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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선 여성들 [2]

YH 여공들의 대선배

최초의 여성노동 운동가 강주룡(?∼1932)

평양 명승 을밀대 옥상에 체공녀가 돌현하엿다.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 지붕우에 올라왓습니다. 나는 평원고무사장이 앞에 와서 임금감하의 선언을 취소하기까지는 결코 내려가지 않겟습니다. 끝까지 임금감하를 취소치 않으면 (중략) 노동대중을 대표하야 죽음을 명예로 알 뿐입니다. 그러하고 여러분, 구타야 나를 여기서(집웅) 강제로 끄러내릴 생각은 마십시오. 누구든지 이 집붕우에 사닥다리를 대놓기만 하면 나는 곳 떠러져 죽을 뿐입니다.”(<동광> 1931. 7)

평양의 명물이라는 정자 을밀대에 야밤을 틈타 올라선 이 ‘체공녀’는 새벽이 밝자 산보를 나온 100여명의 사람들 앞에서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회사쪽의 일방적인 임금인하 통고에 맞서 파업을 감행했으나 일본 경찰에 의해 공장에서 쫓겨났으며, 이대로 지고 만다면 전염병 퍼지듯 평양지역 고무공장 전체 노동자들의 임금인하가 시작되리라는 것이다.

1920년경부터 평양 일대에는 고무신 공업이 발달하는데 조선인끼리의 출혈경쟁으로 이윤을 확보하려 했다. 고무신을 싸게 파는 대신 노동자들의 임금을 조금이라도 더 깎아 손해를 메우려는 식의 계산법으로 인해 12시간이 넘는 장시간의 노동, 남자 감독관의 욕설과 구타, 성희롱을 참아 넘기면서도 남성노동자들 반에 못 미치는 임금이 고작 여성노동자들에게 돌아오는 대가였다. 근대 산업사회의 요구로 직업전선에 뛰어들기 시작한 여성들의 노동은 무시당하고 착취당했다.

강주룡은 을밀대 위에서 9시간 동안을 목청 높여 소리치다가 결국 끌려내려와 평양경찰서에 체포되었고 단식으로 농성 방법을 전환하였다. ‘여류투사 강여사’, ‘평양의 히로인’식의 호응과 함께 평원고무공장 파업은 여론의 주목을 받게 되고 일반 대중의 응원과 함께 투쟁은 탄력을 받기 시작한다. 강주룡도 76시간 단식 뒤에 풀려나 동무들의 시위에 동참했고, 극적으로 임금인하를 막아낸다. 하지만 강주룡과 강경파 스무명은 해고를 당했고, 그는 유치장에서 다시 57시간 단식을 벌이면서 ‘극심한 신경쇠약과 소화불량’이라는 후유증을 얻는다.

‘여성사’에서뿐만 아니라 한국 노동사에서도 최초로 기록될 강주룡의 고공농성은, 결국 그의 목숨을 대가로 끝을 맺는다. 다음해 8월 평양 서성리 빈민굴에서 숨을 거둔 것이다.

천재이자 천사였던 의사선생님

최초의 여성의사 박에스더(1877∼1910)

그의 본명은 김점동이다. 그는 수재였다. 아버지를 졸라 이화학당에서 공부를 시작하면서 무엇이든 남보다 빨랐다. 특히 영어는 ‘천재적’이라는 소리를 듣곤 했다. 결국 1890년 우리나라에서 의료사업을 개설한 닥터 홀의 영어통역을 맡게 되면서 미국 유학의 길이 열리고 학교와 부모를 통해 정한 신랑 박유산과 혼인 뒤 미국으로 건너간다.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하여 천문학, 의학을 전공했고 그 사이에 그의 남편 박씨는 농장일과 식당 서빙일 등 막일을 불사하며 아내의 공부 뒷바라지를 했다. 하지만 그는 박에스더의 졸업 3주 전 뇌일혈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귀국한 그는 이화학당 병원을 거쳐 평양 기홀병원에서 일한다. 그가 복부 수술을 할 때 배를 갈랐다가 꿰매는 것을 보고는 귀신이 재주를 부린다고 할 정도로 그의 기술은 당시 선진적이었다. 하지만, 청진기 하나 들고 각 고을을 돌고, 맹아학교, 간호학교 등을 설립하느라 몸 돌볼 틈이 없던 그는 영양실조와 폐침윤에 걸려 투병하다가 세상을 뜬다. 사회사업으로 세상을 떠난 ‘최초’의 여성이기도 하다.

