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북유럽에서 온 발칙한 영상제조기, 트랙터 [2]
김도훈 2005-12-07

혁신적인 방식의 이야기 구조

하나로 뭉쳐 부를 수 있는 스칸디나비아식 공동체라는 것만이 트랙터의 특징은 아니다. 광고 에이전시 파르티잔 대표인 스티브 딕스테인의 말처럼 “사람들이 그들을 규정하려고 하는 순간, 트랙터는 움직이는 타깃으로 변한다”. 그래서 트랙터의 특징을 하나의 단어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랙터적(的)이라고 부를 만한 두 가지 특징을 굳이 끄집어내자면, 정치적으로 불공정해 보일 만큼 거침없고 날카로운 유머감각과 고전적인 이야기(Storytelling)에 대한 집착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트랙터는 북미와 유럽시장에서 ‘코미디 광고의 천재’로 통한다. 나이 많은 교관과의 키스를 경험한 뒤 성정체성을 찾는 보이스카우트 남자가 등장하는 디젤 청바지 광고(<Mono Village>)로부터, CG로 만들어진 거대한 뱃살을 피해 도망치는 남자가 등장하는 리복 운동화 광고(<Belly>)에 이르기까지, 트랙터는 끊임없이 시청자들의 정신을 빼놓는 유머들을 선보여왔다.

하지만 여기서 트랙터의 ‘이야기에 대한 집착’이 더욱 중요해진다. 트랙터는 단순하게 상황을 이용하는 코미디를 경멸하며, 단단한 이야기의 뼈대를 세워놓은 뒤에야 그 속에서 웃음을 뽑아낸다. “우리의 의도는 가능한 한 가장 명백한 방식으로 웃기는 이야기를 그려내는 것이다. 지나치게 번드르르한 비주얼을 보여주거나 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코믹한 순간과 기대치 않았던 이야기의 전개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코미디를 위해서 천박한 몸짓과 괴상한 캐스팅에 기댈 필요는 전혀 없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첫째도 둘째도 이야기다. 그래서 짧고 강렬한 비주얼 중심의 현대 광고계에서 트랙터는 조금 구식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30초짜리 광고에서조차 이야기의 힘을 믿는 그들의 신념은, 유행이 급변하는 광고계에서 트랙터를 살아남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광고든, 뮤직 비디오든, 흥겹게 노는 자리든, 영화이든 간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잘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완전히 만족할 때까지 계속해서 이야기를 할 것이다.” 오랫동안 트랙터와 작업해온 영국 무빙픽처의 마크 벤슨 역시 바로 이같은 ‘이야기’가 트랙터의 가치라고 말한다. “트랙터의 작품들은 창조적 아이디어라는 것에 대한 어떤 상찬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언제나 혁신적인 방식의 이야기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트랙터식의 영화가 보고싶다

광고와 뮤직비디오계의 거물이 된 지금, 트랙터한테 남은 마지막 영역은 영화다. 광고계에서 뮤직비디오계로, 그리고 영화감독으로 영역을 확장한 사례는 많다. 멀리는 리들리 스콧과 데이비드 핀처부터, 가까이는 스파이크 존즈, 미셸 공드리, 조너선 글레이저까지. 트랙터 역시 2000년에 <체인 오브 풀스>라는 코미디영화를 만들었지만, 할리우드는 지옥 같은 경험만을 안겨주었다. 영화사는 계속해서 영화의 개봉을 연기하다가 제작연도로부터 4년이 지나서야 DVD로 소리소문없이 출시했고, 영화가 유일하게 극장에서 보여진 곳은 고향인 스웨덴이었다. “엄청나게 실망했다. 우리 중 누구도 그 영화를 다시 보는 사람은 없다.” 미셸 공드리가 <휴먼 네이쳐>를 딛고 <이터널 선샤인>을 만들었듯, 트랙터도 <체인 오브 풀스>의 체인을 풀고 트랙터적인 영화를 내놓을 수 있을까. 물론 멈추지 않는 트랙터는 지금도 계속해서 장편영화를 준비 중이다. 오히려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은 것이 트랙터의 고민이랄까. “<버라이어티>가 우리의 차기작이 SF영화 <사이폰>(Siphon)이라고 보도했지만, 아직까지 어떤 영화를 차기작으로 정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수많은 각본들을 손에 쥐고 있으며, <사이폰>도 그중 하나일 뿐 서두르고 싶은 마음은 없다. 아주 천천히, 만들게 되는 때가 오면 만들게 될 거다.” 아마도 그때가 오면, 트랙터의 이름은 비로소 자기만의 인장을 할리우드에 새기게 될 것이다. 스웨덴의 동토로부터 시작된 미디어 공동체의 이름을 기억해두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광고와 MTV의 세상으로부터 온 미셸 공드리와 스파이크 존즈가 지루한 영화세상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듯이, 트랙터는 스웨덴산 보드카처럼 독하고 짜릿한 피를 영화계에 수혈해줄 것이다. 트랙터는 지금 멈추지 않는 아이디어로 가득한 여러 개의 두뇌를 동시에 굴리는 중이다.

3

1

2

1. <Chain of Fools>(2000)

트랙터의 첫 번째 장편영화. 아내와 별거 중인 이발사 크레스크(스티브 잔)는 손님으로 찾아온 에브넷(제프 골드블럼)이 신문에 실린 고대 금화 도둑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에브넷은 크레스크가 자신의 신분을 눈치챘다는 것을 알고 그를 죽이려하다가 바닥의 면도크림통을 밟고 넘어지면서 가위에 찔려 즉사하고, 여기에 여형사(샐마 헤이엑)와 암살자(엘리야 우드) 등이 꼬이면서 상황은 엉망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체인 오브 풀스>는 북미에서 극장상영하지 못하고 4년을 지하에서 잠자다가 DVD로 출시된 불운의 데뷔작이다.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영화사의 간섭으로 나중에는 손쓸 수 없을 만큼 망가져버렸다. 하나 세상에는 이 영화 말고도 생각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수천편의 영화가 있으니까….”

2. <Face of the Future : XELIBRI>(2002)

미래적인 디자인으로 유명한 지멘스사의 휴대폰 ‘젤리브리’를 위한 광고. 모든 사람의 얼굴이 똑같은 미래 세계, 한 청년이 공공장소에서 금지된 음악을 틀었다가 경찰과 시민들로부터 쫓긴다는 내용의 이 작품은 <Where’s Your Head At>처럼 트랙터가 좋아하는 ‘CG를 이용한 얼굴교체’ 기법의 절정을 보여준다. “얼굴을 바꾼다는 아이디어에 우리가 너무 매료되어 있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퍼스낼리티를 마음대로 섞는다는 발상이 좋다. 물론 <Where’s Your Head At> 때보다는 기술이 한층 발전해서 이 광고에서는 어떠한 기술적 흠집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3. <Die Another Day>(2002)

트랙터는 하얀 옷을 입은 마돈나와 검은 옷을 입은 마돈나가 서로에 대항해 싸운다는 컨셉을 정해놓고 촬영에 들어갔다. 하지만 가장 큰 걸림돌은 마돈나였다. “이야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는 직설적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며 노래하는 아티스트와 작업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점에서 마돈나는 정말 어려운 상대였다. 그녀는 모든 컨셉과 촬영을 통제하고 참견했기 때문에 우리가 만든 아이디어를 제대로 적용할 수가 없었고, 그녀의 요구대로 노래하고 춤추는 장면을 따로 찍어서 넣어야 했다. 나쁜 X(F*****G B***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