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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기자클럽] 찍는 그림과 그린 그림 사이 (+불어 원문)

영화와 회화의 근원적 관계는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안달루시아의 개>

새 건물로 자리를 옮긴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예술이 영화에 접목되는 관계를 보여줄 목적으로 전시 공간을 마련했다. ‘르누아르/르누아르’라는 제목의 첫 전시는 아버지(오귀스트 르누아르)의 화폭과 아들(장 르누아르)의 영화를 조망한다. 오귀스트의 회화 옆에서 영사기가 장의 영화에서 발췌한 장면들을 비춘다. 아빠는 그네를 그렸고 아들은 그네를 촬영했다. 아빠는 배를 그렸고 아들은 배를 찍었다…. 이 매력적인 주제는 약간은 무의미한 테마의 전시 방법 때문에 빛을 잃는다.

회화와 영화에 관한 담론은 취급하기 매우 미묘한 문제다. 비평가들은 여러 가지 다른 좋지 않은 이유로 이 문제에 사로잡히게 된다. 첫째는 영화가 다른 예술에 맞서 고급 예술의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다는 이유에서 비롯된다. 아직 대중적인 유희 정도에 머무르는 것으로 취급되는 것이다. 회화를 스스로의 근거로 삼음으로써 영화가 예술 목록에서 자리를 차지하는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화두는 회의적인 시기가 있을 때마다 정기적으로 부상된다. 80년대 말, 프랑스영화 마니아들은 카리스마적인 비평가 세르주 다네와 침울한 감독 빔 벤더스가 주장한 ‘영화의 죽음’에 대한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두 뛰어난 저서가- 하나는 자크 오몽이 쓰고 하나는 파스칼 보니체가 쓴 것으로- 영화와 회화의 상호 영향을 재고하였다. 거기에 나타난 내용은 영화가 가장 오래된 예술의 길을 잇따른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다. 위기도 겪고, 변화의 시기도 맞고…. 회화와 마찬가지로 영화는 죽지 않고 다만 변형될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실수가 저질러지는 것은 영화가 회화의 뒤를 따른다거나 존재하기 위해 그것에 기대야 한다는 생각에서부터 비롯된다. 두명의 비평가가 이 문제를 좀더 뛰어난 방법으로 다루고 있는 것 같다. 첫 번째는 아도 키루. 1952년에 쓰여진 그의 대표작 <영화에서의 초현실주의>가 최근 다시 출간되었다. 키루는 저서에서 초현실주의 화가들을 감독들과 비교하지 않고 초현실주의에 있어서 영화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안달루시아의 개>에서 면도날로 눈을 가르는 이미지는 다른 어떤 예술에서도 볼 수 없는 시각적으로 강렬한 힘에 도달했다. 이 이미지는 회화가 가져다주지 못하는 격렬한 바람을 초현실주의 운동에 불어넣었다. 미국 비평가 매니 파버의 행보 역시 좋은 예가 될 만한 것이 그 자신이 화가가 됐기 때문이다. 파버는 영화가 ‘예술’을 근거로 영화를 죽이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일반적으로 가장 뛰어난 영화는 겉으로 보기에 모든 형태의 문화적 야망을 버린 작가들의 작품에서 나타난다.” 그래서 그는 당연히 회화를 모방하려고 애쓰는 작품들을 싫어했다.

반면, 그는 장르영화(특히 액션영화)로 종종 독창적 조형미를 만들어냈다. 고다르의 영화에서 발췌한 장면과 페이 더너웨이를 비교한 당혹스러운 편집과 논평을 들어보자. “<경멸>에서 그리스 조각상이 짙푸른 하늘 한 모퉁이로 천천히 움직일 때, 그 얼개는 1920년대 댈러스 어느 거리의 고독 앞에서 압도적 형태로 드러나는 페이 더너웨이의 매끈한 몸과 걸음걸이의 은근한 에로티즘과 유사하다. 이 두 경우에서 일종의 거친 구성은 부분부분마다 여러 색이 어우러지고, 노래하는 듯한 충격을 만들어낸다.” 이 두 장면을 나란히 보여주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파버는 텍스트에서 그것을 팔레트 위의 다양한 색깔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섞고, 이 결합으로 상상적 영화의 회화를 창조한다. 회화와 영화를 묶는 근원적 관계를 밝히기 위해선 이처럼 어떤 텍스트의 개입이 필요하다. 글쓰기만이 유일하게 두개의 이미지를 나란히 놓음으로써가 아니라 서로를 녹여서 섞음으로써 존재하게 만들 수 있다. 오로지 단어만이 영화가 전적으로 회화를 보듬어안을 수 있게 한다.

