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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잭슨의 걸작 <킹콩> [3] - 프로덕션 과정 ①
박혜명 2005-12-26

공식은 똑같다. 축소 모형, 부분 모형세트, 그린스크린과 블루스크린을 준비한 다음 배우를 갖다놓고 이렇게저렇게 찍어서 CG와 합성한다. <킹콩>의 프로덕션 노트도 그 익숙한 테크놀로지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나 그 안에서 피터 잭슨의 <킹콩>에 대한 비전을 엿볼 수 있다면 동어반복을 조금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반지의 제왕>을 통해 교훈을 얻었다. 판타지란 리얼리즘을 통해 구현됐을 때 가장 뛰어난 이야기가 된다는 사실 말이다. 관객과 캐릭터 모두 그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충실히 믿을 수 있을 때 가장 좋은 판타지영화가 된다.” 이 노트가 잭슨이 말한 ‘리얼리즘’의 한 도구로서 프로덕션을 이해하게 하는 작은 가이드북이길 바란다.

1. 뉴욕시

수증기 만들려고 땅 파고 배수관 묻고

<킹콩>의 오프닝 시퀀스가 감탄을 주는 이유 중 하나는 1930년대 뉴욕에 관한 디테일 때문이다. 빽빽한 자동차들과 뉴욕 시민을 보여주는 데 이어 다양한 클로즈업이 앤 대로우의 공연 장면과 교차편집되면서 공황기로 신음하던 미국 최대 도시의 디테일을 담는다. 길거리에서 과일을 사는 사람, 자잘한 세일 문구가 붙은 상점, 배수관에서 뿜어 올라오는 수증기, 무단 횡단자를 앞지르는 난폭한 택시까지 관객의 두뇌 용량을 초과하는 정보들이 쏟아진다.

뉴욕은 웰링턴 벡 밸리에 지어졌다. 컨셉추얼 아티스트 제레미 베넷과 거스 헌터가 그린 아트워크를 기초로 프로덕션디자이너 그랜트 메이저와 슈퍼바이징 아트디렉터 댄 헤나를 비롯한 미술팀과 세트 제작팀이 뉴욕시 건설에 착수했다. 2276제곱미터 세트 안에 4*3블록으로 타임스스퀘어와 해롤드스퀘어를 포함해 5번가, 44번가 등 뉴욕의 주요 거리를 지었다. 자료사진 검토 중에 발견한 광고 문구, “고무로 된 뉴 왓슨 고무 누수 방지제”, 국가재건단체 NRA 포스터, 당시의 신문과 엽서 등으로 건물을 장식하고 푸줏간에는 곰팡이 핀 동물 시체와 볏도 떼지 않은 닭을 걸었다. 싸구려 가게는 진열장을 잡다하게, 고급 가게는 진열장을 간단하게 만들고, 레스토랑 안에는 재떨이 안에 담배 꽁초를 놓아두었으며, 당시 뉴욕시의 인구 수와 인종, 성별, 나이 분포 등을 조사해 그에 맞춰 엑스트라를 배치했다. 뉴욕 세트는 디테일의 결정체다.

경이로운 제작과정의 절정은 뉴욕의 하수구에서 뿜어져나오는 수증기다. 런던의 안개처럼 뉴욕의 클리셰와 같은 수증기를 묘사하기 위해 세트 제작팀은 벡 밸리 벌판에 콘크리트를 붓고 타르를 깔기 전에 배수관을 묻을 땅과 하수구를 먼저 팠다. 총 1.5∼2km 길이에 달하는 파이프를 30cm 땅속에 묻고, 수증기 방출을 조절하기 위한 배전관을 9군데에 설치한 다음, 보일러로 물을 끓여 얻어진 수증기를 42개의 방출구로 내보냈다. 방출구 대부분은 도로변 하수구로 연결되며 일부는 맨홀과 연결돼 있다. 어떤 수증기는 지하철 구간과 연결된 대형 방출구에서 솟아져나온다. 잭슨의 뉴욕은 25일 만에 지어졌다.

<킹콩>의 뉴욕은 영화에서 상반된 두 얼굴을 갖는다. 전반부의 뉴욕은 타임스스퀘어를 중심으로 빈민 거리까지 포함하고 있어 칙칙하고 지저분한 데 반해 후반부의 뉴욕은 브로드웨이와 해롤드스퀘어를 중심으로 화려한 번화가의 모습이다. 이 후반부 세트는 아깝게도(!) 타임스스퀘어 세트를 철거한 자리 위에 지어졌는데, 효율적인 작업을 위해 간판이나 차양 등 최소부분만 교체하면서 총포상, 약국 등을 고급 상점과 극장으로 바꿔나갔다. 지상 계단을 세워놓음으로써 해롤드스퀘어 전철역도 표현하고 있다. 작은 건물벽에 여배우들의 흑백 사진까지 붙여놓은 <킹콩>의 뉴욕은 어찌 보면 원작이 만들어진 그 시대 자체에 대한 경의의 표시같기도 하다.

