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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을 말해봐, <오로라 공주>

양육의 책임을 물으면서 가족 이데올로기 주장하는 <오로라 공주>

심야시간대 토크쇼를 보고 있는데, 엄정화가 나왔다. 아마도 최근 개봉한 <오로라공주>를 홍보하러 나왔나보다 하면서 무심히 지켜보고 있는데, 사회자가 물었다. “그런데 엄정화씨가 오로라 공주예요?” 엄정화가 눈을 빛내며, 활짝 미소를 띠고 대답한다. “당연하죠.” 사회자와 패널 그리고 방청객,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린다. 그 웃음은 아마도 ‘공주’라는 단어가 엄정화라는 아이콘과 결합할 때 빚어지는 절묘한 조응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약간 헷갈리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영화 속에서 ‘오로라 공주’는 엄정화가 연기한 정순정의 딸 오민아의 별명이었기 때문이다.

토크쇼에서 농담처럼 던진 엄정화의 말 한마디로 인해, 만화 속 캐릭터인 오로라 공주를 좋아했고, 내 머리 속에서 오로라 공주 판박이를 몸에 붙여서 엄마에게 혼나던 귀여운 소녀의 얼굴이 점점 정순정의 얼굴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엄정화는 ‘공주’라는 단어가 풍기는 이미지 때문에 오로라임을 자처했던 것일까? 그러니까 그것을, 그 대답은 웃음을 자아내기 위해 즉흥적으로 던져진 잘못된 메시지라고 받아들이면 되는 것일까? 아니면 영화 속에서 진정한 ‘오로라 공주’는 오민아라는 소녀의 가면을 뒤집어쓴 정순정인 것일까? 그녀가 농담인 듯 진담인 듯 던진 그 한마디는 ‘오로라 공주’의 실체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고, 딸과 엄마라는 두 단어 사이에 묘하게 ‘행간 걸침’(enjambment)되어 있는 ‘오로라 공주’를 추적하게 만들었다.

용서를 모르는 엄마, 오로라 공주가 되다

영화 <오로라공주>는 엄마의 복수, 그것도 아이와 관련된 범죄 때문에 일어난 복수극이라는 점에서 근간 나온 박찬욱의 <친절한 금자씨>를 떠올리게 한다. <친절한 금자씨>의 내러티브를 지배하는 큰 질문이 ‘그녀는 어떻게 복수를 할 것인가’였다면, <오로라공주>를 이끌어나가는 질문은 ‘그녀는 왜 복수를 하는가’이다. 그러므로 전자는 관객으로 하여금 금자씨가 복수를 위해 얼마나 처절하게 준비하고, 어떻게 그 복수의 칼날을 예리하게 만들어가는지를 숨죽이며 지켜보게 만든다. 그러나 후자는 정순정의 복수가 행동으로 옮겨진 그 대목부터 시작하므로 관객은 그녀가 왜 그토록 당당하게 수많은 이들을 처벌하는가를 궁금하게 만든다. 두 영화 속 엄마들을 분노하게 만드는 원인은 유사하지만, 그들은 완전히 상반된 결론에 도달한다.

금자씨는 백 선생으로 표상된 절대악 앞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복수를 접는다. 금자씨의 아이, 제니는 죽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녀는 죽어간 다른 아이들의 부모들이 복수의 칼을 잡도록 권리를 이양한다. 이제 복수는 실행의 차원을 넘어 그녀 내면의 문제로 전환된다. 악을 처단하면 해결될 줄 알았던 그녀의 증오심은 결국 내면의 공허감과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 텅 빈 존재감을 채워줄 새로운 대상, 자신의 또각거리는 발걸음 소리에 맨발로 달려나와 맞아줄 딸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그녀에게 완벽한 구원이 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삶을 유지할 만한 힘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라는 결론에 도달하면서 영화는 끝난다.

하지만 정순정에게는 그 아이가 없다. 오로라 공주였던 오민아는 정순정의 말대로, ‘기억 속에만 존재할 수 있는’ 죽은 아이가 되었고, 아이가 살다간 6년이라는 짧은 시간은 그 기억조차도 많은 이들에게 남기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정순정은 스스로 오로라 공주가 되기로 결심한다. 정순정이 포스터에서 들고 있던 하얀 가면은 그녀 남편이자, 그녀를 검거한 형사 오성호의 말대로 ‘착하게 생긴’ 엄마 정순정의 얼굴이다. 그녀가 죽은 오민아의 원한을 풀어주는 영매가 되기로 결심하는 순간, 착함(때때로 선함과 동일한 기의를 공유하는 아름다움)은 그녀 최대의 무기가 된다. 그녀는 커다란 두눈을 깜빡거리며 최대한 순진한 표정으로, 오로라 공주가 죽도로 공모한 인간들을 하나씩 찾아서 처단하기 시작한다. 그녀가 가는 길에는 금자씨가 그토록 갈망한 ‘구원’이라는, 복수를 가로막는 걸림돌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라 공주는 누가 죽였는가?

