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스포트라이트
파이란, 비극의 왕비가 되다, <무극>의 장백지
김수경 2006-01-31

해맑은 얼굴과 어눌한 목소리로 끝내 강재를 울려버린 파이란이 있었다. 그녀가 저주받은 운명의 왕비가 되어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무극>의 여주인공 칭청이 성곽 위에서 외투를 벗어 발아래로 내던진다. 꽃잎처럼 나부끼며 내려오는 옷자락에 눈을 떼지 못하는 수천의 군사들은 넋이 나간 채 고개를 조아린다. 군사들이 물러나면 한 꺼풀 더 벗겠다며 도발하는 장백지의 자태는 눈부시다. 목요일 이른 아침 <무극>의 홍보를 위해 한국을 찾은 장백지를 호텔 라운지에서 만났다. 하늘거리는 하늘색 드레스 차림으로 나타난 1980년생 장백지는 씩씩하게 악수를 청하며 한국어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한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유년기를 보낸 뒤 홍콩으로 건너온 열여덟살의 소녀는 레몬티 광고를 통해 “1주일 만에 홍콩 사람 대부분이 알아보는 모델”로 스타덤에 올랐다. 8년의 세월이 흐르고 그 소녀는 영화만 40편 넘게 출연한 베테랑으로 자랐다. 장백지는 <희극지왕>으로 데뷔해 <성원> <촉산전> <소림축구> 등을 거쳐 홍콩의 간판 여배우로 도약했고, 여섯장의 정규 음반을 히트시킨 다재다능한 엔터테이너다.

이렇게 즐거운 20대를 만끽하던 장백지에게 2003년은 충격의 한해였다. 데뷔 때부터 그를 누구보다도 아껴주던 선배 장국영과 매염방의 연이은 죽음은 그녀의 인생관에 큰 영향을 끼쳤다. “나에게도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매 순간에 충실하자고 다짐한다”는 그녀의 신조는 이 무렵에 생겨났다. “돈을 벌고 독립하자”는 이유로 연기를 시작했던 초년병은 “자신도 감동시키지 못한다면 관객은 절대 감동시킬 수 없다”는 기준으로 후배에게 말을 건네는 고참으로 변했다. “생전처음 촬영에만 반년을 투자했고 스탭들과 가장 강한 결속감을 느낀” <무극>을 선택한 것도 그러한 심경 변화의 결과이다. “촬영 기간 내내 편벽한 지방만 돌아다녔지만, 제일 힘들었던 건 각자의 스케줄을 끝내고 현장을 떠나는 동료 배우들과 헤어지는 일”로 그녀는 <무극>의 촬영을 기억했다. <파이란> 이후 “앞으로는 추운 곳에서는 영화를 찍기 않겠다”던 장백지는 “영화는 아이를 낳는 일과 비슷하다고 자주 표현한다. 고생스러운 촬영 당시에는 다시는 안 할 것처럼 말하지만 좋은 작품을 발견하면 자신도 모르게 고통을 감내하며 발길이 그곳을 향한다”고 말했다. 칭청의 인상적인 눈 화장에 대해서는 “혼자 눈빛이나 분위기로 표현해야 하는 장면이 많은 편이라 그런 느낌으로 분장했다”고 답했다. 그녀는 얼마전 할리우드 메이저 제작사가 세 차례에 걸쳐 제안했던 대작들을 모두 거절하기도 했다. “이미 약속한 일이 우선이다. 아무리 좋은 기회라도 사람간의 약속이 더 중요하다”는 게 그 이유다.

일상의 장백지는 유쾌하다. 인터뷰 중 통역자가 말을 옮기는 짧은 순간에도 여러 가지 웃기는 표정으로 주위 사람에게 장난을 친다. 그는 “촬영 중에는 배우로서 철저히 노력하지만 지금처럼 사람들을 만날 때는 그저 한 개인으로 편안한 모습이면 좋겠다”며 담배를 빼어문다. “상대 여배우라기보다 털털한 남동생 같다”던 장동건의 평가는 이러한 소탈함에서 비롯된다. 자신이 권하는 대로 주위 사람들도 편안히 담배를 피우며 커피를 마시자 그녀는 “돈으로 행복을 살 수는 없다. 이런 편안한 분위기가 내가 원하는 삶이다. 삶은 길지 않다”며 만면에 웃음을 머금는다.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 40마리와 함께 있을 때 가장 마음이 편하다”는 장백지는 “영화를 찍으면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에게서 인간의 공포스러운 이기심을 엿보는 경우가 있다. 동물은 그런 면이 없다”고 말한다. “서른이 되면 배우를 그만둘 것”이라는 과거의 장담은 사실상 연기됐지만 여전히 장백지가 품은 “인생의 가장 큰 목표는 가정을 이루는 것”이다. “늙을 때까지 연기하고 싶지는 않다. 슈퍼마켓을 찬찬히 둘러보며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소망은 변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정신과 의사를 희망했던 장백지는 배우를 그만두는 순간까지 “어떤 매체도 젊은 세대를 위로하지 않는 홍콩에서 영화를 통해 그들에게 심리적 위안을 줄 수 있는 배우”가 되기를 꿈꾸고 있다.

관련영화

관련인물

사진 최호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