2. 해골섬 입구

미니어처 수가 <왕의 귀환>보다 2배 더

잭슨이 뉴질랜드 로케이션을 적극 활용해 찍은 <반지의 제왕>은 캐릭터에 관련된 미술만으로도 탈역사적인 시공간이 어느 정도 설명되는 판타지다. 반면 현대의 인물들이 과학적으로 설명 불가능한 원시 문명과 생명체를 만나는 <킹콩>은 공간이 그 자체로 판타지의 힘을 가질 필요가 있다. <킹콩>에서 해골섬은 그 판타지의 핵과 같은 공간이다. “현실의 어떤 장소와도 같지 않은 독특하고 환상적인 공간”으로 해골섬이 보여지기를 바란 피터 잭슨은 일찌감치 미니어처와 세트 촬영 위주로 가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킹콩>의 미니어처 제작팀과 촬영팀은 메인 촬영팀이 촬영 100일째를 세고 있을 때 이미 200일째를 세고 있었고, 공식 촬영 종료 이후에도 최소 2개월의 촬영기간을 남겨두고 있었다. <킹콩>에 동원된 각종 미니어처를 모두 합치면 그 수가 2500여개에 달하는데, 이는 <반지의 제왕> 3부작에 사용된 미니어처 수보다 2배 많다.

칼 덴햄 일행이 가장 처음 맞닥뜨리는 해골섬의 암벽은 인공 바위를 쌓아 만든 야외 세트다. 스크린상으로는 인공 질감을 전혀 느낄 수 없다. 댄 헤나의 미술팀은 산에서 진짜 암석을 가져다가 주형틀 삼아 스펀지 고무로 암석을 만들거나 스티로폼 소재를 깎아 콘크리트를 뿌려 암석을 만들었다. 밍위밍위라는 이름의 넝쿨풀과 각종 이끼, 잡풀들을 가져다 가짜 암석 주변에 심고 오래된 뼈들을 만들어 늘여놓은 뒤 물까지 뿌려주고 나면 잭슨의 의도는 베넷의 아트워크를 거쳐 물리적으로 빈틈없이 현실화된다.

칼 덴햄 일행이 해골섬으로 들어가는 장면의 하이라이트는 이들을 위협하는 원주민들의 묘사다. 촬영과 미술, 연기지도 등을 통해 잭슨은 해골섬의 원주민들을 <지옥의 묵시록>의 그것만큼이나 음산하고 광기어린 존재들로 표현하고 있다. “나는 해골섬의 원주민들이 암벽 너머의 두려운 존재 때문에 완전히 미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해골섬의 문명은 뉴기니, 르완다, 사모아, 에티오피아 등지의 30여개 부족집단 사진을 5천장 이상 뜯어보면서 구상한 것이다.

3. 해골섬 정글

고사리만 1년2개월 키웠다니

킹콩에게 붙잡혀간 앤 대로우를 찾기 위해 칼 덴햄 일행이 해골섬 깊숙이 들어섰을 때, 그들을 둘러싼 원시우림은 육중한 생명력으로 살아숨쉬는 듯 보인다. 잭슨은 이 장면을 처음 시각화한 베넷과 헌터의 아트워크를 굉장히 맘에 들어했다. 자욱한 안개에 뒤섞인 습기, 기괴하게 뒤틀려 자란 굵은 나무들, 숲 전체에 사납게 엉겨붙은 넝쿨, 화려하면서도 탁한 색조가 한데 어우러진 공간은 여지없이 미니어처와 모형 세트만으로 촬영됐다.

웨타 워크숍의 시각효과 슈퍼바이저 알렉스 펑키에 따르면 잭슨은 <반지의 제왕: 두개의 탑> 때 미니어처로 만들어 풀 사이즈로 촬영한 팡고른 숲의 나무들이 하나같이 꼼짝않고 있는 것에 실망했다고 한다. “해골섬 정글에는 움직임을 넣어 촬영해달라”고 잭슨은 당부했다. <킹콩>의 정글 미니어처는 1/20 축소모형이다. 미니어처 제작팀 스탭이 1년2개월 동안 키운 고사리들과 플라스틱 재질의 모형 나무들로 이뤄진 이 작은 원시우림에 펑키는 바람을 쏘여 촬영해봤다. 움직이긴 하는데, 좀 야단스러웠다. 해골섬의 생명력은 결국 이파리 하나하나에 아주 작은 납덩이를 달아서 고속 촬영한 결과 얻어졌다. 원시림의 알 수 없는 깊이를 표현하는 겹겹의 배경은 CG가 메우고 있다.

배우의 몸이 닿는 부분은 부분 모형 세트를 실내 스튜디오 안에 지어 촬영했다. 해골섬 암벽과 성벽, 원주민 마을을 지었던 것과 마찬가지 방법으로 나무 한 그루에서 이끼, 돌, 모래, 가지 한줄까지 다 만들어야 했다. 웨타 워크숍이 제작해 들고 온 원시림의 식물들은 ‘모형’(miniature)이라 부르기에 너무 거대했다. 고사리를 키운 스탭이 농담삼아 이렇게 말했다. “<반지의 제왕> 때부터 우리끼리 하는 말이 있어요. 빅어처(biggature)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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