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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Fan 대담1 - 한국의 단편영화감독 민동현 vs 트로마 프로덕션 대표 로이드 카우프먼
2001-07-27

엽기영화공장에서 온 지령, “세상을 엿먹여라”

로이드 카우프먼, 부천에 나타난 그는 마치 ‘약장수’ 같았다. ‘엽기, 섹시, 코믹, 호러’ 영화의 대명사, 트로마 프로덕션에 관한 자료가 담긴 커다란 노란 종이봉투와 이미 손잡이가 늘어날 대로 늘어난 하얀 비닐봉지를 가는 곳마다 들고 다니면서, 모든 대화를 “30년을 이어온 우리 트로마 프로덕션은…”으로 시작하는 그는, 마치 왕진가방을 들고 동분서주하며 모든 병을 ‘간염’이라고 진단하던 ‘간장선생’ 같기도 했다. 권위만을 내세우는 문턱높은 의사들과 달리 ‘돌팔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간염박멸’에 인생을 걸었던 아카키처럼, ‘3류’에 ‘저급하다’는 혹평을 달고 다니지만 섹스와 폭력에 피가 낭자한 영화에 30년을 바친 이 뉴욕의 ‘간장선생’은 1천편이 넘는 영화를 직접 제작, 혹은 감독하면서 터득한 자신만의 비법에 대해, 그 약의 효능과 가치에 대해 더없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하여 그 약효의 진위와 상관없이 그의 존재는 ‘약장수 비스니스’계에서 타의 모범이 될 만한 훌륭한 선례를 남기고 있었다. 한편 부천에 나타난 한국의 스물여섯살 앳된 감독은 마치 ‘앵벌이’ 같았다. 첫 번째 단편 <지우개 따먹기>를 세상에 내놓은 민동현 감독은 세계 각국의 크고 작은 영화제에 지우개뭉치를 싸들고 다니며 ‘이레이저 레슬링’(<지우개 따먹기>의 영어제목이기도 한)판을 벌이는 귀여운 홍보작전을 펼쳤고 올해 부천에서는 2번째 작품인 <외계의 19호 계획> 홍보를 위해 주인공인 드라큘라, 미라, 처녀귀신, 프랑켄슈타인 등의 얼굴이 찍힌 딱지를 극장과 영화제 곳곳을 찾아다니며 직접 관객에게 괴물탈을 쓰고 나눠주기도 했다.

동부이촌동 XX맨션 703호에 자리한(감독 집이다) ‘우하하 프로덕션’ 대표와 뉴욕의 타임스 스퀘어 서쪽 끝 헬스 키친에 자리한 ‘트로마 프로덕션’ 대표의 이날, 공식적인 만남은 각 과목 선생님이 그려진 지우개 한 세트와 <톡식 어벤저>의 오리지널 비디오가 교환되는 아름다운 선물증정식(?)을 거친 뒤 “세상을 엿먹여라!”(Fuck everybody!), “독립영화를 민중에게 돌려주라”(Give independent film back to the people) 같은 과격한 슬로건이 오가는 가운데 유쾌하게 진행되었다. 30년된 신념 가득 찬 ‘약장수’한테 꼬마 ‘앵벌이’가 듣는 인생의 지혜와 삶의 철학, 혹은 영화만들기의 비법은 그 어떤 영화아카데미강의보다 유익했고 실속있는 것이었다.

인디감독, 메이저보다 더 비니지스적이어야

민동현(이하 민) 트로마의 오랜 팬이었고 이번 영화제에서 만나게 되어 너무 영광입니다. 사실 영화제 게스트라운지에서 자주 봤는데, 모든 문제아들이 그렇듯, 영어공부를 열심히 안 해서 ‘헬로’ 이상을 못했네요.

로이드 카우프먼(이하 카우프먼) 나도 만나서 너무 반가워! 벽이란 벽마다 포스터를 붙이고 다니고, 탈 쓰고 홍보용 딱지 나눠주던 이가 바로 자네였군. 그리고 나도 한국어 못해서 정말 미안해.

