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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2001-08-07

김규항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지난해 말부터 혼자 밥지어먹으며 살고 있다. 한국춤을 하는 아내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전라도의 선생들에게 배우려,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된 김단은 이른바 서울권 초등학교를 피하려, 이도저도 아닌 김건은 제 엄마와 누나를 따라 전주로 내려갔다. 전주 변두리 초등학교의 소박하고 조용한 입학식 풍경이 내게 얼마간의 안도감을 주었다. 그 풍경엔 서울과 전주가 갖는 작지만 분명한 욕망의 차이가 담겨 있었다. 그 차이는 김단의 유년 시절이 가질 정신적 유익의 작지만 분명한 차이가 될 거였다.

입학식을 마치고 교실을 들러볼 즈음 안도감은 더 큰 낭패감과 겹쳐졌다. 1학년 교실은 모조리 벽이 터져 있었다. 이웃 교실들의 소리가 뒤섞여 선생의 말소리조차 알아듣기 어려운 이 괴상한 구조의 교실은 이해찬 교육부 장관 시절 ‘열린교육의 구현’으로 마련되었다 했다(하긴 운동권 이력을 팔아 장관까지 오르고는 대학 신입생들에게 운동하지 말라는 편지를 보낸 불안정한 인물이니 열린교육을 교실 벽을 트는 일로 구현했다 한들 이상할 거야 없겠다).

선생들은 대개 반대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배정된 교실 벽을 트기 위한 예산을 집행하지 않는 일은 더 어려웠다고 했다. 그리고 열린 식이든 닫힌 식이든 도무지 기본적인 수업진행이 어렵다는 게 판명된 오늘엔 다시 벽을 만드는 예산이 배정되지 않는다 했다. 저걸 교실이랍시고 드디어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는 기쁨에 겨워 앉은 김단과 그 동무들이 안쓰러웠다. 50대 중반인, 사람좋아보이는 김단의 담임선생이 겨우 저런 꼴을 만나려고 기나긴 파시즘의 시절을 아이들과 보냈을 걸 생각하니 참으로 기가 막혔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전교조 운동이라는 빛나는 역사가 있었음에도) 한국에서 학교가 여전히 군대와 더불어 국가의 야만이 가장 충실한 곳이라는 사실을 새삼 떠올렸다. 그리고 그런 국가의 야만을 유지하는 충실한 전위들 또한 여전히 무시 못할 만큼 남아 있다는 것도. “그이가 그렇게 돈을 밝히고 아이들을 차별한다 그래요.” 아내는 입학식 때 보았던 다른 반 담임선생을 떠올리며 말했다. “단이가 그 선생에게 안 걸린 게 다행이군. 그런데 그 반 아이들은 어째야 하지.” “단이도 결국 그런 선생을 만나게 되겠죠.”

불가항력적인 야만에 자식을 넘겨준 둘은 쓰게 웃었다. 나는 그제서야 내가 학교문제에 대해 적이 관념적이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내 자식이 대개의 아이들이 도리없이 처하는 야만을 피하게 해선 안 된다는 공정함을 생각했고, 그런 야만이란 단지 한국이라는 국가의 야만의 반영이며 아이가 결국 그런 야만 속에서 살게 될 거라면 사회성은 그 속에서 길러져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그 공정함이란 아비의 관념적인 정당함을 위해 아이를 방치하는 무책임일 수 있으며, 그 야만 속에서 길러지는 사회성이란 단지 아이의 정신만 돌이킬 수 없이 패게 하는 일일 수 있다. 그 사회성이란 남과 더불어 사는 지혜가 아닌 남을 물리치며 사는 비결일 테니 말이다.

아내와 나는 그런 야만과 싸울 구체적인 방안들을 준비하기로 했다. 학교의 야만을 학교 안에서 극복하는 방안을 알아보는 아내는 며칠 전 학교의 야만을 잘 알면서도 그걸 고치려 연대하기보다는 제 자식만 낫게 만들려 선생과 거래를 시도하는 부모들의 반동적 이기심이 또다른 문제라는 첫 번째 분석을 내놓았다. 학교의 야만을 학교의 바깥에서 극복하는 방안을 알아보던 나는 책장에 꼽아만 두었던 <민들레> 같은 탈학교 관련 자료들을 정독하는가 하면, 자주교육이나 홈스쿨링에 관한 외국의 이런저런 웹사이트들을 들락거리며 학교가 교육에 관한 여러 선택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확증해가고 있다.

둘은 그런 방안들이 실행되지 않기를 내심 바라지만, 언젠가 닥쳐올 피할 수 없는 전투를 위해 그렇게 준비중이다.김규항/ 출판인 gyuhang@mac.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