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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부산국제영화제 미리보기 [2] - 작가 ①

거장의 숨결을 마셔라

Vision1: AUTEUR - 작가주의의 깊은 심연으로 향하는 잠수함이 부산항에 도착했다. 해구의 어둠이 두렵지 않은 시네필 다이버들이라면, 이제 은밀한 탐사에 동참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장한가 Everlasting Regret

■ 끝없는 후회를 슬픈 가곡처럼 회고하는 관금붕의 장한가

당나라 백거이의 장편 서사시 제목인 <장한가>는 1947년에서 1981년까지 격동의 상하이에서 살았던 한 여인의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이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아름다운 소녀 왕치아오는 우연한 기회에 사진사 장씨의 눈에 띄어 미스상하이선발대회에 나가 2등에 입상한다. 청초한 제비꽃처럼 수수하던 소녀는 자신의 성적 매력을 깨닫는 순간 장미로 화한다. 왕치아오에게 아름다움은 양면의 날. 남자들은 왕치아오의 곁에 끊임없이 다가와 한순간에 사라진다. 정부 관리는 브라질로, 거부의 아들은 미국으로 떠나고, 왕치아오의 단짝 친구 역시 변화하는 중국의 정세를 거부하며 홍콩으로 간다. 그러나 귀부인에서 홀어미로 전락한 왕치아오는 과거의 기억을 품은 상하이를 떠날 생각이 없다.

<쾌락과 타락>과 <란위>로 조금 더 현실적인 땅에 발을 붙이고 섰던 관금붕은, <장한가>를 통해 다시 <완령옥>과 <레드 로즈 화이트 로즈>의 세상, 사라지는 도시에 대한 기억들과 변화를 못내 아쉬워하는 회고의 정서로 귀환했다. 하지만 관금붕은 예전보다 좀더 냉담하다. 타고난 로맨티스트였던 그는 인물들의 비극적인 최후마저 몇줄의 자막으로 대신 알릴 뿐, 미술감독 장숙평이 그려낸 40년대 상하이의 고혹적인 붉은색마저 차갑게 서려 있다. <장한가>는 “역사가 어떤 방식으로 도시와 인간을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라는 관금붕의 말처럼, 인간의 이야기보다는 죽은 도시의 기억을 잠시 촛불처럼 되살려내는 데 집중하는 기나긴 노래처럼 들린다.

브로큰 플라워 Broken Flowers

■ 심드렁한데 무척 우아한 미니멀리즘

<브로큰 플라워>의 매력은 두개의 미니멀리즘에 있다. 첫 번째는 감독 짐 자무시가 지어놓은 형식적 미니멀리즘이고, 두 번째는 현존하는 위대한 무표정의 배우 빌 머레이의 얼굴이 지어내는 표정의 미니멀리즘이다. 여자친구에게 채여 낙담에 빠져 있는 던(빌 머레이)에게 한통의 편지가 날아든다. 누군지 모를, 그러나 과거의 연인인 것만은 분명한 어느 여인이 보낸 편지. 거기에는 당신에게 열아홉살짜리 아들이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던은 자신의 옛 연인들을 한꺼번에 떠올린다. 그러고나서는 인생의 전환점이 될지도 모른다는 친구의 조언을 따라 꽃 한 다발을 들고 그녀들과 미지의 아들을 찾아 나선다. 짐 자무시와 빌 머레이가 빚어내는 나긋한 호흡과 더불어 재치있는 대사들, 신선한 리듬을 만들어내는 음악의 선율 등이 흥미롭다. 숨어 있는 마지막 반전은 날카로운 삶의 유머이자 이 영화가 제기하는 질문이다. 2005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수상작.

더 차일드 The Child

■ 세상의 꼽추들을 뒤쫓는 다르덴 형제

다르덴 형제는 사람들의 나약한 모습과 그들의 굳건하지 못한 윤리적 판단을 소재로 삼지만, 언제나 종국에는 그들의 잘못까지도 감싸안으며 영화를 끝내는 감독들이다. 남의 물건을 훔쳐 팔아넘기며 희망없이 살아가는 소년 브루노는 별안간 아버지가 된다. 여자친구 소니아가 애를 낳은 것이다. 하지만, 브루노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브루노는 아이를 장물아비에게 팔아 넘긴다. 뒤늦게 소니아의 반대로 다시 아이를 찾아오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다. 사건을 이야기로 포장하는 대신 그 사건의 주변을 빙빙 겉도는 인물들의 방황으로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또 한번 펼쳐진다.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이 영화의 의미가 복수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2005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타임 투 리브 Time to Leave

■ 인적없는 바닷가처럼 서글픈 죽음의 초상화

젊고 잘생긴 사진작가 로맹은 암으로 석달밖에 살지 못할 거라는 선고를 받는다. 로맹은 그 사실을 숨긴 채 연인 샤샤와 여동생 소피를 매정한 태도로 떼어놓는다. “나처럼 죽어가고 있으니까”라는 마음으로 할머니에게만 자신의 시한부 운명을 알리는 로맹. 그는 아파트에 혼자 웅크린 채 죽음을 기다리며 남몰래 사랑하는 이들의 사진을 찍어둔다.

