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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즐길거리 모듬 [1] - 남녀에 관한 책

섹스Sex - 남자와 여자를 탐구한 책 10권

여자와 남자를 주제로 하는 책들 대부분은 두껍다. 제대로 얘기하자면 끝이 없기 때문일까? 책 한두권 읽어 그 미묘한 속내와 복잡한 내력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이해의 실마리 정도는 얻을 수 있을 법하다. 나의 체험으로 보건대, 상대 성(性)이 아니라 자기 성에 관한 책을 읽는 게 더 흥미롭다. 모르던 나와 만나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알아두어야 할 여자의 몸

필자로서는 있다는 말만 듣고 아직 정확히 확인해보지는 못한 클리토리스는 8천개의 신경섬유 다발로, 쾌락을 돕는 일 외에 다른 목적을 갖고 있지 않다. 클리토리스가 팽창과 수축을 자주 할 수 있기 때문에 여성은 오르가슴을 여러 차례 느낄 수 있다. 프로이트는 클리토리스 오르가슴을 유아 오르가슴으로, 질 오르가슴을 성숙한 오르가슴으로 규정했지만, 나탈리 엔지어는 <여자, 그 내밀한 지리학>(문예출판사 펴냄)에서 그런 주장을 여성의 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단견으로 일축한다.

<팜므 파탈>/ 다빈치, <여자, 그 내밀한 지리학>/ 문예출판사

인류의 수명이 길어지고 지구를 지배할 수 있게 된 건 임신과 수유에서 해방된 연령 계층 여성들의 노동, 즉 폐경기 이후 여성들의 채집에 안정적으로 의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여성의 몸 구석구석을 탐험하며 작성한 몸의 인문 및 자연지리학이다. ‘여자의 몸으로, 아니면 여자의 몸을 가까이 두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 책을 읽어야 한다’는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평가는 정확하다.

팜므파탈은 여성 해방의 증거

치명적인 성적 매력으로 남성을 유혹하여 끝내는 파멸에 이르게 하는 여성. 세기말 예술가들은 이런 팜므파탈의 이미지를 즐겨 묘사했다. 헤롯의 마음을 사로잡은 살로메가 대표적이다. 살로메는 세례 요한의 목을 자르게 한 잔혹함으로도 유명하다. 많은 화가들이 세례 요한의 잘린 머리와 함께 고혹적인 자태의 살로메를 묘사했다.

이명옥은 <팜므 파탈>(다빈치 펴냄)에서, 19세기 말 여러 예술 장르에서 일어난 팜므파탈 유행 풍조에서 여성 해방의 징후를 발견한다. 성녀와 창녀의 대립구도에 젖어 있던 남성들이, 동등한 성의 자유를 주장하는 여성에게 두려움과 경계심을 느끼면서 동시에 매혹당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전통적인 성가치관이 무너지고 여성들이 자의식에 눈뜨던 시기 남성의 여성에 대한 욕망과 공포가 투영된 것이 팜므파탈이다.

인류를 지배해 온 섹스 & 섹슈얼리티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이브가 한 가장 위대한 일은 섹스를 통해 유전자 수준에서 일종의 불멸에 도달한 일이다. ‘진화로 본 휴먼 섹슈얼리티’라는 부제목에 맞게, <아담과 이브, 그 후>(들녘 펴냄)는 이렇게 시작된다. ‘사람들은 수없이 많은 시간을 섹스를 생각하며 보낸다. 섹스는 우리 실존의 동인이자 인간 존재의 중심이며 삶의 모든 걸음걸이의 보이지 않는 안내자다.’ 500쪽이 넘고 판형도 큰 책답게 다루는 주제도 성과 젠더, 사랑과 결혼, 섹스와 임신, 출산과 수유, 성장, 섹스의 문명화, 섹스와 권력, 섹스와 죽음 등 다채롭다.

<은밀한 몸: 여성의 몸, 수치의 역사>/ 한길사, <아담과 이브, 그 후: 진화로 본 휴먼 섹슈얼리티>/ 들녘

이 다채로운 주제를 다룬 뒤 21세기의 아담과 이브들에게 건네는 저자의 메시지는 평범하다면 평범하다.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게 하는 남녀의 차이를 축복하고 찬양하라.’ 그러나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진화생물학이라는 씨줄에 역사·문화·고고학·인류학·신학 등에 걸친 풍부한 날줄을 엮어놓은 ‘종횡무진성’에 있다. 틈날 때 아무 곳이나 펼쳐보기 좋은 섹슈얼리티 백과사전.