민 처음 트로마 영화를 본 것이 군대 제대한 99년이었는데 <톡식 어벤저>(The Toxic Avenger)는 저에게 정말로 쇼킹한 영화였어요. 지금까지 한번도 본 적 없는 그런 영화적 충격이었죠.

카우프먼 우선 민 감독이 영화제 기간 동안 보여준 에너지에 경의를 표하고 싶어. 자네처럼 적극적으로 자신이 만든 영화를 프로모팅하는 것이야말로 독립영화정신에 입각한 훌륭한 자세라고 볼 수 있지. ‘독립’영화를 하겠다는 감독이라면 예술적 비전 못지않게 메이저 배급사보다 더 철저한 비즈니스 마인드가 필요하다고 봐. 왜냐하면 자신이 아니면 그 누구도 자신의 영화의 진가를 알아주지 않으니까. 트로마의 열혈팬이었던 <철남>의 쓰카모토 신야를 10년 전에 만났을 때, 당시 10대 소년이었던 그 친구도 자네처럼 열정적으로 자신이 하고 있는 작업에 대해 설명했어. 결국 지금은 잘 자라났고. 나는 민 감독이 그보다 훨씬 좋은 감독이 될 것 같아.

민 감사합니다(얼굴 빨개진다). 트로마 영화 중 몇개는 한국에서 비디오로 출시되었지만 실제 비디오가게에서는 찾기가 힘들었어요. 결국 구체적으로 접할 수 있게 된 건 인터넷 사이트 ‘Bad taste’를 통해서였는데 트로마 영화는 영화만들기란 작업에 있어 조금 무겁고 딱딱해져 있던 제 머리를 유연하게 만들어주었어요. 이번에 부천에서 상영된 제 두 번째 영화 <외계의 19호 계획>이 트로마의 영향을 받은 것을 부정할 수가 없네요.

카우프먼 그렇다면 여기(<톡식 어벤저> 오리지널 비디오를 민동현에게 선물하면서). 경찰에 들키지 않게 조심해! 이건 밀수용이야. (웃음)

민 와! 정말 감사합니다. 드디어 가위질 없는 오리지널 비디오를 보게 되었군요. 오늘 카우프먼을 <씨네21>에서 만나게 해준다고 해서 저도 질문을 준비했고 혼자만 만나는 것이 너무 미안해서 여러 팬들의 질문을 종합해서 왔어요.

“처음엔 ‘미조구치 겐지’가 점심메뉴인 줄 알았어”

민 예일대 다니던 시절엔 중국학을 전공한 걸로 아는데 어떻게 처음 영화에 빠져들게 되었는지 궁금하네요.

카우프먼처음 대학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나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스마일그림을 잘 그리는지 가르치는 착한 선생님이나 평범한 직장인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기숙사방이 너무 좁은 게 문제였지. 같이 살던 룸메이트가 지독한 영화광이었는데 밤마다 ‘고다르’ 냄새가 나는 발을 얼굴에 들이대고 자니, 어느 순간부터 나 역시 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아. 난 그전만 해도 ‘미조구치 겐지’가 무슨 점심메뉴이름인가 했다니까. 이후 <카이에 뒤 시네마>를 함께 읽으며 이제 더이상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미국 고전영화나 프랑스영화에 대해 알게 되었지.

민 트로마 프로덕션에 대한 궁금증이 많거든요. 제 경우엔 데뷔는 코닥 이스트만 필름 콘테스트에 나가서 상금을 받아 시작했고, 독립적으로 스폰서를 구하고, 어떤 부분은 ‘패밀리’ 자금을 얻어 영화를 찍고 있어요. 당신은 어떻게 첫 영화를 찍을 자금을 구하게 됐나요.

