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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콩나물유나이티드

유토피아는 매혹적이지 않다. 적어도 나에게는. 엘리베이터나 계단 없이 1층에서 10층으로 훌쩍 옮겨갈 수 있으리라 희망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안토니아스 라인>의 아름다운 결말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허기지다 못해 허망해했던 기억도 그렇다. 끝내 이뤄낸 안토니아스의 공동체가 과연 나 같은 놈을 받아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별 부질없는 망상을 다 한다 싶었다. ‘능력에 따른 노동, 필요에 따른 분배’의 시스템을 만드는 것보다 더 불가능해 보였으니까.

‘콩나물’이라는 공동체가 있다. 콩나물 한명이 “나라고 만날 콩나물만 먹으란 법 있냐. 오늘은 스테이크 먹으러 간다”고 했던 데서 생겨난 이름이다. 풀어 말하면, 콩나물은 비슷한 계급의 술친구를 가리키고, 스테이크는 신분이 다른 동네를 지칭한다. 때맞고 뜻맞으면 되는 대로 모여 알코올을 나누는 만남이니 공동체라는 표현보다 준알코올중독자들의 그저 그런 친교라는 표현이 더 적확하긴 하다. 특별한 가입 절차나 탈퇴가 없음은 물론이다.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된 콩나물 잔치가 한두해 지나 알코올중독의 기미에 비례하는 어떤 밀도가 ‘어느덧’ 생겨났다. 공적인 일과 사적인 생활 속속을 시시콜콜 나누며 기쁨과 슬픔을 이리 밀어주고 저리 떠안고 하는 형국이 됐다. 지극히 개인적인 계획에도 그건 네가 행복해하지 않을 게 틀림없다며 과하다 싶게 개입하는 사례도 조금씩 늘었다. 어떨 때는 너 참 재수없다며 감정의 이빨을 드러내기도 한다. 여기까지는 친구라는 사교 방식을 닮았다.

콩나물에 이상한 풍경이 끼어들기 시작했다. 배우자에게 못 꺼내는 속내, 애인에게 보상받기 힘든 편안함, 서로에게 돈 못 써서 안달하는 경쟁이 빈번히 터져나왔다. 나이, 성, 결혼 같은 구획선들이 종종 무의미해졌다. 가령, 한 콩나물의 남편이 출장가면서 “그 남자 콩나물 집에 가서 편하게 자”라고 아내에게 친절히 일러주는 경우다. 이런저런 돈벌이 구상이나 가깝게 모여 사는 방법에 대해 아주 가끔 수다를 떨기도 한다. 그리고 주말이 되면 각자의 가정 혹은 독신의 공간으로 복귀한다.

서로를 원망하며 시들어가는 콩나물의 위험한 미래가 예감되기도 하지만, ‘어느덧’ 모종의 욕심이 머리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어떤 공동체에 대한 꿈이다. 코뮌은 아니다. 정신과 재산을 나누며 사는 (종교적) 공동체가 세계 곳곳에 있긴 한데 딱히 그것도 아니다. 굳이 사례를 들자면, 독일 68세대 몇몇이 슈투트가르트의 한 지붕 밑에서 30년 넘게 성공적으로 이뤄온 주거공동체가 아닐까 싶다. 석달전 <한겨레> 통신원은 그들의 목소리를 이렇게 전했다. “히피운동에 뿌리를 둔 코뮌은 성문제에 대해서 훨씬 개방적이었고, 재정문제에서도 평등이란 기치 아래 구분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주거공동체는 넓은 의미의 대가족과 같은 형태이지만, 대안적인 가족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재정문제도 공동지출 부분 외에는 각자 관리한다. 쇼핑을 대신 같이 가주는 정도의 역할 바꿈이 있긴 하지만, 섹스 파트너 바꿈과 같은 것은 아니다.” 공동육아 정도는 기본인데 그들은 그냥 어울려 산 거다. 각자의 가족과 재산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냉정히 따지면, 콩나물이 이들처럼 될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그렇지만 유토피아로 치워버리고 싶지 않으니 이따금 매혹의 상상을 누리고 있는 게 사실이다. 친구도 아닌, 연인도 아닌, 가족은 더더욱 아닌 것을 모종의 공동체로 소개하는 이유가 여깄다. 유사 유토피아에 대한 매혹의 느낌이 실재한다는 걸 많은 이들에게 ‘보고’하는 게 어쩐지 도리일 것 같았다. 혹시 알아? 콩나물유나이티드의 콩나물이즘 선언 같은 유령이 나타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