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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의 영화만들기 [3]
사진 이혜정이영진 2005-12-20

닥터 무비 - 카메라는 어린 영혼을 달래준다

11월24일, 마석 가구공단 한가운데 위치한 녹촌분교. 전교생을 다 합해봤자 20명이 채 되지 않는 자그마한 학교다. 비밀기지처럼 가파른 골목길 아래 숨겨진 이곳을 찾느라 가구공단 주변을 몇번이고 헤맬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 들어서자 외곽에선 보이지 않는 가구공장들이 층층이 모여서 연기를 뿜고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 녹촌분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부모들은 대개 가구공단에서 밤 늦게까지 일하는 이들이다. 그러다 보니 1학년이라고 해도 오전 수업만 하고 하교하지 않는다. 오후 느지막한 시간까지 학교에서 공부하고, 먹고, 놀고, 심지어 자기까지 한다. 이명원 분교장을 비롯해서 3명의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겐 부모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다.

정문 바로 앞에 있는 놀이방에 들어섰더니 귀부터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2편의 애니메이션을 본 아이들이 제각각 의견을 내놓느라 목청을 돋우기 시작해서다. 그중 한편이 나비효과에 관한 애니메이션이었다고 하는데 좀 어려워서인가. 보고 뭘 느꼈냐고 황보성진씨가 묻자 이해 못할 독특한 의견들이 폭죽처럼 터져나온다. 그중 압권은 성일의 것이다.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삼촌은 개그맨이에요. 왕따인 것도 같아. 우리 아빠랑 비슷한데.” 대개 6학년 정도의 아이들이라면 애니메이션이 반복해서 강조한 나비효과에 대한 설명을 어설프게나마 늘어놓을 텐데, 녹촌분교의 아이들은 좀 다르다. 자신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을 보고,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한다. 지나치게 솔직하다.

황보성진씨에게 성일은 속된 말로 요주의 대상이다. 언젠가 가족 소개를 한 적이 있었는데, 형과 동생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웃으면서 하는 걸 보고 그 뒤로 적지 않은 관심을 쏟았다는 황보성진씨는 “KFD(Kinetic Family Drawing)이라고, 가족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가족 안에서 대상자의 위치나 가족간의 상호작용을 파악하는 검사가 있어요. 그런데 성일의 그림을 보면 형제나 남매는 자주 등장하는데 아버지는 항상 없어요. 왜 그렇게 그렸냐고 물어봤더니 아버지는 항상 바빠서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성일만 그런 것은 아니다. “학생들 대개가 결손가정”이다.

그렇다고 동정의 시선이 필요한 건 아니다. 1학년인 동생 샤킬과 함께 녹촌분교에 다니는 산타를 보면 그렇다. 녹촌분교의 한 선생님은 “산타나 샤킬이 부족한 것 없는 아이들과 함께 큰 도시에서 학교를 다녔다면 결코 지금처럼 잘 적응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부족하기 때문에 서로 보듬는 법도 잘 안다는 뜻이리라. 실제로 산타는 중학교에 다닐 나이지만, 강제출국당한 아버지를 따라 방글라데시에 갔다가 3년 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탓에 아직 6학년이다. 한국어와 모국어에 능통해서 방글라데시 주부들을 대상으로 한 ‘닥터 무비’ 때는 통역까지 맡았다.

소란스럽지만 즐거운 토론이 끝나자, 갑자기 강사진들이 태도를 돌변한다. “떨어뜨리면 안 돼. 들이대도 안 돼. 머리 때려도 안 돼. 침 묻혀도 안 돼. 마이크 줄이 바닥에 끌려도 안 돼.” 카메라와 마이크를 다루기에 너무 어린 나이들이라 애초 교안에는 없었지만, “우리도 카메라 달라”는 성화가 빗발쳐 한두 차례 실습을 진행했고, “장난감이라도 하나 얻은 듯” 호응이 좋아 결국 추가로 촬영 실습을 마련하긴 했는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워낙 장난들이 심한 탓에 카메라를 내주기 전에 엄포부터 놓을 수밖에 없다. 총대를 멘 이은희씨는 초장에는 큰소리를 내더니 조를 짜기도 전에 서둘러 나가려는 아이들을 한명씩 붙잡고서 이번에는 “카메라 잘 부탁한다”고 간청한다. 이은희씨가 간청을 하는 동안 다른 쪽 팀 아이들은 마이크를 삼키는 시늉을 하면서 김영구씨를 골리고 있다.