독일 역사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에 따르면 본능을 억제하고 수치심을 배우는 과정에서 인간은 문명을 얻었다. 중세 이전 인간은 별다른 수치심 없이 본능대로 살았지만, 그뒤의 서구인들은 본능에 대한 충동을 억제해왔고, 그게 문명화 과정이라는 것. 그러나 한스 페터 뒤르는 <은밀한 몸: 여성의 몸, 수치의 역사>(한길사 펴냄)에서 이렇게 말한다.

‘외음부를 추하게 여기느냐, 아름답고 매력적인 것으로 여기느냐에 관계없이 대부분의 민족과 사회에서는 여자의 성기를 부끄러워한다. 인간이 육체에 대해 느끼는 수치는 문명의 산물이 아니고 본능적인 현상이다.’ 아슬아슬한 차림새로 한여름 길거리를 활보하는 여성을 보고 ‘다 벗지 그러냐!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한심한 여성들’ 운운하며 혀를 차는 남성들. 원주민 여성들이 제대로 가리지 않아 야만스럽다고 개탄하는 서양 선교사들. 그런 21세기 도덕군자(?)들과 19세기 선교사들이 오버랩되는 건 왜일까?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제1의 성

미국의 인류학자 헬렌 피셔는 <제1의 성>(생각의 나무 펴냄)에서 앞으로 여성의 선천적인 재능이 세상을 주도하고 변화시키게 될 것으로 예측한다. 모든 태아는 기본적으로 여성으로 생성되고 남성호르몬이라는 화학물질의 간섭을 받지 않는 한 여성으로 태어난다. 여성이야말로 생물학적으로는 제1의 성이지만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남성이 제1의 성이다. 그러나 대략 1946년에서 64년 사이에 태어난 베이비 붐 세대 여성이 폐경기를 맞이하게 되면서 사회적으로도 여성이 제1의 성으로 떠오르고 있다. 남성은 한 가지 일에만 초점을 맞춰 단계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계단식 사고를 하는 데 비해 여성은 관련있는 다양한 요소들을 통합적으로 연결해 생각하는 거미집식 사고를 한다. 종합적 사고에 영향을 끼치는 뇌의 전두엽 앞쪽 피질의 한 부분이 남성보다 크기 때문이다.

<제1의 성>/ 생각의 나무, <남자-지구에서 가장 특이한 종족>/ 들녘, <자연의 유일한 실수 남자>/ 예지

<동물의 왕국>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많은 동물 집단에서 우두머리만 생식할 권한을 갖는다. 인간도 오래전에는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후궁을 두었던 왕들을 떠올려보라.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하는 수컷, 아니 남자들은 더욱 남성적으로 진화할 것을 강요받았다. 더구나 사내아이가 남자가 되려면, 자기 내부의 여성성을 억누르며 자신이 남자라는 걸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다. 남자들은 충분히 남성적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구심으로 고통받는다. 자아 신뢰감과 정체성이 불안한 남자라는 종족은 축구장과 술집과 정치판에서 남성 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이 분비된다는 걸 스스로 확인하고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건 아닐까? 디트리히 슈바니츠는 <남자: 지구에서 가장 특이한 종족>(들녘 펴냄)에서 여성들에게 이런 취약한 남성성, 아니 남자를 이해해줄 것을 요청한다.

한편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은 남자의 건강에 악영향을 끼친다. 면역계 세포는 테스토스테론에 노출되면 죽는다. 남자는 여자보다 항체를 만드는 능력이 떨어지고, 가난, 질병, 독신생활 등을 견뎌내는 능력도 떨어진다. 인간 정자는 수정란이 될 때까지 갖가지 물리화학적 시험을 거쳐야 하고, 수정란의 생사여탈권도 여성의 몸이 갖고 있다. 성을 남자로 결정하는 Y염색체는 태어날 때부터 불행이다.

그러나 사회 구조 속에서는 이런 생물학적 권력이 역전되어 나타났다. 남자는 좀더 강한 근육과 공격적인 성품을 통해 적극적으로 여성을 끌어들이는 전략을 구사해왔지만, ‘남자다움’이라는 것의 가치가 바닥을 향하고 있다. 복제양 돌리의 탄생은 종족 보존에서마저 남자가 불필요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스티븐 존스의 <자연의 유일한 실수 남자>(이충호 옮김, 예지 펴냄)에서 남자는 한없이 불쌍해진다.

소년이여, 아름다워져라!

