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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나의 베스트 초이스 [2]
2005-12-31

Speed light Transmitter ST-E2 _서지형(사진팀)

잡지라는 매체를 처음 시작하면서 35mm 디지털카메라에 대한 많은 노하우를 하나씩 익혔다. 그중 소형 스트로보(플래시)의 여러 가지 활용법을 접하게 되었다. 처음엔 트랜스미터(보통 동조기라고 많이 말한다)란 것을 알지도 못한 채 지난 1년간 불편을 느끼지 않고 많은 사진들을 찍었는데 주변 사람들이 이 비상한 물건을 추천한 뒤로, 이제는 나에게는 없어서는 안되는 분신이 되었다. 이놈을 설명하자면, 종전 선(싱크로)을 이용해 이래저래 불편했던 소형 스트로보를 무선화하여 편리함과 여러 가지 표현이 가능해지게 만든 기특한 놈이다. 이놈을 나는 무엇보다도 더 감사히 여기게 되었다. 최대거리 15m까지 다양한 각도에서 원하는 라이팅을 선보일 때 어떤 인물도 이놈 하나로 다 해결되는 듯싶다. 여러 사진 장비들이 있지만 잡지에서 요구하는 순발력과 타이밍을 절묘하게 맞추고 간편하게 들고 다닐 수 있는 이물건으로 인해 난 더없이 자신있는 사진을 만들수 있을 것이다. 내 사진에 힘이 되어준 이놈을 올해 나만의 아이템으로 적극 추천한다.

랠프 깁슨 사진엽서 _손홍주(사진)

한달간의 긴 휴가를 마친 12월. 어색한 기분, 야릇한 분위기 등등을 넘어서는, 그러니까 오랜 잠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온 환자처럼 출근을 시작한다. 휴가 기간의 게으름을 원망하며 현실을 뛰어넘는 이미지가 필요했다. 이미지의 목마름은 이미지로 풀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찾은 인사동에서 현존하는 사진예술계의 거장이라는 랠프 깁슨(1939∼, 미국 LA 출생)을 만났다. 그는 일상적인 문제, 꿈, 욕망과 같은 무의식적이고 불확실한 현실의 추상적인 문제를 사진의 대상으로 삼아 간결하고 대담하며, 신비감이 넘치는 이미지를 창출해낸다. 내 눈에는 극히 평범해 보이는 일상을 그는 아주 낯선 이미지로 만들어버렸다. 그 이미지가 복사된 엽서들이 어느새 손에 들려 있다. 이런 거장과 같은 시대를 산다는 것과 같은 사진의 길을 간다는 것만으로 가슴 벅차다. 지금 책상 옆에 핀으로 고정된 그의 팸플릿이 나를 상상하게 만든다. 모호하고 기이한 세계, 혼돈의 순간을 냉정하게 제시하는 이미지들과 함께하고 있는 나를.

돼지저금통 _심은하(편집)

장지갑을 쓰는 나에게 동전은 골칫거리다. 동전지갑을 따로 쓰고 있기는 하지만 일주일 지나면 동전 한개 더 넣기가 난감이다. 그럴 때마다 은행원인 동생을 괴롭힌다. 지폐로 교환해달라고. 그럼 대략 3천원 정도가 들어온다. 하지만 그 돈 어디 갔지? 지갑이 샌다더니…. 그래서 올해는 돼지 한 마리를 키웠다. 방 안에서. 키운 지 넉달 만인 지난 주말, 연말이기도 하고(아무래도 돈 쓸 일이), 저금통 배가 묵직하기도 한 게, 배 밑을 열었다. 아니 어느새 먹기도 많이 먹었지, 글쎄 30만원이 넘는다. 복권 당첨 된 기분이 이럴까. 이사를 앞두고 있는 나에게 빨간 돼지가 행복한 고민을 던진다. “돼지야 가자… 쇼핑몰로.” 그거 아세요? (TV에서 봤다) 이놈이 500원만 꽉 채워 먹으면 몇 백만원도 먹는다는 사실. 새해를 10여일 앞두고 다시 한번 깨닫는다. “그래 이런 작은 행복도 있어, 우리 너무 안달하며 살지말자”

주방용 TV폰 라디오 _오계옥(사진)