정순정의 연쇄살인은 사이코스릴러물에 나오는 살인의 방식과는 다르다. 그녀는 살인 그 자체를 즐기는 살인마가 아니라, 살인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물론 정신이상으로 인해 엽기적인 살인을 저지르는 연쇄살인범들도 살인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러나 그들의 메시지는 심리적 불안정에서 비롯된 고통이 적절하게 표출할 수 있는 통로를 찾지 못해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순정은 표면적으로는 자신의 아이를 잃은 고통을 7명의 피살자를 통해 해소하려는 듯 보이지만, 그녀가 저지른 살인의 궤적을 따라가다보면 좀더 근원적인 문제에 도달하게 된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아무리 타락한 대중예술에도 이데올로기적 기능과 유토피아적 기능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 개념들을 최대한 단순화하면, 이데올로기적 기능이 작품에서 형상화된 현 사회에 대한 비판적 잣대를 가리킨다면, 유토피아적 기능은 그 작품이 그것의 해결책으로서 지향하고자 하는 비전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오로라공주>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은 바로 현 사회가 봉착하고 있는 ‘육아문제에 대한 사회적 각성 촉구’이다. 어린 오로라 공주를 죽인 것은 누구인가? 이 답을 찾기 위해서는 정순정의 희생자 리스트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악독한 계모, 아이를 방기한 불륜 커플, 정순정이 아이에게 가는 것을 지연시킨 교통사고 가해자 장명길(숯불갈빗집의 청년), 아이를 안전하게 집까지 데려다주지 않은 택시운전기사, 아이의 강간살해범을 정신병원 보호감호로 빼준 변호사 그리고 강간살해범이다. 금자씨의 복수대상이 백 선생 단 하나였던 것에 비해 방대한 숫자인데, 이것은 정순정이 아이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묻고 싶은 대상이 개인이 아니라 사회였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혼녀이자 일하는 여성인 정순정이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모성을 지킬 수 있는 어떤 사회적 제도도 뒷받침되어 있지 않다. 불륜 커플이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은 식당 아주머니에게 무례하게 굴어서도, 애인의 죽음을 금세 잊고 재력을 이용해 여자를 성적으로 착취하려고 해서도 아니다. 그들은 그녀가 혼자 아이를 키우며 겪는 고통에 대해서 “이혼을 하려면 애를 낳지 말든가”라는 무책임한 인식, 처참하게 희생된 아이와 값없이 죽은 애인의 죽음을 쉽사리 동질의 것으로 파악하는 무신경함 때문에 죽음을 맞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택시운전사와 장명길, 변호사와 살해범 역시 한명의 아이가 엄마의 보호 없이는 무사히 집으로 귀환할 수 없게 되어 있는, 무정하고 위험한 사회구조의 방조자이거나 적극적 생산자였기 때문에 동일한 종말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친절한 금자씨>보다 훨씬 더 사회고발적이며, 비판적인 이데올로기를 담지하고 있다.

살인 리스트에 남편이 빠진 이유는?

이 영화의 또 다른 차원, 즉 이 영화의 유토피아적 비전은 가족의 소통과 화해를 지향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들었던 의문은 왜 정순정이 그의 남편 오성호를 살인 리스트에 올리지 않았는가이다. 오성호가 정순정의 집을 몰래 방문하는 시퀀스는 형식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 오성호가 전직 털이범이었음으로 짐작되는 인물을 동원하여 정순정 집의 현관문을 따기 직전에 제시되는 것은 오성호와 정순정의 재회 시퀀스이다. 재회 시퀀스의 마지막은 정순정이 차를 몰고 집으로 향한 것처럼 처리되어 있지만, 바로 뒤 정순정 집에 도착한 것은 그녀가 아니라 오성호이다. 오성호가 정순정의 집을 조사하는 동안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젊은 여성관객은 얼굴을 감싸쥐며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가 오성호가 다른 희생자들처럼 처참하게 살해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짐작은 빗나갔다. 오성호를 정순정의 집에 들여보낸 감독이 그 장면을 통해 의도한 것은 그에게 오민아에 대한 기억을 환기시킨 뒤, 여전히 죽은 아이의 그늘 속에 살고 있는 정순정을 발견하도록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장면의 전후를 장식하는 느닷없이 전개되었던 오성호와 정순정의 섹스신과 쓰레기 하치장에서 오민아의 목소리를 내며 오로라 공주 행세를 하던 정순정을 크레인에서 내려오도록 한 오성호의 눈물 어린 ‘미안해’에 담겨 있는 메시지는 ‘이 가족은 아직 해체되지 않았다’이다.

한명의 아이도 안전하게 지켜내지 못하는 사회를 통렬히 비판했던 감독이 그 문제에 대해 ‘가족의 재결합’이라는 너무도 쉬운 답을 제시하려고 하면서 이 영화의 울림은 사라진다. 그러면서 일곱명의 희생자 중 살해의 이유가 가장 이질적이고, 납득이 가지 않는 악독한 계모의 죽음 뒤에 깔려 있는 불순한 이데올로기를 발견하게 된다. 그녀는 친모와 아이를 가로막는 계모이기 때문에 존재 자체가 용인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변호사에게는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죄의식을 요구하던 정순정이 오성호는 그토록 쉽게 용서하고, 둘을 새로운 살인의 공모자로서 손잡게 하는 결말은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재건하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으로 읽을 수 있다. 어린 오로라 공주를 죽게 한 것이 비정한 사회라면, 어른 오로라 공주 정순정이 저지른 살인의 의미를 퇴색하게 만들고, 그녀를 정신병원에서 자살하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혈연적 가족의 재결합에 대한 강한 집착인 것이다. 정순정이 감행한, 일련의 살인들을 통한 고독한 항변인 양육권의 사회적 보호와 야만적 사회에 대한 고발은, 친모와 친부 그리고 아이가 이루는 폐쇄적인 가족 판타지라는 식상하고 위험한 결말과 충돌하면서 빛을 잃고 공중분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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