아이뷰숏과 익스트림롱숏, 클로즈업 등 동화책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다채로운 구도의 장면들이 영화적인 호흡을 따라 배치된 것도 인상적이다. 간절한 그리움 말고 이 책을 요약할 수 있는 구절은 달리 없는 듯하다. 세개의 열쇠를 손에 쥐고 집 앞에 당도한 남자. 문을 열면 무엇을 만나게 될까. 가장 소박하게 그려진 마지막 장면의 감동은, 아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책 속에서/ 달이 가고 해가 바뀌는 지난 세월 내내 나는, 돌 하나하나 목소리 하나하나를 기억하려 했다. 다시는 그것들을 예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만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이제 나를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우리는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당신의 상상력을 위한 지적 추리 게임

<마지막 휴양지>

화가가 직업인 화자는 어느 날 오후, 상상력을 잃어버린다. 절망에 잠긴 화가는 상상력을 되찾아오기 위해 무작정 차를 몰고 길을 나선다. 도착한 곳은 ‘어딘지아무도몰라’ 마을의 바닷가 끝 외딴 호텔. 하나둘씩 손님들이 찾아든다. 외다리 선장, 다리를 쓰지 못하는 소녀와 그의 수간호사, 모래밭에 비행기를 처박은 비행사 등등. (죄다 어디서 본 듯한) 투숙객들은, 마치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하나같이 말을 아끼고 남들의 시선을 피해 은밀한 행동을 한다. 통통한 형사는 “손님들 모두 혐의가 있다”며 그들이 감춘 비밀을 캐기 시작한다. <마지막 휴양지>는 아이들을 위한 책이 아니다. 일러스트레이터 로베르토 인노첸티가 “내가 상상력을 잃었다 되찾은 이야기”라며 구상해낸 초현실적인 스토리는 기존 문학작품들 속에 담긴 상상력에 대한 오마주이자, 책읽기를 즐겨온 어른들을 위한 지적인 추리 게임이다. 인노첸티의 사실적이고 탁한 그림체는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 테두리를 입힌 듯하며, 아이들보다 어른들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시인 겸 구성작가 존 패트릭 루이스는 낭만적인 문체 안에 풍부한 문학적 지식을 눌러 담았다. 여러 번 읽어야만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도록. 묘하고 비밀스러운 결말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휴양지>는 쉽게 짐작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이런 책이 대형서점 ‘어린이’ 코너에 꽂혀 있다니, 믿기 어렵다.

책 속에서/ 나는 추억의 조각들에 매달려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충분치 않았다. 친구여, 추억이란 낡은 모자일 뿐이다. 그러나 상상력은 새 신발이지. 새 신발을 잃어버렸다면 가서 찾아보는 수밖에 달리 무슨 수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