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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 야구영웅전설 [1]

스포츠 그 이상의 감동 - 야구 만화 대해부

해마다 가을이 되면 사람들의 눈은 작은 공 하나에 쏠리게 된다. 108개의 실밥을 가진 하얀 공은 팔색의 변화구로 갈라지며 수억의 가슴을 쥐었다 폈다 요술을 펼친다. 가을의 전설, 백구의 향연, 프로 스포츠의 꽃,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는 야구는 올해에도 새로운 전설과 영웅들을 만들어냈다. 한국, 일본, 미국의 프로야구가 서서히 마감하고 있는 이때, 야구 팬들의 마음속엔 짜릿함과 아쉬움이 오가고 있을 것이다. 도대체 내년 봄까지는 무얼 보며 버티나? 그들에게 ‘시간제한이 없는 게임’의 묘미를 수백배 증폭시킬 수 있는 만화의 세계를 소개한다. 야구 만화는 단지 하나의 스포츠를 소재로 한 장르가 아니라, 수십년 간 시대를 꿰뚫으며 극한의 긴장과 쾌락을 선사해온 ‘만화 중의 만화’다.

1. 돈과 명예를 그대에게 - 프로야구 만화

야구 만화 시대의 본격적인 개막은 1966년 가지와라 잇키/가와사키 노보루의 <거인의 별>로부터 출발한다. 일본에서는 1960년대 초반부터 야구 만화가 성행했고, <거인의 별> 역시 지바 데츠야의 <치카이의 마구>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야구 만화가 전 만화계를 지배하는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행사하기 시작한 계기는 역시 이 작품의 절대적인 인기와 그 영향력 때문이었다. <거인의 별>이 탄생하던 시기의 일본은 고도성장의 가파른 궤도를 오르고 있었고, 왕정치-나가시마의 이른바 ON 타선이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며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전설의 일본시리즈 9연패를 기록하던 프로야구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야구는 일발 필살(9회말 역전 만루홈런)이 가능한 합법적 무대로, 팀 경기이면서도 개인의 역량을 극적으로 돋보이게 하는 스포츠였다. 밑바닥 출신도 재능과 노력만 있으면 돈과 명예를 일거에 거두어들일 수 있다는 프로게임의 판타지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대리만족의 도구가 되기에 가장 적합했다.

마구 열풍 부른 열혈 야구 만화 <거인의 별>

<야구광의 시>

주인공 호시(星)는 전쟁 때 입은 부상으로 야구선수의 꿈을 접은 아버지의 혹독한 훈련을 통해 야구선수로 성장한다. 아버지가 아들의 신체적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입힌 근육강화용 강철 깁스는 지옥 훈련과 가혹한 부정(父情)의 상징물이 되었고, 주인공의 마구 메이저리그 볼 1호, 2호, 3호는 수많은 야구 소년들에게 무모한 환상을 심어주었다. 고교 야구를 통해 라이벌을 만나고, 자이언츠의 주목받는 신인으로 입성했지만 개막전에서 홈런을 맞고 2군으로 추락, 절치부심의 훈련으로 마구를 개발해 라이벌을 쓰러뜨리고, 상대의 필살 타법을 극복하기 위해 새 마구를 수련, 결국 퍼펙트게임을 달성시키려는 때 어깨 근육 파열로 야구 생명이 끝난다는 이야기는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야구 만화의 줄기가 되어 있다.