근대, 새로운 연애의 시대

근대화 최강의 발명품 ‘연애’, 그리고 그 세 가지 변주

‘연애’ 이전 우리 말에는 ‘남녀간의 사랑’만을 따로 지칭하는 용어가 없었다. ‘사랑’이야 신과도 하고 나라님과도 하고 아우하고도, 부모하고도 할 수 있는 것이나 ‘연애’라면 오직 에스트로겐과 안드로겐 간(間)으로 국한되니 말이다. 1910년 넘어서서야 첫 형상이 발견되는 이 단어는 근대화의 숱한 단어와 개념어들 사이에서 치열한 경쟁을 뚫고 적자생존하게 되었으니 급기야, 1920년대 한반도를 열병처럼 휩쓸기에 이른다. 모던 걸, 모던 보이들은 연애로 동반 자살하고, 사상적 동지로 결합하고, 치정 문제로 소송을 제기하고, 자주 파멸한다. 이때, 연애는 발빠르게 도시화되고 있는 근대 경성 뒷골목 풍경에서 서로를 유혹하려는 암컷과 수컷의 몸부림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근대의 여성들은 극소수이지만 자신의 ‘포스’를 극력 피력하기 시작했고, 자주 ‘자유연애’란 ‘여성 해방’의 주요 실천 덕목이었다. 그러니까, 연애란 여성이라는 인류사 단역이 주연급으로 등장하기 위해 마련된 근대편 갈등의 단서다.

이 당시 연애에 관한 다른 단면들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연애의 시대> 저자 권보드래의 말처럼 “삶이 달라졌는데도, 감정과 사상이 달라졌는데도, 1920년대 초반을 지배했던 ‘연애’를 대치할 만한 사랑의 새로운 담론은 등장하지 않았”음이 몹시 아쉽기 때문이다.

연애 변주 1-이혼

나혜석이 그린 <인형의 집>삽화

“노라를 노아라/ 최후로 순순하게/ 엄밀(嚴密)히 막어논/ 장벽(障壁)에서/ 견고(堅固)히 닷첫든/ 문(門)을 열고/ 노라를 노와쥬게.” - 1921년 4월3일 입센의 <인형의 집> 마지막 번역회에 덧붙인 나혜석의 시(詩) 중

연극 <인형의 집>은 주인공 노라가 남편과 가정의 틀에 박힌 안위를 박차고 나가 자신을 찾는다는 여성 해방적 메시지로 당대 논자들을 흥분시켰다. ‘노라’는 해방을 부르짖는 여성의 대명사였다가 뒤에는 이혼한 여성을 야유하는 상징으로 변용되는데, 나혜석에게도 그 꼬리표가 붙어다녔다.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 - <삼천리> 1935년 2월호

최린과의 연애로 이혼당한 나혜석은 정조 유린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를 최린 앞으로 내고 <이혼 고백장>을 잡지에 발표한다. 윗글은 일파만파로 번졌던 사건의 소요가 마무리된 뒤 파리 유학을 결심하면서 정리한 나혜석의 글이다. 결국 그는 멀리 가지 못하고 행려병자로 젊은 나이에 양로원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한다. 집을 떠난 노라가 갈 곳은 창녀촌이거나 다시 집밖에 없다는 루쉰의 말이 적나라하다.

연애 변주 2-붉은 연애

1930년대에 들어서면 개인적, 향락적 색채가 짙었던 연애관을 비판하며 콜론타이의 소설 <적련>(붉은 연애)이 소개된다. 1920년대 후반 사회주의 단체가 결성되고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면서 ‘연애’에 있어서도 그것의 사회적 기능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연애가 비록 사적일지언정, 연애로 인해 얻어지는 용기와 능력이 사회진보를 위해 공헌한다는 것.

하나 붉은 연애까지는 아니더라도 송계월 기자처럼 남성 태반의 장에 진출한 여성들이 남성들과 맺고자 했던 동지적 관계는 각종 가십성 소문으로 전락했고, 6·10만세 사건의 주인공 김단야와 남로당 총책 박헌영, 그리고 주세죽 사이의 붉은 연애조차도 남성 편력에 의해서만 재단되기 일쑤였다.

연애 변주 3-동성애

1931년 4월8일 영등포역 달려오는 기차에 차례로 몸을 던진 여학생들이 있었으니 하나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 홍석후의 21살된 딸 홍옥임이었고, 또 한 사람은 종로 덕흥서림 주인 김동진의 시집간 딸 김용주였다. 이들은 이미 ‘서로 떨어져 살 수 없는 동성의 애인’ 사이였다는데, 별난 것은 이 둘의 동성애에 관한 사회의 너그러운 시선이다.

당시에는 동성애를 성욕과 관련이 없는 한은 정서발달이나 괜한 남녀간의 풋사랑에 빠지지 않도록 돕는 안전장치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집에만 있던 여성들이 학교에 나와 교육받기 시작하면서 그들 사이에는 ‘사귐’이라는 최초의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던 것인데, 함께 행동하고 비밀을 공유하면서 ‘연대감’을 이루어갔고 그칠 줄 모르는 수다는 자신들의 억압기재가 무엇인지 토로하는 장이기도 했다. 물론, 사회적으로는 이들이 무사히 잘 성장해 본연의 이성애로 돌아서도록 타이르기를 잊지 않았지만, 1930년 잡지 <별건곤>에는 <여류 명사들의 동성연애기>라는 제목의 기사가 게재되어 있을 정도로 공공연했다.

주요 참고 자료: <여성을 넘어 아낙의 너울을 벗고>(최은희, 문이재) <20세기 여성 사건사>(길밖세상, 여성신문사) <연애의 시대>(권보드래, 현실문화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