기분좋게 밥 먹고 온통 어질러져 있는 식탁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아휴, 저것들을 다 어떡하지….” 평소 하기 싫은 일은 차라리 그 일을 즐기자는 신조를 부르짖곤 하는 나는 용감하게 팔을 걷어붙이고 싱크대로 돌진한다. 그리고 찬장 밑에 앙증맞게 달려 있는 TV버튼을 살짝 눌러준다. 나는 시선을 TV 화면에 고정시키고 가끔 대충 그릇들을 살펴가며 유유히 설거지를 한다. 아무리 힘든 설거지도 후딱 해치워진다. 어디 그뿐인가. 부엌일 하는 중에 걸려오는 전화나 현관의 방문객도 버튼 조작으로 바∼로 해결할 수 있다. 간혹 설거지가 다 끝났는데도 재미있는 드라마 보느라 시간가는 줄 모를 때도 있다는 점이 단 하나의 흠이라면 흠일까. 내겐 너무 고마운 친구다.

운명의 운동화, 두 켤레 _오정연(취재)

철마다 바꿔야 하는 길거리표 운동화에 지친 2003년. 처음으로 메이커 운동화를 장만했다. 그리고 1년 평균 300일 내내 신어댄 끝에 그 운동화는 올 여름 해외 출장 중 전사했다. 그런데 그 급박한 순간 망설임 없이 집어든 그놈(?쪽). 가격은 전과 비슷했지만, 이번엔 뭔가 달랐다. 신삥답지 않은 투박함과 낡은 편안함 때문인지, 신을수록 내 마음은 애틋해졌고 하루가 다르게 노쇠해지는 그놈의 허약함이 안타까웠다. 아무리 좋은 운동화도 두 켤레를 번갈아 신어줘야 한다는 조언이 줄을 이었지만, 쇼윈도의 화려한 운동화 중 그 어떤 것도, 내 운명은 아니었다. 그러나 간절히 기다리면 인연도 찾아온다. 때늦은 휴갓길에 두 번째 운동화를 만났다. 맘에 꼭 드는 동행인을 매일같이 고르는 재미까지 더해졌다. 누구에게나 첫눈에 인연을 알아볼 수 있는 자신만의 운동화가 있다. 그렇게 만난 운동화와 함께하는 일상은, 좋은 음악과 함께하는 출퇴근길과 같다. 중요한 건 그것을 누리는 내 마음이 든든하다는 사실이다.

<개는 말할 것도 없고> _이다혜(취재)

나는 런던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밤중의 싱가포르 창이공항은 환승을 기다리는 사람이 늘면서 낮보다 활기를 띠었다. 비행기를 타려면 7시간을 더 기다려야 하는데 아이팟은 알 수 없는 이유로 고장나 나를 열받게 했고, 흡연구역은 너무 멀어 불안초조갑갑증을 심화시켰으며, 고가의 선글라스를 공항 어디에서 분실했다는 사실은 나는 딱 울고 싶은 상태로 몰아넣었다. 여행에 관한 의욕을 지하 3천m 천연 암반수 근처에 처박은 채 <개는 말할 것도 없고>를 꺼내들었다. 모험과 수수께끼와 스릴과 로맨스가 있는 수다스런 시간여행 소설. 그로부터 7시간 동안 나는 너무 자주 소리내어 크게 웃었다. 사랑은 어쩌면, (주인공들이 무리한 시간여행의 후유증으로 겪는) 시차증후군 같은 걸지도 모른다. “넌 빠져 죽으면 안 돼! 들려? 널 구하려고 온 우주를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는데 죽을 수 있겠어?” 내가 우울했던 진짜 이유가 아이팟도, 선글라스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올해 읽은 가장 매력적인 책 중 한권.

에스프레소 머신 _이성욱(취재)

악몽의 고교 시절, 달고 쓴 자판기 커피는 큰 위로가 됐다. 대학 시절, 술에 취해 밤거리를 걷다 자판기를 마주치면 반가워서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백수 시절, 방구석에 처박혀 소설과 담배와 커피를 동시에 즐길 때,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됐으면, 하고 바라곤 했다. 기자 초년병 시절, 노트북 옆에 커피를 놔두면 마감에 쫓기는 마음이 조금은 진정됐다. 그러다 툭 나타난 카페라떼라는 신상품은 원두커피의 안락함에 젖어 있던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저 거대한 에스프레소 기계를 집에 들여놓을 수 없다는 좌절감…. 마침내 적당히 사치스런 에스프레소 기계를 장만했다. 홀로 보내는 주말, 카페라떼 한잔으로 시작해 진한 에스프레소, 연한 아메리카노를 번갈아 만들어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기계 옆 원통에 든 알록달록한 캡슐이 이 기계에 맞춤해 나온 에스프레소다. 1년치 캡슐값이 기계값과 맞먹는다. 좀 심란하지만 기계를 썩힐 순 없다는 심정으로 오늘도 마시고 또 마신다.