<거인의 별>이 불러일으킨 ‘마구 열풍’으로 인해 이후의 프로야구 만화는 황당무계한 마구 경쟁으로 치닫게 된다. 나카지마 노리히로의 <아스트로 구단>은 노골적으로 초인 야구를 표방한 작품으로, 전쟁에서 죽은 대투수의 유언에 따라 일본 각지에서 9명의 초인을 찾아 ‘아스트로 구단’을 만들어 기존 프로야구계에 도전장을 내민다는 내용이다. 만화 초반에 나오는 우에노라는 캐릭터는 초인의 상징인 공 모양의 문신을 가짜로 만들어넣고 오직 ‘돈을 벌기 위해’ 아스트로 구단에 들어왔는데, 결국 블랙구단 투수가 던진 ‘살인 L자 볼’에 맞아 사망한다. 이는 평범한 능력이지만 죽기살기로 뛰어온 직장인이 냉혹한 사회에서 과로사했다는 이미지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 외의 인물들도 시합 도중 할복하거나 동점 홈런을 놓친 뒤 머리를 심하게 다쳐 죽는 등, 야구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전투장이었다. 이노우에 코의 <사무라이 자이언츠> 역시 이름만큼 마구와 극단적 기술들이 난무하는 작품으로, 하이점프, 대회전, 분신 등 이후의 작품들에서 모방 또는 변형되는 마구들의 원형을 만들어냈다. 역시 연투를 거듭하던 투수가 마운드에서 과로사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1970년대에는 마구 만화가 대세였지만 현실적인 야구 세계를 그리는 작품들도 없지 않았다. 미즈시마 신지의 단편집 <야구광의 시>는 프로야구 세계의 그늘에 있는 아웃사이더 주인공들을 내세워 색다른 인기를 끌기도 했다. 감독의 동기이면서 여전히 현역에서 뛰고 있는 노 투수, 스타 투수의 그늘 아래 있는 연습광 투수, 프로야구의 문을 두드리는 미소녀 투수 등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한국 프로야구 만화의 대표작 <공포의 외인구단>

<철완소녀>

<메이저>

일본에서는 1980년대 이후 마구 만화가 주춤하게 되지만, 한국에서는 바로 이때 프로야구가 개막되면서 본격적인 야구 만화의 전성기가 펼쳐진다. 특히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은 시대를 뛰어넘는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형성하고 있다. 사회와 야구계에서 버림받은 혼혈인, 외팔이, 고아 등이 모여서 외인구단을 만들고, 지옥 훈련을 통해 개발한 마구와 각종의 필살기로 강력한 적들을 하나둘 쓰러뜨리지만, 결국 주인공 오혜성이 사랑하는 엄지를 위해 목숨보다 소중한 팀의 승리를 포기하고 만다는 내용은 그 극적인 승부의 묘사 이상으로 강한 여운을 만들어냈다. 쿠데타로 집권한 5공화국이 우민화의 일환으로 도입한 프로야구는 성장 일변도의 사회에서 억눌린 민중들의 울분을 해소하는 도구가 되었지만, 프로야구 만화는 그 긴장을 몇 차원 극적으로 강화시켜 시대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강렬한 원한을 폭발시켰던 것이다.

1990년대 이후의 프로야구 만화는 다채로운 모색을 하고 있다. 다카하시 츠토무의 <철완 소녀>는 미군정 시기에 야구라는 무기로 남성 위주의 사회와 미국에 항거하는 여주인공 토메의 삶을 그리고 있다. 현대적이면서도 강렬한 화력(畵力)을 보여주지만, 무대의 스케일이 커져가면서 야구 자체에 집중된 재미는 줄어든다. 최근의 본격파 야구 만화로는 타쿠야 미츠다의 <메이저>가 있는데, 주인공 고로가 어린 시절부터 야구선수로 성장해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활약하는 내용까지를 다룰 것으로 보인다. 최근 이 만화의 주인공이 쓰는 야구용품 일체를 미즈노에서 독점 제공하기로 해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2. 청춘을 그라운드에 묻어라 - 고교 야구 만화

고교 야구는 프로야구와는 또 다른 흥분을 자아낸다. 수많은 경기와 시즌이 이어지는 프로야구에서는 오늘 지더라도 내일 잘하면 되고, 올해 부진하더라도 내년에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고교 야구는 토너먼트라는 특성, 오직 3년이라는 제한된 시간, 막 성장해가는 청춘의 한때라는 특징 때문에 더욱 절절하면서 애틋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낸다.

