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북유럽에서 온 발칙한 영상제조기, 트랙터 [1]
김도훈 2005-12-07

멈추지 않는 영상제조기 트랙터가 한국에 왔다. 마치 견인자동차(Tractor)처럼 들리는 트랙터(Traktor)는 여러 명의 멤버로 구성된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영상집단이다. 한국에서는 낯선 이름이지만, 1990년에 결성되어 지금껏 400여편의 광고와 5편의 뮤직비디오, 1편의 극장용 장편을 만든 이 공동체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광고상을 수상했고, 뮤직비디오계와 영화계가 주목하는 새로운 재능이기도 하다. 만약 트랙터가 한국을 방문하지 않았다면, 건전한 정치적 불공정성과 관객의 신경을 벅벅 긁어대는 유머감각으로 넘치는 그들의 작품 세계를 볼 수 있는 가능성도 없었을 것이다. 레스페스트 2005의 ‘트랙터 특별전’이 반가운 이유도 그 때문이다. 지난 15년간 트랙터적(的)이라고 할 만한 고유의 작품세계를 구축해온 영상천재들의 작품들이 이미 레스페스트의 관객과 만났고, 새로운 미디어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젊은이들을 매료시켰다.

이제 레스페스트는 폐막했지만 트랙터의 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희망이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다. 그들의 뮤직비디오와 광고들은 지금도 인터넷의 바다를 떠다니고 있으며, 장편데뷔작 <체인 오브 풀스>는 소리소문없이 국내에 DVD로 출시되었다. 이 기사에서는 레스페스트에서 만난 두명의 트랙터 멤버, 패트릭 본 크러센트제르나와 샘 라르슨과의 인터뷰를 토대로 트랙터의 역사를 재구성했다. 본문과 대표작 코멘터리, 인터뷰에 골고루 박혀 있는 그들의 생생한 이야기는, 멈추지 않는 영상제조기의 미래를 들여다볼 수 있는 내시경 역할을 해줄 것이다.

“리얼리즘. 실재와 같은 것을 창조하는 일은 매우 힘들다. 그건 판타지를 창조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무엇이 실재인가’라는 컨셉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처럼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브랜드와 교감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무의식적이고 자연스러운 감각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어떤 순간들을 ‘발견’하기를 원한다. 무슨 말이냐고? 짧게 말하자면 이거다. 우리는 광고 하나를 위해 엄청나게 많은 필름을 소비한다.”

유럽에는 ‘모든 이상하고 괴이한 이야기는 북쪽으로부터 온다’는 말이 있다. 괴이한 창작집단 트랙터의 이야기 역시 추운 북구의 나라로부터 시작된다. 스웨덴 스톡홀름의 미디어학교에서 공부하던 6명의 남자, 리처드 울프벤그렌, 매츠 린드버그, 패트릭 본 크러센트제르나, 샘 라르슨, 폰더스 로웬헬름, 울프 요한슨은 샴쌍둥이처럼 붙어다니는 친구들이었다. 술과 파티와 미디어를 좋아하던 이들은 졸업과 함께 뿔뿔이 흩어졌으나, 1990년에 트랙터라는 공동체를 결성하며 다시 좁은 작업실에 모여들었다. “모든 것은 학교에서 시작됐다. 그룹으로 일하는 게 더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학교 때문이다. 영화나 미디어는 원래가 공동작업의 산물이니까.” 노르웨이 출신의 올레 샌더스가 합류하면서부터 트랙터는 스웨덴에서 스칸디나비아 집단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당시 스칸디나비아는 발칙한 재능을 지닌 청년들을 위해 활짝 열린 대지였다. 특히 스웨덴은 TV광고의 역사가 그리 오래지 않았고, 광고를 제약하는 특별한 법규도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비옥한 처녀지에서 시작된 트랙터는 곧 본격적인 상업 광고집단으로서의 발걸음을 시작했고, 파리를 무대로 한 광고 에이전시 파르티잔의 소개로 청바지 회사 ‘디젤’(Diesel)의 극장용 광고를 만들면서 첫 명성을 얻었다.

스웨덴 미디어학교 친구들 6명에서 출발

“스웨덴이 너무 추웠기 때문에 미국으로 갔다. (웃음) 이건 농담이고, 사실 미국에 광고 일이 더 많았기 때문에 1년만 도전해보자는 생각으로 LA로 향했다.” 유럽에서의 성공을 등에 업은 트랙터는 1998년에 미국 LA로 본거지를 옮겼다. 부엌에 팩스머신을 두고, 큰 테이블에서 공동으로 작업하며, 6대의 볼보를 몰고 다니던 스칸디나비아 남자들은 “면허와 사회보장을 취득하는 등의 까다로운 일을 제외하면 아무런 문제없이” 미국에서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우리는 엄청난 행운아였다.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일거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는 트랙터의 회고처럼, 지루한 관습을 반복하던 미국 광고계는 북구에서 찾아온 괴상한 사나이들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런 배경에는 보수적인 80년대를 갓 벗어나 뭔가 새로운 것을 원했던, 일렉트로니카와 얼터너티브 음악신과 젊은 선댄스 영화광의 90년대가 있었다. “90년대는 진정으로 아이러니가 통하는 시대였다”고 말하는 트랙터는 물 만난 고기처럼 새로운 영상을 쏟아냈다. 나이키, 리복, 폭스TV, 밀러, 하이네켄, 코카콜라, 소니 등 젊은이들을 사로잡으려는 기업들이 트랙터의 작업실로 돈다발을 들고 몰려왔다. 트랙터가 만들어낸 광고는 광고주와 구매자들의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는 잔상을 남겼고, 칸국제광고제 그랑프리 2회 수상을 비롯 전세계의 광고분야 시상식을 모조리 휩쓸기 시작했다. 트랙터는 90년대의 감수성이 낳은, 광고의 미래였다.

