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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깨에 내려앉을 별은
2001-08-02

쾌락의 급소 찾기 36탄 - 가장 고대하던 구원의 여신은?

‘백마 탄 남자’는 여자의 환상이며, 여성만화의 영원한 테마이다. 그녀의 보잘것없는 현실은 오직 한 남자를 기다리는 꿈으로 유지된다. 준수한 외모에 튼튼한 몸 정도는 기본,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사줄 수 있는 확실한 경제력에, 무엇보다 자신을 평생 지켜주겠다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남자가 언젠가 나타나리라. “멍청한 여자, 그러니까 평생 남자에게 눌려 살지.” 그런데 이렇게 소녀들에게 핀잔을 주던 소년들도 이제는 함부로 어깨를 으쓱거리지 못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자신의 인생을 뒤바꾸어줄 여신을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내세울 것 없는 공대생 케이이치. 어느날 기숙사에서 전화를 돌리다 번호를 잘못 눌러 ‘여신님 도움센터’에 전화를 걸게 된다. 그리고 나타난 여신 중의 여신, 베르단디. “당신의 소원을 한 가지 들어드릴게요.” 케이이치, 멍청한 건지 똑똑한 건지 얼떨결에 말한다. “당신 같은 여신이 언제나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로 인해 기숙사에서 쫓겨나고 대책없는 사건들에 두들겨맞지만, 그래도 행운의 여신을 만난 그의 삶은 축복으로 가득 찬다. <오! 나의 여신님> 왜 저에게는 찾아오지 않으시나요?

오늘날의 남자들은 충분히 나약하다. 그들은 영웅이 되기 위해 ‘지옥 훈련’을 감행할 용기도 없고, 쓸데없는 폼을 잡으려다가 짧은 삶을 마감하고 싶지도 않다. 그저 가늘지만 길고도 길게 살고 싶다. 가당찮은 엄포로 상대를 제압하는 건 네트워크게임이면 족하다. 안 되겠다 싶으면 욕이나 퍼부어주고 도망나오면 되니까. 그래도 가슴속에 간직한 일말의 희망은 여자. 포르노비디오와 삼류소설로 뒤덮인 골방에서 그들만의 여신님을 기다린다. 아름다운 얼굴과 몸매, 순수한 마음씨, 자신의 재능을 칭찬하고 끊임없이 용기를 북돋워주는 존재. 비록 실패하더라도 항상 따뜻한 가슴으로 안아주는 여자. ‘용감한 자만이 미인을 얻는다’고 했던가? 천만에, 여신만이 나를 용자로 만들 수 있다. 여신이라는 확실한 카드가 생기기 전에는 절대 움직이지 않으리.

<오! 나의 여신님>의 베르단디와 친구들은 최상급의 공인 여신들. 그러나 다른 만화 속에서도 여신의 피를 이어받은 매력 만점의 여자들이 있다. 우리 모두 여신 센터를 방문해 마음에 드는 여신을 골라보자.

여신님, 바쁜 여신님

<비디오 걸>의 ‘아이’는 아마도 초중학생 남자아이들이 가장 선망할 만한 여신 후보. <비디오 걸>의 주인공 요타는 작은 키에 쑥맥인 소년, 언젠가 멋진 연애를 해보고도 싶지만 나약한 그의 성격으로는 평생 실연소년으로 지낼 게 뻔할 뻔 자. 오늘도 실연의 상처를 안고 길을 가는데, 수상쩍은 렌털 비디오숍이 하나 나타난다. 엉큼스레 성인용 비디오에서 골라낸 그녀. 비디오 화면 속에서 예쁜 미소로 “내 나름대로 열심히 위로해줄게요”라고 하더니, 이럴 수가 비디오 밖으로 튀어나와버린다. 그리고 그녀는 소년과 함께 살며 그의 사랑이 결실을 맺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준다. 일이 잘 안 풀리면, 말했던 대로 ‘나름의’ 육탄 서비스도 제공해주면서.

여신들은 바쁘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외로움에 지친 남자들이 수도 없이 많기 때문. 그런 남자들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여신의 숫자는 제한되어 있어, 어떨 때는 여러 남자들을 동시에 만족시켜주어야 한다. <미스 헬로우>의 하루오는 그런 면에서 모범이 될 만한 처녀다. 아르바이트를 위해 긴자의 살롱에서 일하게 된 여대생 하루오. 덜렁대는 성격에 사고뭉치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순수하고 꾸밈없는 모습은 모든 남자에게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여자라면 지켜주고 싶어. 아니, 이런 여자가 지켜봐 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서 만화상 수상에 실패해 좌절한 만화가, 부상당해 은퇴 기로에 선 프로야구 에이스, 그 구단주이지만 병살타가 뭔지도 모르고 세상의 잔재미를 느껴본 적 없는 기업가…. 모두가 그녀의 연인이 되고, 그녀로 인해 삶의 희망을 찾는다. 그런데 이러한 다채널의 여신에게 필요한 것은 그 남자들에게 질투심과 독점욕을 자제하도록 만드는 기술. 하루오는 시골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깅고로를 위해 ‘처녀를 지키겠다’고 한 정절 선언으로, 그 남자들의 청혼, 즉 여신에 대한 독점 요구를 거절한다. 그녀는 대학 4년 동안만 활동할 수 있는 한시적인 여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 스스로 선택한 한 남자의 영원한 여신이 된다.

어떤 여자들이 할머니가 되어서도 백마의 기사를 꿈꾸듯이, 어떤 남자들은 나이가 들고 한 여자를 선택하고 난 뒤에도 어디선가 숨어 있을 여신을 찾아 헤맨다. 그 여신들은 TV 모니터와 영화관의 스크린에, 그리고 수많은 도색잡지와 포르노 사이트 속에 있다. 그들의 영혼과는 만날 수 없더라도 그 벌거벗은 육체만은 몇푼의 돈으로 사고 싶다. 때론 룸살롱의 호스티스와 길거리의 여학생들 속에서 그 여신을 찾기도 한다. 그에 비한다면 만화 속에서 자신의 여신을 찾는 정도는 소박하고도 순진무구한 꿈이랄까?

멀리서 찾지 마세요

변병준의 <프린세스 안나>에는 지하철 입구에서 동전을 구걸하는 검은 얼굴의 소년 노아가 나온다. 우체국 직원의 막내아들이지만, 자신은 쿠바에서 왔다고 믿는 바보다. 세상의 누구도 돌봐주지 않는 외로운 그를 안나는 포근하게 안아준다. 문제많은 가족사에 그 얼굴에 미소 한번 띄워볼 수 없는 안나이지만, 노아에게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름다운 여신이다. 빛은 어디에 있냐에 따라 그 밝기가 달라진다. 당신은 이미 수많은 여신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중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