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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적인 욕망의 아이콘, 하지원 [1]
김봉석(영화평론가) 사진 오계옥 2005-09-20

우리 시대 세속적이고 친근한 욕망의 아이콘, 하지원을 말한다

예쁘면 모든 것을 용서할 수도 있다. <연인>의 장쯔이처럼, 영화가 엉망진창으로 내달려도 한 여인에게매혹되어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다. 할리우드건 충무로건 ‘여신’에 해당하는 배우들은 늘 있었다. 아니 여배우라면, 우선 여신들을 떠올리게 마련이었다. 순수한 여신이건, 관능미의 여신이건, 상관없다. 단지 스크린에 얼굴이 비쳐지는 것만으로도, 여신들은 우리를 사로잡는다. 모두는 아니지만, 절대다수를.

탁월한 연기력의 여배우들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 역시 익숙한 일이다. 넋을 잃을 만큼 예쁘지는 않아도, 스크린 안의 그들을 보고 있으면 빨려들어간다. <오아사스>의 문소리가 그랬고, <인어공주>의 전도연이 그랬다. 완벽하게 캐릭터를 이해하고, 내면을 끌어내 보여주는 여인들. 새로운 역할을 맡을 때마다, 이번에는 그들이 누구로 변신했는지를 보고 싶었다. 그들이 새롭게 창조해낸, 우리 시대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배우란 무언가 남달라야 한다. 일상에선 평범해 보여도, 카메라 앞에만 서면, 무대에만 오르면 달라져야 한다. 타고난 것일 수도 있고, 갈고닦은 노력의 결과일 수도 있다. 대개는 그렇다. 재능이거나, 노력이거나. 아름답거나, 연기파거나.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이 흑과 백으로만 나뉘지 않듯이, 배우들도 다양한 갈래가 있다. 개와 고양이의 종만큼 다양한 배우들이 존재할 것이다. 아니 천변만화하는 배우들을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다.

그럼 하지원은 어떨까? 엄청난 미인도 아니고, 연기로 모든 것을 말하지도 않는다. 전형적인 청순가련형도 아니고, 단지 귀엽고 깜찍한 스타일만도 아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하지원은 스타가 되어 있었다. 공포영화인 <가위>와 <폰>, 섹스코미디 <색즉시공>, 드라마 <다모>와 <발리에서 생긴 일>의 히트 리스트도 예사롭지는 않다. 공포와 액션과 섹스. 보통의 여배우들이 꺼려할 만한 영화들에 출연하면서 하지원은 커리어를 쌓았고, 걸작 드라마에서 스타가 되었다. 분명 남다른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다모>와 <발리에서 생긴 일>의 열혈 팬으로서 하지원을 좋아했다. 다모 폐인과 발리 러버를 만들어낸 두편의 드라마는, 그 주인공인 하지원은, 우리 시대의 한 아이콘으로도 손색이 없었다. 그래서 한번 뜯어보고 싶었다. 하지원이란 배우가 어떻게 걸어왔는가를. 그래서 직접 만나 들어봤다. 몇 가지 궁금한 것들을.

<가위>

<학교2>

언제부터 나는 하지원이란 배우를 지켜보게 된 것일까? <다모>와 <발리에서 생긴 일> 이전까지는, 단지 <가위>와 <폰> 두편의 공포영화에 나왔기에 관심을 가진 정도였다. 하지원이 과연 호러 퀸이 될 수 있을까, 때문에. 그러나 돌이켜보면, 하지원의 행보는 약간 특이했다. 1999년의 데뷔작 <진실게임>은 듀스 출신 가수 김성제가 죽은 사건을 재구성한 영화였다. 영화가 묻힌 탓에, 신인인 하지원은 크게 주목을 끌지 못했다. <학교2>에도 나온 하지원은 2000년 들어 공포영화 <가위>에 출연했다. 귀신 역할이었다. 긴 머리의, 고개를 좀 숙인 하지원은 섬뜩했다. <가위>만이 아니라 조연으로 나온 <동감>에서도, 하지원의 이미지는 좀 어두웠다. 반항적이고 그늘진 이미지, 뭔가 감추어진 듯한 불길한 느낌. 악역을 연기한 2002년의 드라마 <비밀>에서도 비슷했다. 하지원의 첫인상에 대한 기억은, 개성은 있지만 크게 대중적인 인기를 끌기는 힘들다는 생각이었다.

