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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어느 씨네키드의 죽음
김수경 2005-11-25

12시 반에 잠이 들었다. 윙 하고 울리는 진동음에 시계를 쳐다보니 4시쯤이다. 계단을 내려가 옷 속의 휴대폰을 꺼냈다. 부재중 전화 2통. 동료 Y의 전화다. 예의바른 이 친구는 이 시각에 전화한 적이 없다. 술에 취하지 않았다면. 전화를 걸었다. 마른 목소리로 Y가 말한다. 전화번호를 물으려고 했는데 지금은 알아냈다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Y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J가 죽었다고. 전화를 끊었다. 손을 뻗으니 비어버린 담뱃갑이 잡혔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편의점에서 담배를 샀다.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뒤늦게 올라탄 한 여자가 10층 버튼을 눌렀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동승한 여자가 무서워하거나 당황하리라는 생각을 할 겨를은 없었다. 담배를 네대쯤 피우니 눈물이 멎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비디오 테이프를 데크에 넣었다. 화면에는 우 형사와 최지우가 포장마차에 앉아 있다. 몇 개월 전 내가 매주 가는 시끄러운 술집에서 술에 취한 나와 J는 이 장면을 이야기했다. 대화는 기억나지 않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앞으로 이 영화를 볼 때마다 J의 얼굴이 떠오를 것이다.

J를 소개해준 건 Z였다. Z는 나와 10년을 알고 지낸 연출지망생이다. 나는 절반쯤은 Z의 영향으로 영화에 미쳐갔다. 신촌 고깃집에서 처음 만난 J는 산처럼 생긴 밝은 소년이었다. J는 촬영을 하고 싶다고 했다. 동료인 Y, J, Z가 함께 만난 건 회사 앞 고깃집에서였다. J는 대한민국의 모든 부모가 희망하는 대학을 때려치우고 영화학교를 향했다. 영화학교를 나와 <씨네21>에 입사한 Y는 부모 속썩이기의 진수를 솔선수범한 J의 학부 선배다. Y와 Z는 영화학교 동문이다. 한국 영화판은 두 사람만 건너면 모두가 지인이다. 회의를 앞둔 탓에 우리는 초치기로 고기를 먹으며 J의 영화인생이 본격적으로 출발하는 것을 내심 축하했다.

날이 밝았다. 기자간담회가 열린 국회로 갔다. 간담회가 끝나고 보이스레코더를 책상 위에 두고 나왔다. 수첩은 가져왔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회사 앞 건널목을 건너다 Y를 만났다. Y가 J의 사고를 설명했다.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스토리를 몰라도 가슴이 미어지는 외국영화는 얼마든지 있다.

밤이 오고 Y와 함께 병원으로 갔다. 빈소에서 우연히 촬영감독 L을 만났다. J는 그의 촬영부였다. L은 J가 얼마나 일을 잘하는 스탭이었는지 술회했다. 막 영화학교를 입학한 J를 졸업작품 촬영기사로 탐내는 사람들이 있을 만큼 그는 이제 유능한 영화인이 됐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의 영화를 볼 수 없다. 조문을 마치고 빈소 앞의 Z를 바라보았다. 나사 풀린 표정으로 Z가 J의 사진을 바라본다. 나는 Z의 뒤통수와 J의 사진을 바보처럼 바라본다. 계단에 Y가 앉아 있다. Y의 눈이 벌겋다. 아침이면 J는 안면도로 마지막 여행을 떠날 것이다. 친구여, 편안히 잠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