고교 만화의 고전 <야구짱 도카벤>

<야구짱! 도카벤>

미즈시마 신지의 <야구짱 도카벤>은 고교 야구 만화의 고전이다. 자타 공인의 최강 고교팀에 도전해오는 각지의 괴짜 선수들의 활약을 그리고 있는데, 캐릭터는 황당무계하지만 야구 자체에 있어서는 현실감 있는 설정에 기초하고 있다. 미즈시마는 특히 야구가 팀 경기라는 점을 중심에 두고 있으며, 인물들의 탁월한 개인기 이상으로 그들의 굴절된 성격을 독창적으로 묘사한다. 그의 다채로운 고교 야구 세계는 <기적의 갑자원>이라는 무대에서 총결산된다.

국내에서는 청소년 만화가 융성하면서 고교 야구가 인기의 정점에 있던 1970년대 후반을 중심으로 야구를 소재로 한 여러 만화가 등장했다. 허영만의 <태양을 향해 달려라>가 유소년들의 꿈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상무의 <아홉 개의 빨간 모자>나 <현해탄 너머>는 고아 소년의 비애, 형제간의 갈등 등 주인공들의 비극적 내면을 야구를 통해 해소하려는 시도가 강했다. 특히 독고탁은 거대한 S자를 그리는 드라이브 볼과 바닥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솟아오르는 더스트 볼 등의 마구를 선보이기도 했다.

순정 야구 만화 <터치> <H2>

<터치>

1981년에 등장한 아다치 미츠루의 <터치>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청춘 야구 만화의 문을 열었다. 보통의 야구 만화가 라이벌과 벌이는 필생의 대결을 그린다면, 이 만화는 라이벌인 쌍둥이 형제가 연재 초반에 교통사고로 죽은 이후에 주인공이 그의 그림자와 외롭게 싸워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동시에 중요한 승부의 순간에 화면을 뛰어넘는다든지, 야구 바깥의 로맨스를 또 하나의 선으로 이끌어간다든지 하는, 독자들의 힘을 묘하게 뺏으면서 다른 감정의 여운을 만들어내는 장치들을 배치한다. 야구 만화에 러브 코미디를 교묘하게 결합한 아다치의 ‘순정 야구 만화’는 당시 ‘열혈 만화의 종언’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해석되었다. 그럼에도 지금의 시점에 보면 <터치>는 ‘직구 승부’라는 순결한 열혈의 의지가 가득 찬 작품으로 여겨진다. 아다치의 고교 야구 세계는 1990년대의 <H2>에도 이어진다.

현재 정통 고교 야구 만화의 줄기를 가장 잘 이어받고 있는 작가는 나미 타로/가와 산반치다. 1986년에 시작된 <4번타자 왕종훈>은 왜소한 체격에 유연한 근육 이외에 소질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주인공이 명문 야구부의 4번 타자에 에이스 피처라는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만화에서도 ‘특훈’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만, 전 시대와는 다른 현실적인 묘사들이 돋보인다. 이미 이 시대에 고교 야구부들이 전문화된 훈련 과정을 갖추어가고 있던 현실을 반영했다고 한다. <바람의 마운드>는 흉내내기 천재인 주인공이 노모, 왕정치, 마쓰이 히데키 등의 유명 선수들의 자세와 특기를 그대로 흉내내면서 고교 야구의 정상으로 다가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고, 현재 연재작인 <드림>에서는 거칠고 자기중심적인 성격의 주인공이 메이저리그를 목표로 고교 야구의 실력자들과 싸워가고 있다.

<4번타자 왕종훈>

<바람의 마운드>

<드림>

이밖에도 변방의 주인공들을 통해 최고의 자리에 도전하는 고교 야구 만화들은 꾸준히 나오고 있는데, 야마모토 오사무의 <머나먼 갑자원>은 청각장애자들로 이루어진 학교가 갑자원을 목표로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해가는 과정을 눈물겹게 묘사해 국내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조쿠라 고지의 <사막의 야구부>는 지원자가 없어 문 닫을 위기에 처한 여자 고교가 홍보를 목적으로 야구 명문고 진학에서 탈락한 9명의 선수로 전국대회를 목표로 도전한다는 다소 코믹한 설정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