이주노동자 여러분, 카메라로 놀아보아요

강사진이 던져준 이날 촬영 컨셉은 ‘TV섹션 녹촌분교’다. 평소 인터뷰하고 싶었던 이들을 잡고서 원하는 질문을 던지는 식이다. 연극캠프를 몇 차례 경험해서 그런지 카메라, 리포터, 사운드 등 역할 분담 시에도 별로 다툼이 없다. 재밌는 건 “공주라고 소문난” 오신행, 오신희 자매가 양쪽 팀의 리포터라는 사실이다. 어딜 가나 인기스타가 있는 법. 2팀으로 나뉜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3학년 박기찬부터 찾는다. 복도에서 샤킬과 함께 장난치고 있던 박기찬은 “뭐하는 거야?”라고 묻는 대신 형과 누나들의 급습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는 듯 당연스레 받아들인다.

언니보다 먼저 녹촌분교의 명물을 잡은 신희가 “커서 뭐가 되고 싶냐”는 질문부터 던진다. 녹촌분교 식구들이라면 기찬이 커서 “위대한 개그맨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박기찬은 “위대한 물리학자가 되겠다”고 예상 못한 답을 한다. 개인기를 끌어내려고 던진 질문인데, 뚱딴지같이 물리학자가 되겠다고 하니, 리포터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운 모양이다. 그걸 아는지 박기찬은 인터뷰 말미에 서비스로 자신의 장기를 보여주겠다며, “좋아 가는 거야!”라고 노홍철 흉내를 내더니, 한 차례 막춤을 선사한다. 동생에게 선수를 뺏긴 신행 팀은 1학년 이혜원을 물고늘어진다. “한달 간격으로 좋아하는 남자가 바뀌는” 스캔들 메이커 이혜원을 붙잡고 늘어지는데 정작 당사자는 어린이 신문 스크랩하느라 무반응이다.

“난 다음에 할게.” 서둘러 자리를 피한 분교장을 제외하곤 이미 한 차례씩 인터뷰를 행한 두팀은 결국 영진위 김영구씨에게로 카메라를 돌린다. 이번에도 연애에 관한 질문이다. “아니, 산타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함께 어울리는 동안 산타가 여러 번 호감을 표한 만큼 속시원히 답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리포터의 질문에 김영구씨는 “좋은 동생이라고 생각한다”면서 너털웃음을 짓는다. 한두번 놀림받은 것도 아닌데 산타의 까만 얼굴엔 홍조가 번진다. 황보성진씨는 “정해진 시나리오나 콘티대로 찍으면 별로 효과가 없어요. 함께 만들어가면서 순간순간 희열을 느끼는 거니까. 카메라를 들고 뭘 찍을까 하는 고민보다 카메라를 들고 어떻게 하면 재밌게 놀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더 중요한 거죠.”

이같은 충고는 비단 이주노동자나 저소득층 아이들의 영상교육에만 해당하는 건 아니다. 황보성진씨는 “한국의 영화교육만 하더라도 과정을 습득하기보다는 결과물을 내놓는 데만 너무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나”라고 반문한다. 강사진은 내년에는 마석 이외의 지역까지 영상을 통한 놀이문화를 펼쳐갈 계획이다. “이주노동자들뿐만 아니라 공부방, 교도소, 가출청소년 쉼터 등 아픔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좀더 적극적으로 다가가고 싶다.” 강사진의 이런저런 의욕을 전해듣다 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없다. 선배들의 계속되는 카메라 공습 때문에 하교 시간이 늦어진 저학년 아이들이 어둑해진 운동장을 가로질러 후문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