<색즉시공>

2001년 왁스란 이름의 가수가 음반을 발표했다. 왁스가 하지원이고, 직접 노래를 불렀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원은 왁스의 노래 <오빠>에 맞춰 립싱크를 하고 춤을 췄다. 인터넷에서는 허리춤의 끈이 팬티 끈이냐, 아니냐로 시끄러웠다. 어쨌거나 이 퍼포먼스는 하지원이 섹시할 수도 있다는 걸 보여줬다. 2002년 <폰>이 개봉했다. 이번에는 귀신이 아니라, 한을 풀어주는 기자였다. 휴대폰의 귀신을 다룬 <폰>은 소재 면에서 신선했지만, 영화적인 면에서는 진부했다. 영화 속의 하지원도 어정쩡했다. <가위>의 불길한 이미지는 희석되었고, 강하고 집요한 기자를 연기하기엔 어딘가 어설펐다. 그런데 <색즉시공>이 나왔다. 팬티를 훔쳐보려는 남자에게 다리를 활짝 벌리는 당찬 여자이지만, 은효는 비련의 여주인공이기도 했다. 순수하고, 따스한 감정을 지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학생 같은 이미지였다. 하지원의 이미지는 어느 순간 밝아지고, 그녀가 흘리는 눈물에 관객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색즉시공>은 단지 시작이었을 뿐이다. 섹스코미디의 주요 관객인 남성들이 하지원의 새로운 면을 발견한 정도. <색즉시공>까지 하지원의 행보는, 어쩌면 좌충우돌일 수도 있다. 청춘드라마와 공포영화, 섹스코미디 그리고 가수의 립싱크. 별다른 공통점도, 목적의식도 없어 보인다. 그저 우연히 이런저런 영화들에 출연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 단지 그 목록이 특이하기는 했다.

그때만 해도 여배우들이 공포영화 안 하려고 했어요. 지금은 여배우가 공포영화 하나 해야 좋다는 말이 돌 정도로 좋은 이미지가 있지만. 그때도 다른 장르 하기에 힘들지 않냐,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었어요. 호러 이미지가 잘 어울렸대요. 어떻게 보면 하지원이란 배우를 알리는 데 호러가 가장 좋았던 것도 같아요. 감독님들이 <진실게임> 보고 저를 캐스팅하신 거거든요. 평범한 멜로나 평범한 드라마에 나왔었다면 저를 지금처럼 안 봐주셨을 것도 같아요. 그리고 <색즉시공>이라는 영화를 찍었어요. 그 영화가 저를 한번 변화시켜준 영화였던 것 같아요. 많은 관객이 봐주고, 상업적인 영화이기도 하고, 거기에서 약간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을 같이 갖고 가는 캐릭터라서… 어떻게 보면 그 영화가 저에게 도움이 된 것 같고요. 하지원한테 사람들이 이런 면도 있구나 본 것 같아요.

<다모>와 <발리에서 생긴 일>, 하지원을 만들다

그리고 <다모>와 <발리에서 생긴 일>이 있었다. 나는 최근 몇년간 나온 한국 드라마 중에서 <다모>와 <발리에서 생긴 일>이 정상에 놓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 드라마의 새로운 지평을 연 <다모>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발리에서 생긴 일>은 어떤가. 재벌가의 망나니와 성실하지만 가난한 남과 여. 그들의 삼각관계를 그린 <발리에서 생긴 일>은 언뜻 진부해 보이지만, 이 도발적인 드라마는 기존 멜로드라마의 공식들을 짓밟아버린다. 재민은 수정을 사랑하지만, 자기를 변화시킬 힘도 용기도 없다. 그저 어떻게든 수정을 곁에 잡아놓으려고만 할 뿐이다. 수정은 돈 때문에 재민의 곁으로 간다. 신파극의 전형 같은 이야기지만, <발리에서 생긴 일>은 인물들의 도발적인 언사와 행동으로 전형을 뛰어넘는다. 결코 변하지 않는, 망나니 건달인 재민을 수정은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시청자 역시 재민을 사랑하게 된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법칙이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특수한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 예술이다. <발리에서 생긴 일>은 한국 드라마가 안주하려는 공식들을 이용하면서도, 정답에 구애받지 않는다. 예술가인 척 자신을 과장하지 않고, 처절하면서도 냉담하게 그들을 모두 죽여버린다.