카우프먼 트로마 프로덕션을 예일대 후배인 마이클 허츠와 처음 만들던 시절의 에피소드들은 내 책 <나는 ‘톡식 어벤저’에서 영화제작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배웠다>에 자세히 써놓았어. 그 시작은 1974년이었고 수중엔 달랑 300달러밖에 없었어. 당연히 다른 직업을 가졌고 거기서 번돈으로 사무실 렌트비를 감당해야 했지. 그리고 친구 중에 치과의사가 있었는데 후원금을 좀 냈어. 만날 노인네들 냄새나는 입이나 들여봐야 되던 놈이 옷도 별로 안 걸친 ‘쭉쭉빵빵’한 여자들 나오는 영화라니까 재미있어 보였는지 돈을 내더군. 그리고 마누라 도움을 많이 받았어. 사실 30년 동안 한번도 이렇다 할 히트작을 못 냈지만, 이 전통은 내가 대표로 있는 한 계속 유지될 걸세. (웃음) 마누라 덕에 걱정 안 하고 ‘예술’할 수 있었던 거지. 우리는 할리우드 메이저영화제작비의 1%도 안 되는 적은 예산을 가지고 찍지만 대신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 영화찍기의 자유를 얻었어. 트로마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될 리 없기 때문에 실제로 <엽기영화공장>(Terror Firmer) 같은 경우 편집에만 1년을 쏟을 수 있었지. 달리 예술이 아니라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자유, 그게 곧 예술이었어. 참, 자네는 이번 영화 찍는 데 얼마나 들었나.

민 1200만원 정도요. 영화 속에 아이들용 노트가 잠시 나오는데 문구회사인 바른손에서 PPL로 300만원을 받았고, 콘테스트 나가서 상금을 타기도 했고요.

카우프먼 트로마라면 그 돈으로 몇편은 더 만들수 있을걸.

민 제가 너무 낭비했나 보군요. 죄송합니다. (웃음) 부인이 뉴욕필름커미션 위원장인 걸로 아는데, 사실 우리나라 개념으로 생각하면 ‘위원장’이라면 상당히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느낌인데 당신은 반대로 상당히 진보적이고 무정부적 색채가 강한 영화를 찍고 있잖아요. 혹시 ‘위원장 남편이 저러고 다닌다’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은 없나요.

카우프먼 물론 많지. 마누라 대신 그 자리에 앉고 싶어하는 사람이 나를 모함하는 글을 <뉴욕타임스>에 싣는 경우도 종종 있어. 하지만 필름커미션 자체가 그다지 보수적이거나 그렇진 않아. 자기 주(州)에서 영화를 찍도록 유치하는 정도지.

민 저는 지금 직원들에게 월급을 줄 수 없는 상황이에요. 사무실도 원래 제 방을 개조해서 쓰고 있고요. 평소 때는 다 아르바이트해서 돈벌다가 ‘영화 만들자!’하면 게릴라처럼, 빨치산처럼 모여 일을 시작해요. 카우프먼 우리도 직원들이나 배우에게 돈을 충분히 주지 못해. 하지만 그들 모두 트로마를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작업에 참여하는 편이야. 감독이나 촬영감독에게도 연출료나 촬영료를 주는 게 아니라 작품으로 수입이 생기면 보너스를 주는 식으로 하고 있지. 그런데 민 감독은 전혀 안 준단 말이지. 흠…, 자네에게 영향을 받아 다음번 프로젝트는 나도 따라해볼까? (웃음)

민 이제 트로마의 역사도 30년이 넘었고 고정팬들도 있으니 영화제작은 처음보다 더 수월해졌을 것 같아요.

카우프먼 그렇지가 못해. 만들기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 같아. 한국의 경우는 몰라도, 적어도 미국에서는 그래. 관련법이 독점기업들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디즈니, 소니 같은 대기업의 독점을 돕는 식으로 제정되기 때문에 독립영화프로덕션으로 살아간다는 게 갈수록 불가능해지는 거지.

민 우리나라도 갈수록 그렇게 되어가는 추세예요.

카우프먼 그래? 그렇다면 우리끼리 뭔가 해볼 수도 있겠군.

“고흐처럼 귀 자르고 그냥 죽을 순 없어”

카우프먼 아까 ‘Bad taste’라는 동호회를 통해 처음 트로마 영화를 접했다고 했나? 그들은 어떻게 트로마의 영화 테이프를 구했지.