‘완성도 높은’ 게 나온다면 아내에게 선물할 뜻도 있는데, 남성 연예인 누드집에 관한 소식은 들을 수 없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남성 누드는 신과 가장 닮은 모습으로 간주됐다. 육체를 죄악시하는 기독교 전통도 남성 누드를 몰아내지는 못했다. 19세기 부르주아지들의 취향 탓에 미술에서 남성 누드가 사라진 적이 있지만, 아방가르드 운동과 동성애 운동 등을 통해 남성 누드는 부활했고, 사진술의 발달은 남성의 몸을 바라보는 시선을 이상에서 현실로 내려놓았다.

<남자를 보는 시선의 역사>/ 개마고원, <보이-아름다운 소년>/ 새물결

점점 에로틱해지는 남성 누드가 ‘사회 자체가 남성 누드 이미지를 필요로 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라면, 남성들은 벗으면 지탄받는 남성과 벗으면 환영받는 남성으로 구분될지 모른다. 나에게 자꾸만 피트니스 센터에서 땀 흘릴 것을 권하는 아내의 관심은 남편의 건강에 있는 걸까? 아니면…. 에드워드 루시-스미스의 <남자를 보는 시선의 역사>(개마고원 펴냄)를 읽으면서 문득 스치는 의구심이다.

신라시대 화랑을 생각하면 오늘날의 꽃미남 연예인들이 떠오른다. ‘귀인의 자제로 아름다운 사람을 가려 뽑아 분 바르고 곱게 단장했다’니, 얼마나 아름다운 소년들이었을까? 고대 그리스 조각가들도 소년의 모습을 이상적인 것으로 묘사했으니, 당시에는 소년의 모습이 누구에게나 즐거움을 주는 미적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19세기 이전까지 소년의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일반적인 것이었지만, 20세기에 들어와 일종의 죄악으로 간주됐다.

20세기 후반부터 족쇄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여성의 욕구가 좀더 세련된 취향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까? 저메인 그리어는 <보이: 아름다운 소년>(새물결 펴냄)에서 대답의 단서로 소년을 제시한다. 바야흐로 Boys be beautiful의 시대가 올까? 허튼 생각 하나.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이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에 필적할 만한 ‘소년-성숙한 여인’ 관계를 그린 작품 어디 없나?

남자와 여자, 그 차이를 인정하라

지금까지 거론한 책들은 여자와 남자에 관해 작심하고 본격적으로 알아보려할 때 요긴하지만, 실용적 관심에 부응하는 책이 필요한 분들도 적지 않을 듯하다. 상대편 성(性)을 정탐하여 생활의 지혜로 삼고자 하는 분들에게 과학저널리스트 오오쓰키 히로요시가 쓴 <여우의 속셈과 늑대의 유혹이 만났을 때>(랜덤하우스중앙 펴냄)가 요긴하다.

<여우의 속셈과 늑대의 유혹이 만났을 때>/ 랜덤하우스중앙

백화점들이 남편들을 위한 휴게실을 따로 만들 정도로 남자들은 긴 시간의 쇼핑을 못 견뎌한다. 남자는 후손을 남기는 일에서 씨앗을 뿌리는 행위 외에 주체적으로 관여하는 게 없지만, 여자는 열달 가까운 임신 기간을 겪고 육아에도 오랜 기간 얽매인다. 그런 여자들은 후손을 생산하기 위해 파트너를 고르는 데 무척 신중하고 까다롭다. 쇼핑에서도 마찬가지. 어떻게든 후손을 많이 남기려는 남자와 어떻게든 좋은 것을 가려서 남기려는 여자 사이에 질투, 혼외정사, 맞바람 등 갖가지 문제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여성과 남성을 주제로 한 책들은 생물학, 예술, 역사학, 사회과학, 실용서 등 다양한 분야에서 꾸준히 나오고 있었지만, 최근 몇년 사이 출간 빈도가 늘었고 책의 질적 수준도 크게 높아졌다. 그중 읽을 만한 것들만 추려도 큰 책꽂이 하나쯤은 너끈히 채우고도 남는다. 2001년 여성부가 신설된 이후부터라고 하면 견강부회일까? 출판의 흐름은 사회·문화의 흐름과 의식 변화를 놀랍도록 정확하게 반영한다(2005년 여성가족부로 개칭됐는데, 영어 이름에는 여성이 나오지 않는다. 이름하여 ‘성 평등 및 가족부’(Ministry of Gender Equality and Fami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