끊임없는 창조력은 공동작업의 힘

트랙터의 끊임없는 창조력은 그들이 집단공동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촬영할 때는 항상 1명 아니면 2명이 진행한다. 모든 멤버가 같이하는 경우는 없다. 물론 시작은 다르다. 아침에 사무실에 가면 모두 함께 작품에 대해 논의를 한다. 그렇게 공동으로 준비한 뒤에 가장 아이디어가 많은 사람이 그 작품을 맡는다.” 학생 시절 함께 작업을 하던 그들은 “신용, 욕설, 돈과 옷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공유하기로 결정”하면서 자연스레 공동작업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래서 어쩌면 트랙터를 북구사회주의체제의 산물이라고 말하는 것도 가능할는지 모른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멤버의 변화도 거의 없이, 악랄한 미국인 변호사들을 달고 지분 분쟁을 벌이는 일도 없이, 학교 때와 같은 공동작업을 고수할 수 있었던 것은 스칸디나비아적 특성이라는 설명 외에는 달리 이해할 도리가 없다. 물론 트랙터는 “발음하기 어려운 스웨덴 이름들을 하나로 뭉뚱그려 부를 수 있으니까 다른 광고회사들에는 상당히 편리한 이름이기도 하다”는 이유를 덧붙이지만.

1

2

3

1. <Jukka Brothers>(1999)

트랙터가 북미에서 명성을 얻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했던 MTV 연작 광고. 깊은 스칸디나비아 산골에 살고 있는 4명의 촌놈들, 유카 형제들이 주인공이다. MTV에 빠져 사는 유카 형제들은 음악과 패션을 비롯한 모든 삶의 방식을 MTV로부터 배운다. 제3세계 사람들을 곧잘 우스갯거리로 삼는 트랙터가, 자신들의 출생지인 스칸디나비아에도 별달리 공정한 예의를 배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포복절도할 작품. 트랙터는 이 작품을 “우리의 자랑스러운 작품 중 하나”라고 간결하게 표현한다.

2. <Korea>(1999)

트랙터와 수많은 작업을 함께해온 청바지 회사 디젤(Diesel)을 위한 연작 중 하나. 청바지를 입은 북한 청년이 다른 주민들에게 배척당하다가 청바지를 입은 여인을 만나게 된다는 내용의 이 작품은,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당하다가 자신만의 길을 찾는다는 트랙터식의 이야기를 근사하게 풀어낸다. “한국에 대한 책을 모조리 구해서 보며 조사를 했다. 우리는 스스로 행복해질 때까지 철저하게 사전조사를 한다. 혹시 문화를 마음대로 뒤섞는 것이 정치적으로 불공정하다고 받아들여지지는 않겠냐고? 물론 우리는 광고에 등장하는 이국인들을 비웃는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사랑한다.”

3. <Where’s Your Head At?>(2001)

영국의 일렉트로니카 듀오 ‘베이스먼트 잭스’를 위한 뮤직비디오. 원숭이와 인간의 뇌를 대체하는 실험을 하는 미친 과학자의 실험에 말려든 영국인 음반사 직원의 악몽을 그린 이 작품은, CG로 얼굴을 변형하거나 대체하는 작업을 즐기는 트랙터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이 뮤직비디오에서는 베이스먼트 잭스의 멤버들이 직접 인간의 얼굴을 한 원숭이로 등장하는데, 이후 트랙터는 그들을 위해 또 다른 뮤직비디오 <Plug It In>을 감독하기도 했다. “우리는 뮤직비디오에서 춤추고 노래하려들지 않으면서도 뮤직비디오의 한 부분으로 연기하고 싶어하는 뮤지션들을 좋아한다. 그런 사람들과 작업을 해야 제대로 된 스토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트랙터는 이후에도 프로디지의 뮤직비디오 <Baby’s Got A Temper>와 지멘스 휴대폰 광고 등 많은 작업물에서 인물의 얼굴을 변형시키거나 퍼스낼리티를 지워낸다. 이는 프로필 사진 촬영을 극도로 싫어하는 트랙터 멤버들의 비노출주의와도 연관이 있을 듯하다. 2003년 레스페스트 관객상 및 다수의 뮤직비디오상을 수상한 트랙터의 대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