민 한국의 유명 제작자들 중에도 그 사이트 회원들이 많아요. 특히 지난해 부천영화제 폐막작이었던 <가위>의 프로듀서 김익상씨가 ‘광팬’이죠. 그분에겐 트로마에 관련된 비디오는 없는 게 없을 정도예요. 요즘엔 DVD로 사서 본다고 하더라고요.

카우프먼 DVD 배달엔 문제가 없다고 하던가? 우송료가 너무 비싸진 않나.

민 저는 신용카드가 없어서 구입이나 우송에 대해선 잘 몰라요. 하지만 구입한 사람들은 한글자막은 아예 기대하지도 않고 영어자막조차 없어서 불편하다고 하더라고요.

카우프먼 글쎄, 누가 넣어준다면 모를까, 돈들여서 영어자막을 넣지는 못할 거야. 하지만 민 감독이 이메일을 보내주면 내가 공짜로 보내줄게. 신용카드 필요없이.

민 하… 너무 감사합니다. <엽기영화공장>에는 직접 출연까지 하셨는데 연기력도 만만치 않으십니다.

카우프먼 뭐, 배우를 쓸 형편이 못 되기도 하고 <엽기영화공장>은 트로마가 그동안 영화를 만들어왔던 풍경과 많은 부분 닮아 있는 영화이기 때문에 내가 출연하는 게 적합했어. 트로마의 열렬한 팬이자 <사우스파크>의 감독인 트레이 파커는 <엽기영화공장>에서 ‘자웅동체’ 인물로 출연해줬고 나는 그의 영화 <오르가즈모>(Orgazmo)에 비뇨기과 의사로 나오기도 했어. 이렇게 우린 서로가 서로의 영화에 아무런 대가없이 출연해주는 걸 좋아해. 만드는 작업 자체를 즐거움으로 여기기 때문에 가능한 일 아닐까.

민 방금 이야기한 트레이 파커처럼 <사우스파크>로 유명해지기 전에 만든 <카니발! 더 뮤직> 같은 영화를 배급하기도 하는 등 트로마는 당신이 직접 연출한 작품 외에도 젊은 감독들의 작품을 많이 만든 것으로 아는데 어떤 재능을 보고 감독을 선택하는 편인가요.

카우프먼 그전에 보지 못했던 독창성, 새로운 영화를 만들겠다는 마음, 스스로 대본을 쓸 수 있는 능력, 아! 그리고 자본을 소량이라도 댈 수 있는 사람. (웃음)

민 30년이란 긴 세월 동안 독립영화사로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트로마 프로덕션의 전략은 철저히 상업적인 것 같다, 라고 어떤 분이 물으셨어요. 물론 제 생각에 저예산영화는 찍을 땐 어떤 예술영화보다 예술적으로 찍고, 팔 때는 어떤 상업영화보다 상업적으로 팔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요….

(여기서 잠깐! 약간의 커뮤니케이션의 실수로 카우프먼은 “니네 너무 상업적이야”란 말로 이 질문을 오해했다.)

카우프먼 그래서 질문의 요지가 뭔가? (얼굴 약간 붉어짐) 그럼 우리가 영화를 만들어놓고 아무에게도 팔지 않고 우리끼리 모여서 보고 끝내야 한다는 건가? 반 고흐를 봐, 그는 평생 자신의 작품을 팔지도 자랑하지도 않더니 귀자르고 죽지 않았나? 하지만 살바도르 달리는 여기저기 자신의 작품을 프로모션하고 다녔고 부자로 늙어 죽었어. 후세에 예술적인 평가를 떠나서 골방에 처박혀 하는 예술이라면 나는 사양하겠네. (더욱 붉어짐) 영화를 보면서 ‘킬킬’댈 수 있는 자유, 자신만의 독특한 취향을 키워나갈 수 있는 자유, 독립영화를 비평가들의 손에 놀게 하지 말고 그걸 진정으로 원하는 민중에게 돌려줘야 한단 말이야. 그런데 그걸 공짜로 줘야 한단 말이야? (옆으로 돌아앉는다) 우리가 아무리 인터넷 사이트로 DVD를 팔아도, ‘톡시’ 반지를 팔아도, 메이저 베급사에서 요란 시끌벅적하게 TV광고를 틀어대는 것에 비하면 새발의 피야.