<8명의 여인들> <스위밍 풀> 등으로 국내에도 알려진 프랑수아 오종은 대담하고 냉소적인 이미지로 각인돼 있다. 그러나 <타임 투 리브>는 성숙해졌다는 평을 받았던 <사랑의 추억>과 비슷하고, 그 영화처럼 텅 빈 모래사장에서 끝을 맺기도 한다. 무엇보다 상실 혹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어찌할 수 없는 혼란과 평온이 뒤섞인 정조가 그러하다. 잠든 샤샤를 찍는 카메라의 렌즈, 공원 뒤에 숨어 소피와 그녀의 아이들을 찍기 위해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있는 실루엣, 창백한 미소가 때이른 죽음을 애도하는 영화.

섹스와 철학 Sex and Philosophy

■ 스톱워치로 사랑의 기적을 잰다고요?

뜻밖이다. 모흐센 마흐말바프가 남녀의 사랑에 관한 시(詩)를 보내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섹스와 철학>에는 무엇보다 기아와 죽음의 풍경이 없다. 비탄의 현실을 바라보는 것을 잠시 멈추고서, 감독은 한 중년 남자의 입을 빌려 사랑에 관한 독백들을 내놓는다.

댄스학교 교사인 죠언은 40번째 생일을 맞아 네명의 여자친구를 동시에 초대한다. 죠언은 자신만이 그의 사랑이라고 믿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은 네명의 여자친구들에게 “사랑이란 어차피 비극적 종말을 맞게 되는 법”이라며 갑자기 이별을 통보한다. 그리고는 앞으로 만나게 될 또 다른 사랑의 순간들을 재보라면서 스톱워치를 전해준다. 얼마 뒤, 죠언은 한 여자친구의 초대를 받아 그녀의 집을 방문하게 되는데, 그녀의 사랑이라고 믿었던 죠언은 그곳에서 자신이 그녀의 또 다른 사랑들 중 하나였음을 뒤늦게 알게 된다. 민속음악과 춤으로 몽환적인 리듬을 더해가는 영화는 현실과 과거의 경계를 수시로 허물어뜨리면서, 스톱워치를 멎게 만들 사랑의 기적은 현실에선 불가능한 것이라고 끊임없이 중얼거린다.

로프트 Loft

■ 구로사와 기요시의 기이한 로맨스

작가 사카이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마른기침과 진흙처럼 보이는 토사물에 시달리다 이사를 결심한다. 건강을 위해 편집장이 창고(Loft)로 쓰던 시골의 이층집으로 이사온 사카이. 그는 집 앞 창고에서 이상한 물건을 운반하는 고고학자 요시오카를 목격하고, 그가 운반하던 물건이 늪에서 발견된 수천년 된 여인의 미라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기이하게도 사카이는 요시오카에게 이끌리고, 이층집에는 여자의 원혼이 출몰하기 시작하며, 두 사람의 운명은 과거의 힘에 흔들리기 시작한다. <로프트>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이전 작들과 같으면서도 다른 영화다. 좀더 장르에 충실한 호러영화인 동시에, 주인공들을 음험한 사랑에 빠져들게 만드는 기이한 로맨스이기도 하다. 물론 “희망과 절망의 경계선을 담아내기를 노린다”는 구로사와의 말처럼, 장르영화의 틀을 무너뜨리고 또 다른 출구를 찾는 구로사와 세계의 풍광은 여전하다. 2004년 부산국제영화제 PPP 부산상 수상작.

버드나무 The Willow Tree

■ 시선은 결핍이요, 욕망이요, 무엇보다 악(惡)이라

시력을 되찾았으나, 이내 욕망에 눈먼 한 남자의 이야기.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요제프는 유년 시절 사고로 시력을 잃었다. 어머니와 아내의 헌신적인 도움없이 그는 하루도 살아갈 수가 없다. 그런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삼촌의 도움으로 프랑스에 가서 수술을 받게 된 것이다. 수술 끝에 그는 빛을 얻게 되지만, 평온한 암흑의 세계에선 생각지도 못했던 불행들이 뒤따른다. 볼 수 없으면 탐낼 수 없고, 탐내지 않으면 다툼도 없는 법. 점자로만 글을 읽었던 그는 눈을 뜬 순간 문맹이 된다. 눈앞에서 누군가가 남의 지갑을 훔치는 걸 보고서도 어찌할 수 없다. 자신을 따르던 미모의 여제자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면서 아내와의 싸움도 잦아지고, 결국 요제프의 혼란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광기로 변해간다. <천국의 아이들>에서 1등이 아니라 3등을 차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꼬마 알리를 기억하는가. 마지드 마지디는 자신의 윤리론 첫장에 “욕망은 독”이라는 금언을 새겨놓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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