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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적을 찬미하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박은영 2005-10-04

“몇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 니체의 이 말에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생은 끔찍하지 않다고 반박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생이 끔찍하다면 그것을 거듭 겪을 이유가 무엇이냐고 되묻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우리는 아직 생이 ‘어떠하다’고 단언할 만큼 생을 알지 못한다. 다만 세상이 달리 보이고, 인생이 달라지는 어떤 경험에 대해선 알고 있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은 바로 그 ‘사랑’의 기적을 찬미하는 이야기다. 천진하게, 그리고 간절하게.

멀티플렉스 재건축 압력을 받는 낡은 극장의 주인 곽 회장(주현)은 간이 커피숍을 운영하는 배우 지망생 오 여인(오미희)을 흠모한다. 극장을 찾은 외판원 창후(임창정)는 선애(서영희)와 살림을 차린 가난한 새신랑이다. 창후에게 카드 대금 독촉 전화를 걸어대는 성원(김수로)은 전직 농구선수로, 어린이돕기 성금을 모금하는 TV 프로에서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는 진아를 소개받는다. 진아의 친구인 지석에겐 상반되는 성격의 부모가 있다. 연예기획사 대표인 아버지 조사장(천호진)은 지나치게 냉정하고 엄격하며, 그런 그를 혼자 사랑하다 지쳐 떠난 아내 유정(엄정화)은 정신과 의사로 바쁘고 씩씩하게 살고 있다. 유정은 토론 프로그램 상대 패널로 만난 단순 무식 나형사(황정민)와 티격태격하는 와중에 남녀 관계로 발전하고 있다. 유정의 병동에 실려온 자살미수자 수경(윤진서)은 수녀 서원을 앞두고, 가수 정훈(정경호)을 사랑하게 됐는데, 마침 조사장에게 퇴출돼 자살 기도한 정훈과 한 병실을 쓰게 된다.

그래서 그들에게 일주일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까? 서로 사랑에 빠지고, 그래서 행복해지는 일만 남았으려니 싶었지만, 그렇지는 않다. 저마다 달콤한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그댈 만난 후로 난, 새 사람이 됐어요”라고 노래하던 그들. 예고편에서 이들 남녀가 입을 모아 부르던 화사한 연가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이라는 영화를 곧이 곧대로 ‘예고’한 것은 아니었다. 일곱쌍의 남녀가 일주일 동안 겪는 일곱 가지 이야기를 엮어낸 이 영화는 예고편처럼 마냥 밝고 달콤하지는 않다. 기둥 줄거리를 이끌어가는 나 형사와 유정의 이야기가 과격한 스크루볼코미디처럼 전개되고, 곽 회장과 오 여인의 귀여운 로맨스가 웃음을 자아내지만, 순박하고 가난한 부부 창후와 선애가 겪는 갈등이나, 예비 수녀 수경의 천진한 사랑을 지배하는 심상은 시나리오 표지에, 그리고 영화의 한 장면에 나오는 샤갈의 그림 <에펠탑의 신랑신부>에 더 가깝다. 아름답고,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이며, 어딘지 불안한 느낌을 주는.

흩어진 퍼즐 조각 모양으로 모든 인물들을 소개하는 인서트를 지나면, 인물들은 바통을 이어받듯 릴레이로 등장한다. 의미 없는 스침이었나 싶던 어떤 인연은, 조금씩 서로의 일상에 균열을 내고, 서로 역할을 바꾸기도 하는 아이러니를 빚는다. 자신을 괴롭히던 채권 추심원 성원이 술에 취해 선로로 떨어지는 것을 본 창후가 몸을 던지는 설정이나, “너로 인해 행복한 사람이 세상에 하나라도 있으면 살려준다”는 대사가 던져지는 또 다른 상황이 그렇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들은 복잡하고 아이러니컬한 관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천천히 세심하게 퍼즐의 조각들을 맞춰가던 손길이 점점 더 빠르고 격해지는 것은 그 때문. 모두가 고통과 슬픔과 절망에 빠진 어느 밤의 풍경은 <매그놀리아>를 닮아 있지만, 여기엔 ‘개구리 비’ 같은 경천동지할 이변은 없다. 정작 변화는, 밖이 아닌 안으로부터 일어나고, 그 변화가 아름다운 기적을 만든다.

이렇듯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은 판타지적 요소는 없지만, 일상의 판타지로 여겨지는 영화다. 극장/영화/TV를 매개로 만나고 스쳐가고 엮이는 이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허구’다. 이야기 자체에서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로 느껴질 법한 리얼리티가 전해지지는 않지만, 배우들의 성실한 연기와 앙상블은 영화에 생기를 더한다. 요즘 한창 물이 오른 황정민은 중년의 숫총각 형사로 분해, 자유분방한 엄정화의 유혹에 안절부절 못하는 ‘감정의 누드 연기’로 웃음을 선사하고, 그간 코믹한 이미지로 어필했던 김수로는 진지하면서도 진폭이 큰 연기를 선보인다. 다만, 서로 다른 성격과 밀도를 지닌 에피소드가 맞물리는 연결고리의 필연성이 약하다는 점이나, 종종 보는 이의 감정을 앞질러 치고나가는 음악의 쓰임새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를 공동으로 연출했던 민규동 감독은 단편 시절에나 첫 장편의 사례에서나 소수의 인물들이 한정된 공간에서 겪는 일들을 신선한 화법으로 사려 깊게 보여 주었더랬다. 그러던 그가 십수명의 인물이 거리에서 이합집산하는 설정에 매료돼, 이야기 전달과 인물 묘사에 의존한 이야기를 선보이려 했을 때는, 분명 ‘다른 영화’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을 터다. 물론 이번 영화에도 소녀의 열망과 불안을 담은 ‘소녀의 기도’ 에피소드나, 다름으로 인해 상처받은 중년남의 고독을 그린 ‘아메리칸 불독’ 에피소드에 자신의 인장을 남겨두었고, 이는 상대적으로 범상한 나머지 에피소드들과 겉도는 느낌을 주긴 해도, 전작들을 아꼈던 팬들에겐 반가운 선물이 될 수도 있다. 일곱쌍의 남녀, 열넷이나 되는 인물들이 종횡으로 엮인 이야기를 통해 한 사람의 인생 혹은 이 세상의 풍경을 보여주겠다던 그의 의도는, 어쨌든 무난한 앙상블 드라마로 드러났지만 전작들에서 그토록 형형하던 그만의 빛이 희미해졌다는 아쉬움은 지울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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