Peinture et cinema

Dans son nouveau batiment, la Cinematheque Francaise propose un espace d’expositions temporaires, destine a explorer les relations qui unissent l’art au cinema. La premiere, qui s’intitule ≪ Renoir/Renoir ≫, met en perspective les toiles du pere et les films du fils. A cote des peintures d’Auguste, des projecteurs diffusent des extraits de films de Jean : papa peint des balancoires, le fiston filme des balancoires. Papa peint des bateaux, fiston filme des bateaux… Ce sujet passionnant echoue dans un montage thematique un peu vain.

Le discours sur la peinture et le cinema est tres delicat a manier. Il hante la critique pour differentes mauvaises raisons. La premiere vient du fait que le cinema n’a pas gagne ses lettres de noblesse face aux autres arts. Il souffre encore de rester une distraction populaire. En se referant a la peinture, il croit gagner la legitimite de figurer sur la liste des Grands Arts. Le sujet ressurgit regulierement aussi en periode de doute. A la fin des annees 80, la cinephilie francaise cherche a echapper a ≪ la mort du cinema ≫ professee par un critique charismatique, Serge Daney, et un cineaste melancolique, Wim Wenders. Deux livres brillants, l’un signe par Jacques Aumont et l’autre par Pascal Bonitzer, revisitent alors l’influence reciproque de le la peinture et du cinema. La reference rassure : le cinema suit le parcours d’arts plus anciens. Il connait des crises, des periodes de mutations… Comme la peinture, il n’en meurt pas mais en sort transforme.

L’erreur consiste a supposer que le cinema succede a la peinture ou s’appuie sur elle pour exister. Deux critiques me semblent prendre le probleme par un meilleur chemin. Ado Kyrou, tout d’abord. On vient de reediter son livre majeur ≪ Le surrealisme au cinema ≫ ecrit en 1952. Kyrou n’y compare pas les peintres surrealistes aux cineastes mais souligne le role capital qu’a joue le cinema dans le surrealisme. L’image de l’œil tranche au rasoir du ≪ Chien Andalou ≫ atteint une puissance visuelle sans equivalent dans aucun autre art. Elle insuffle au mouvement surrealiste un vent violent que la peinture ne pouvait apporter. Le trajet du critique americain Many Farber est aussi exemplaire puisqu’il est lui-meme devenu peintre. Farber etait persuade que la reference a l’Art tuait le cinema : ≪ Le meilleur cinema apparait generalement chez des createurs apparemment depourvus de toute ambition hautement culturelle. ≫ Il detestait donc logiquement les films qui tachaient d’imiter la peinture. En revanche, le cinema de genre (le film d’action surtout) atteint parfois pour lui une beaute plastique originale. Ecoutez-le effectuer un montage stupefiant entre un extrait de Godard et une apparition de Faye Dunaway : ≪ Quand l’austerite d’une statue grecque se deplace lentement devant un pan de ciel bleu matraqueur (Le Mepris), la syntaxe est similaire a l’erotisme plat de la demarche et du corps soyeux de Faye Dunaway que l’on decouvre comme une forme all over devant la solitude d’une rue de Dallas dans les annees vingt. Dans les deux cas une sorte de composition primitive, bloc sur bloc, est mise en œuvre pour un impact chantant, coloriste. ≫ Projeter ces deux extraits cote a cote n’aurait aucun sens. Mais dans son texte Farber les melange facilement, comme des couleurs sur une palette et cette association cree une peinture de cinema imaginaire. Pour mettre a jour le lien profond qui unie peinture et cinema il faut ainsi l’intervention d’un texte. Seul l’ecrit peut faire exister deux images non pas l’une a cote de l’autre, mais fondus l’une dans l’autre. Il n’y a que par les mots que le cinema peut pleinement embrasser la pein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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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진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