민 (식은땀을 닦으며) 음…, 사실 당신의 그런 모습을 보고 싶어서 한 질문이에요. 이 사람이 얼마나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확인하고 싶어서였달까? 감사합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화내주셔서.(웃음)

카우프먼 (다시 자세를 고쳐앉으며) 영화는 돈이 들어가는 작업이야. 우린 감독들 호주머니나 채우려고 영화를 만들진 않지만 다음 영화를 만들 돈이 분명히 필요하고, 철저한 마케팅 마인드야말로 트로마를 지탱해온 힘이야. 그렇게 번돈으로 우리는 자유를 얻는 거야.

민 물론 저는 지금 섹스도, 호러도, 피도 없는 ‘아동영화’를 만들고 있지만, 당신의 영화는 제 안에 숨어 있는 다른 요소를 깨워서 계속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힘을 주는 것 같아요.

카우프먼 <사우스 파크>의 트레이 파커도 자네와 똑같은 말을 했어. 그 역시 코미디와 섹스와 폭력이 난무하는 영화를 찍는 건 아니지만 트로마의 독립정신이랄까, 그런 것이 자신을 늘 일깨운다고….

“내 영화에서 스필버그는 문화적 파시즘의 상징”

민 <엽기영화공장>은 저예산영화를 만드는 촬영장의 풍경을 담고 있는데 실제로 머리깨지는 장면 찍을 때 수박에 가발 씌워서 찍고 그러나요.

카우프먼 95분짜리 보너스 다큐멘터리 트랙 <엽기영화공장> DVD를 보면 있는데 그 안에 우리가 어떤 식으로 영화를 찍는지 사실적으로 나와 있어. 조잡한 특수분장장면이며, 며칠 동안 내내 치즈샌드위치로 연명하기도 하고, 추운 데서 아무렇지도 않게 널브러져서 자기도 하고….

민 <엽기영화공장>에서 당신이 연기한 감독은 장님인데 그건 영화만들기에서 감독의 위치가 장님과 같다는 뜻인가요.

카우프먼 대중이 볼 때 내 영화가 쓰레기일 수도 있어. 하지만 그것이 예술이든 아니든, 가치있는 일이든 아니든간에 만드는 순간은 늘 최고라는 마음으로 만들거든. 장님이지. 객관적으로 볼 수가 없어. 또다른 의미라면 맹인 감독과 귀머거리 소녀를 함께 등장시켜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상황, 전체적으로 ‘감각의 박탈’을, 엘리트계급의 음모에 의해 ‘진짜’ 감각을 박탈당한 대중을 그리고 싶었어.

민 각 인물이 새뮤얼 풀러와 스티븐 스필버그를 상징한 것 같기도 하고요.

카우프먼 내 영화에서 스필버그는 하나의 심벌이야. 문화적 파시즘의 상징이지. 스필버그의 초기작 특히 <태양의 제국> 같은 작품은 지금 봐도 훌륭해. 하지만 그의 작품은 대부분 삼키기 편한 이유식 같아. 대중의 운동신경을 마비시키지.

민 그렇지만 내게 스필버그는 트로마 프로덕션만큼 큰 영향을 준 감독이에요. 를 보고 자란 제 작품에는 스필버그와 트로마의 영향이 골고루 들어 있고요.

카우프먼 당연해, 그 세대에는 당연한 거야. 물론 영화판에는 스필버그보다 더 한심한 작자들도 많아. 사실 주제를 전달할 때 어떤 부분은 과장할 때도 있어서, 그에겐 개인적으로 미안한 부분이 있어.

민 작품에 보면 레즈비언이나 자웅동체인간 같은 성적 소수자들이 등장하는데요.