포익틀랜더 베사 R2A _이영진(취재)

“추워 죽겠는데 한밤중에 이게 무슨 생쇼야. 먹다 남은 사과는 쓰레기통에 버릴 것이지, 왜 내 옆에 뒀담. 어라,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그림자 만든다고 꼴값을 하네 그려. 푹신한 담요라도 한장 깔아줬으면 내가 이런 악담 안 하지. 요즘은 뒤도 안 닦는 신문지를 깔아놓고 엄동설한을 견디라니. 말이 나와서 말인데. 비장의 아이템, 좋아하시네. 카메라의 기본도 모르는 놈이. 수백만원씩 들여서 DSLR을 살 때 알아봤어야 한다니까. 후배 돈 빌려서, 돌려받은 보증금 축내가며, 렌즈 ‘뽐뿌질’하더니. 이제는 기본을 알아야 한다며 필름카메라까지 욕심을 뻗쳐? 사실 네놈이 사고 싶어했던 건 라이카 M3잖아.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썼다던. 여력이 안 되니까 렌즈 호환되고, 대신 값은 1/6밖에 안 되는 날 선택한 것도 맘에 안 든다고. 첫날만 해도 그래. 필름도 제대로 끼워넣지 못해서 내 배를 열어놓고 얼마나 헤맸냐고. 사람 배 가르고선 갑자기 나라 고민하는 한심한 의사랑 똑같은 거지. 게다가 겁먹고선 아직 필름 한통도 못 썼잖아. 에라, 한심한 놈아. 내년까지도 이렇게 무시할 거면, 정말이지 내 발로 떠난다”라고 R2A는 말하고 싶을 거다.

만년필 _정한석(취재)

글씨를 굉장히 못 쓰는 편이다. 그냥 못 쓰는 게 아니라 남들은 아예 못 알아볼 정도로 못 쓰고, 쓰고 나서도 쓴 내가 못 알아보는 글자가 있을 정도로 못 쓴다. 대학 때는 이걸 글씨라고 써 온 거냐며 혼나고 휴학계를 다시 써간 적도 있고, H 전 편집장에게는 “어떻게 10살 먹은 내 딸보다 더 못 쓰냐”고 구박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글씨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허리를 잡고 웃을 일이지만… 나는 필기감을 꽤 중요하게 여긴다. 올해 초쯤 ‘공짜로’ 싼 만년필이 하나 생겼는데, 집에서 메모를 할 때만 아껴 쓴다. 그런데 쓸수록 왠지 글씨가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착각에 흡족하다(아직까지 아무도 그런 소리를 하지는 않고 있다). 게다가 그 필기감 때문에 자꾸 뭔가 쓰고 싶어진다는 거다. 그리고 그렇게 자꾸 쓰다보면 생각도 쓸 만하게 나아지지 않을까 하면서 기분도 조금 나아진다. 말하자면, 똑같은 만년필을 사라는 게 아니다(내가 왜 쇼 호스트를 해야 돼?). 이 만년필은 실은 은유다. 그냥 이런 사소한 긍정을 심어줄 만한 아무 거나 내년에는 당신이 지정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로모와 블루 _최호경(사진)

비장의 아이템으로 로모를 할까, 블루를 할까 고민 중이었더랬다 . 그런데 녀석 어찌 내 맘을 알고 로모를 찍고 있는데, 슬금슬금 다가오더니 털썩 자리를 잡고 앉아버리는 게 아닌가! ^^* 그리하여 나의 비장의 아이템은 ‘로모+블루’가 되었다. 나의 반복되는 일상에 활력이 된다는 점에서 두 녀석은 나의 정말 비장의 아이템이다. 똑딱이 디카를 휴대폰처럼 들고 다니긴 하지만,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고 싶을 때, 혹은 어딘가로 떠나게 되는 순간 0순위인 나의 오랜 친구 로모(녀석은 내가 가는 모든 여행을 함께했다)와 퇴근 뒤의 지친 나에게 작은 웃음과 활력을 주는 냐옹이 블루(아, 이런 소소한 즐거움은 냐옹 동지들만 이 알겠지만!). 단조로운 일상에서 자그마한 재미를 갖고 싶다면, 토이카메라와 냐옹이를 강력 추천한다. : )

글 <씨네21>(가나다 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