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오픈칼럼
[오픈칼럼] 악행의 자서전
이종도 2005-10-07

“나는 기자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 경박하고 수다스러우며 뻔뻔하기가 그지없다.” 쿤데라의 <농담>에서, 쿤데라의 분신으로 보이는 루드빅은 이렇게 말한다. 기자들에 대해 호의적인 소설이나 영화를 많이 접하지 못했다. <살인의 추억> 속 기자는 경찰 발표만 믿고 오보하고(오버하고!), <너는 내 운명> 속 기자는 선정성 기사로 불쌍한 황정민의 인생을 진창(진정!)으로 끌고 간다.

마감 뒤 간신히 몇 시간 눈을 붙이고 영화사로 시사를 보러 갔다. 영사실이 있는 줄 알았더니 비디오만 덜렁 있는 게 아닌가. 퀵으로 테이프를 보내주지 그랬느냐고 홍보사 직원에게 화를 냈다. 갑자기 예고도 없이 감독이 나타났다. 군말없이 비디오를 함께 봤다(출판사로 직접 오라고 한 다음 책을 쓴 작가 옆에 앉혀놓고 책을 읽게 한 뒤 서평을 써달라는 출판사도 있을까?). 전철을 타러 가는데 후회가 밀려들었다. 내가 도대체 뭔데 화를 냈을까. 이건 내 건방짐을 알려주려는 신의 계시일까(<펄프 픽션>의 새뮤얼 잭슨 어투로 읽어주셔야 한다. 존 트래볼타에게 자신이 킬러를 그만두는 이유를 설명하는 장면 참조).

너무 많은 특권 속에 살다보니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 착각하며 살았던 것 같다. 대스타와 명감독에게 직접 전화를 넣을 수도 있고(대개는 받지 않지만), 칸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감독이라 하더라도 마음껏 씹을 수가 있으며(대개는 무시하지만), 외국에 나가 칙사 대접을 받으며 시사회를 볼 수도, 니콜 키드먼과 인터뷰를 할 수도 있다(그들은 기억도 못하지만). 대단한 특권의 리스트다.

그에 비해 의무조항 리스트는 단 두줄에 불과하다. 선정적인 보도로 생사람을 잡아도 책임을 지지 않으며, 누군가 평생을 걸고 만든 영화를 무성의하게 잘근잘근 씹어도 별탈이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내게 그런 특권을 준 걸까. 사실 입사 시험에 통과했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게 없다. 내가 영화를 알면 얼마나 알겠으며 현장에서 입에 단내 풍기며 스탭으로 일해본 적도 없거니와, 시나리오 쓰는 산고는커녕 투자자에게 읍소하며 돌아다니는 고생과도 거리가 멀다.

뜬금없이 <올드보이>의 오대수처럼 참회록을 쓰는 까닭은 내가 부지불식간에 많은 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을까 뜨끔해서 그렇다(고는 하지만 내 죄의식을 덜기 위해서 그러는 거겠지). ‘기사 한줄에 목숨을 걸고 써왔다고 자부합니다’ 따위의 변명을 하기엔 많이 켕긴다. 영화사 관계자 가운데 내 오만방자함에 치를 떨었을 분이 적어도 한 다스는 계실 것 같다(아, 더 넘친다굽쇼?). 으스스하다. <친절한 금자씨>를 다시 찍어본다. 영화사 봄의 이모 이사(스포일러 쓴 죄), 나우필름의 최모 대리(잘못하고서 뻗댄 죄), 영화인의 최모 대리(권위적으로 군 죄), 올댓시네마의 양모 대리(이름 제대로 외우지 않은 죄), 그리고 박모 감독과 장모 제작자(질투와 비평적 시각을 혼동한 죄)를 비롯한 많은 분들이 내 죄를 열거하며 침대에 나를 손수 묶어주신다. 물론 가위며 칼이며 해머를 잊지 않고 챙겨오셨다. 그리고 조용히 주사기 바늘을 톡톡 손으로 치면서 내게로 오는 분이 있다. ‘그걸 기사라고 썼니?’ 음, 독자다. 아유, 무슨 변명을요, 유죄입니다, 라고 말씀드릴밖에(사실, 아까 그 기자의 의무조항에 작게 쓰여 보이지는 않았지만 ‘후진 기사를 쓰거나 건방진 태도를 보였을 경우 이런 벌을 받을 수 있다’라고 적혀 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