카우프먼 트로마는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모든 이들에게 관심이 많아. 성적 소수자, 특히 아름답고 육감적인 레즈비언을 좋아하지. (웃음)

민 <톡식 어벤저>는 트로마 역사상 가장 성공한 시리즈인데요. <톡식 어벤저> 이전과 이후 달라진 게 있나요.

카우프먼 우리가 영화를 만들었던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섹스는 늘 진지하게 영화에서 다루어졌고 슬랩스틱에 섹스를 섞은 트로마의 에로코미디는 그 자체로 충격적이었어. 하지만 <톡식 어벤저>는 우리에게 좀더 확실한 노선을 제시해 주었지. 호러와 고어가 가미되었고 배우들이 캐릭터화했으며 ‘트로마스타일’의 성숙을 가져왔어. 로저 코먼이 내 책의 서문에 써준 대로 우리는 전통적인 장르를 코미디화하고 풍자하면서 일종의 ‘브랜드’로 자리잡게 되었지.

진짜 하고싶은 걸 해야 살아남지

민 왜 트로마 영화는 사람을 죽일 때 꼭 내장부터 꺼내나요.

카우프먼 그게 트로마 스타일이거든. 내장부터 꺼내고, 머리를 잡고 소리지르고, 녹을 땐 입에서 초록색 거품이 나오고…, 히히, 재미있잖아.

민 하지만 정작 ‘트로마스타일’에 대한 부담이 있을 것 같아요.

카우프먼 좋은 질문이야. 우린 철저히 후원자들과 팬들에 의해 존립가능한 영화사이기 때문에 그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어. 나도 가끔은 비극적인 운명이나 자살에 대한 영화를 찍고 싶을 때가 있는데 팬들을 생각하면 다시 ‘엽기호러섹시코미디’가 되어버리는 거야. 한번은 우리 마누라가 이런 말을 하더군. “여보, 당신에게 섹스, 폭력 같은 건 아기코끼리 덤보가 코에 끼고 있는 하얀 깃털 같아요. 사실 덤보는 그 깃털 없이는 날 수 있는 걸요. 당신도 마찬가지예요”라고.

민 트로마의 팬들도 그러나 좀더 색다른 것을 원하지 않을까요.

카우프먼 변화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어.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나름대로 확고한 신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야. 세월이 지나 돌이켜보면 타협하고 수정했던 순간은 늘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아. 1976년에 만든 <스퀴즈플레이>는 여자야구팀에 대한 영화였는데 그 당시에는 너무 ‘천박하고 쇼킹하다’고 했는데 15년 뒤에 <그들만의 리그> 같은 한심한 영화가 나와서 ‘새롭다’ 뭐 이러구 떠들더라구. <메리에겐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나 <미, 마이셀프 앤 아이린> 같은 영화도 마찬가지야. 우리가 몇십년동안 해온 것을 메이저영화사가 만든 것뿐이야. 하지만 더욱 화나는 건 그런 영화들이 트로마의 정신과 주제는 증발해버린, 단지 조크만 차용한 값비싼 카피라는 거야.

민 저 역시 ‘우하하필름’에서 만드는 영화는 확연히 달랐으면 좋겠어요. 물론 언젠가 장편영화를 찍을는 지도 모르지만, 다락방에서 꿈을 키웠던 어린 시절처럼 영화만들기의 순수한 마음을 유지하고 싶고요. 마지막으로 선배로서 자라나는 꿈나무인 저에게 해주실 조언이 있으신지요.

카우프먼 이 게임엔 어떤 법도 규칙도 없어. 각자가 알아서 새로운 방법을 찾아나갈 뿐이지. 꼭 독립영화를 고집할 필요도 없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것도 존 포드 같은 주류영화였거든. 하지만 명심하게. 세상에는 자네의 돈을 훔치고, 자네의 아이디어를 훔치고, 자네의 권리를 훔치려는 자들로 득실거린다는 걸세. 그 전장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매순간 자네가 진짜로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한다는 거야. 누구의 압력이나 누구의 힘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 진짜 ‘독립영화’ 말일세.

글 백은하 기자 lucie@hani.co.kr·사진 오계옥 기자 kla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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