<다모>

<발리에서 생긴 일>

<다모>와 <발리에서 생긴 일>에는 모두 하지원이 출연했다. 내가 하지원을 좋아하게 된 것은, <다모>와 <발리에서 좋은 일>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두편의 드라마에, 나는 푹 빠져버렸다. 하지원이란 배우를 다시 만나고, 보았다. <다모>의 채옥은 양반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나, 역적으로 몰린 아비가 죽고 자신은 노비가 된 신분이다. 서자인 종사관을 사랑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아는지라 묵묵히 곁을 지킬 뿐이다. 무술을 배운 강인한 처자이지만, 눈물이 많고 한도 많은 여인이다. 채옥은 전통적인 청순가련형이 아니고, 그저 억세기만 한 여인도 아니다.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이겨내기 위하여 무술을 배웠지만, 결국은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련한 여인이다. 하지원은, 채옥을 통해서 다시 태어났다. <발리에서 생긴 일>의 이수정도, 채옥의 처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발리까지 가서 악착같이 모은 돈은 여행사 사장에게 떼이고, 서울에 와서는 오빠의 빚 때문에 술집에 끌려가기도 한다. 수정은 돈의 중요함을 안다. 돈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머리가 뛰어난 것도, 집안이 좋은 것도 아닌 수정은 오로지 몸으로 일한다. 단지 그것뿐이다. 억척스럽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때로는 고집스러울 정도로. 어느 것도 명확하게 선택하지 못한 채 수정은 망설이기만 한다. 이 세계의 수레바퀴는 너무나 튼튼하고 강해서,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사실 저는 그때까지 남자팬밖에 없었어요. 남자들은 귀신한테 묘한 매력을 느꼈는지 좋아했고. 그런데 안티가 처음부터 그냥 생겼어요. 안티가 같이 시작된 케이스였는데, <다모> 하면서 할머니, 아기엄마… 그때는 여성팬들이 다 뒤집어버렸어요. 당황할 정도로 여성팬들한테 사랑을 받았어요. 폐인분들 사랑이 장난이 아니잖아요. 몸으로 느낄 정도로 팬들이 너무 많아졌어요. 처음에는 정말 안티 너무 셌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여성팬들이 늘어나니까 좋더라고요.

<다모>

<발리에서 생긴 일>

채옥과 수정은, 강하지만 약한 여인이다. 활기차게 막 뛰어다니다가는, 제풀에 푹 꺾이며 무너질 것만 같은 여인이다. 그러나 어느 하나만 택해야 한다면, 그들은 강함을 택할 것이다. 그 무정한 운명만 아니었다면, 채옥과 수정은 꽤 굳건하게 살아갔을 것이다. 우리의 이웃처럼. 하지원은 채옥과 수정을 통해서 다시 태어났다. 하지원은 캐릭터를 자기 스타일로 변형시키는 배우가 아니다. 자신의 말처럼 늦게 익히고, 깊게 빨려드는 타입이다. 채옥과 수정을 통해서, 하지원은 자신의 배우로서의 이미지를 다시 만들었다. 하지원은 음습한 이미지에서,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연인으로 변신했다. 그렇지만 조금 복잡하다. 연인이지만 공주나 여신은 아니다. 친근하고 청순하다는 점에서 할리우드의 ‘next door girl’ 이미지와 비슷하지만, 섹시한 느낌도 있다. 그리고 약간 천박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건 귀여움으로도 치환된다. 하지원은 부정적인 이미지들도, 친근한 이미지로 바꿔버린다. 그건 캐릭터의 힘에서 연유한다. 하지원이란 배우가 원래부터 갖고 있던 것이 아니라, 채옥과 수정이란 캐릭터를 통해서 이끌어내진 것이다.

저는 연기할 때 상대 배우들을 많이 사랑해요. 저 같은 경우는 그냥 대본 읽었을 때하고, 그 공간에 가면 달라지고, 의상을 입고 상대 배우하고 같이 있으면 또 많이 달라지거든요. 상대 배우들하고 끝나고도 많이 보고 싶고. 어떻게 보면 제 안에서 느끼는 채옥이나 수정이를 많은 여성분들이 좋아했던 것처럼 제가 많이 좋아했던 것 같고, 많이 느낄 수 있는 캐릭터였던 것 같아요. 연기할 때도 계산보다는 그냥 와닿는 부분들이 많았어요. 대본 읽으면서 그냥 와닿고 가슴 아픈 것 있잖아요. 어떻게 보면 여자들은 만화책 보면서 상상을 많이 하거든요. 근데, 두 남자가 사랑해주죠. 그 안에서 갈등하는 거 너무 행복하잖아요. 가슴도 아프지만. 내가 좋아하는 장르이고, 좋아하는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누가 그러더라고요. 하지원씨는 둘이 너무 좋아하는 것보다 가슴 아파하는 것을 연기할 때 팬들이 많이 느낀대요. <다모>나 <발리에서 생긴 일>이 그랬잖아요. 제가 또 그런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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