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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쿼터 붕괴 [1]

확신에 찬 모험인가, 근거없는 도박인가. 정부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위해 “현행 연간 146일인 한국영화의 의무상영일수를 절반인 73일로 축소하겠다”고 발표하자 영화계 안팎이 격렬한 논란에 휩싸였다. 문화관광부가 4천억원 지원 등 후속조치를 내놓았지만, 영화인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의 분노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2월2일부터 릴레이 농성에 들어가고, 2월8일에는 옥외집회를 계획하고 있는 등 스크린쿼터 현행 유지를 지켜내기 위한 싸움을 연달아 준비 중이다. 국회쪽과 연대해 정부를 압박할 계획 또한 세워두고 있다. 정부 또한 좀처럼 물러설 분위기가 아니다. 한-미 FTA 체결이야말로 경제활성화를 위한 유일한 돌파구라고 여기고 있는 정부는 스크린쿼터 현행 유지 주장이야말로 소탐대실이라고 몰아붙이면서 협상을 서두르고 있다. 내년 3월까지 FTA 협상을 무리없이 끝마치겠다는 포석이다. 통상협정과 스크린쿼터를 두고 공방을 더해왔던 정부와 영화계가 마침내 외나무다리에서 맞선 가운데 스크린쿼터 축소 결정이 내려지기까지의 정황, 스크린쿼터와 FTA를 둘러싼 쟁점을 정리했다. 또 이번 사태에 대한 각계의 입장을 덧붙였다.

정부의 스크린쿼터 축소 발표는 누구도 예상 못한 ‘기습’이었다. 지난 1월26일,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인 한덕수 부총리는 정례 브리핑을 통해 “7월1일부터 스크린쿼터 일수를 73일로 축소하는 것을 목표로 필요한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한-미 FTA를 위해서 스크린쿼터를 축소해야 한다는 정부의 급작스런 공식 발표 앞에서 영화계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번엔 정부가 시행일자까지 정해서 스크린쿼터 축소를 공식화했기 때문에 위기감도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스크린쿼터를 줄여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떠보기만을 거듭하던 정부 내 경제관련 부처들이 앞장섰고, ‘이번엔 어떤 반대를 무릅쓰고서라도 (스크린쿼터를) 축소하겠다’고 칼을 빼든 상황이다.

영화인들이 ‘1·26 발표’를 두고 ‘국치일’, ‘반문화적 쿠데타’, ‘정권 퇴진 운동도 불사’ 등 격한 분노를 쏟아냈던 것도 이러한 위기감과 무관하지 않다. 문화관광부가 후속조치로 4천억원의 기금을 마련하는 등의 후속 대책을 내놓았지만, 영화인들은 2월2일 서울 중구 남산 감독협회 시사실에 농성장을 마련하고, 2월8일에는 서울 광화문에서 대규모 옥외 집회를 갖기로 하는 등 투쟁 수위를 점점 높여가고 있다. 스크린쿼터 사수 영화인 대책위 공동위원장인 정지영 감독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며 “유일한 해결책은 정부가 조속히 스크린쿼터 축소 방침을 철회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영화계 철야농성 돌입 등 강력 반발

스크린쿼터를 한-미 FTA 협상의 미끼로 내던진 정부의 태도를 좀처럼 이해할 수 없다는 게 영화인들의 대체적인 반응이다. 영화인 대책위는 “FTA가 경제적으로 어떤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주는지에 대한 국민적 설득이나 합의 과정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하면서 영화인들을 집단 이기주의에 매몰된 이들로 내몰고 있다”고 비판한다. 세계문화기구를 위한 연대회의 양기환 집행위원장은 “시청각 서비스 분야를 예외 부문으로 정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협상 시작 전에 할리우드 독점을 막아낼 유일한 장치인 스크린쿼터를 축소하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며 “미국과의 FTA가 내년 3월까지 타결되지 못하면 스크린쿼터만 내주는 최악의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영화계는 "반문화적 쿠데타"라며 릴레이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사실 정부는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FTA와 스크린쿼터는 별개”라는 원칙을 거듭 밝혀왔다. 지난해 11월22일 정동채 문화관광부 장관은 국회 예결위에 출석해 “스크린쿼터는 미국과의 FTA와 연계하지 않는다는 것이 공식 입장”이라며 “대통령과 총리의 생각도 같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 “(스크린쿼터) 조정이 불가피한 상황이 오더라도 주무부처인 문화관광부, 그리고 영화계와 협의해서 결정하겠다”고 거듭 확인했던 정부였다. 그러나 두달이 지난 지금 상황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진행됐다. 스크린쿼터는 ‘대의’를 위해 축소의 상황에 처한 반면 한-미 FTA는 급물살을 타고 있다.

도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신호탄은 “우리 경제의 미래를 위해서 미국과도 자유무역협정을 맺어야 한다”는 1월18일 노무현 대통령의 신년연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어 권태신 재정경제부 차관이 “집단이기주의가 스크린쿼터에도 있다”며 “자기 것만 안 잃으려고 한다”고 발언하는 등 영화계를 향해 비난의 화살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일부 언론들이 “(한·미 양국이) 스크린쿼터 축소에 합의하고 FTA 협상을 개시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라는 추측 보도를 내놓자, 1월20일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나서 전면 부인했지만, 1주일 뒤 이는 거짓임이 드러났다.

정부 타협없이 한-미 FTA 강행할 듯

미국과의 사전 교감 없이 번갯불에 콩 볶듯 스크린쿼터 축소와 FTA 협상 개시가 가능할까. 영화인 대책위쪽은 정부가 미국과의 FTA 협상 시작을 위해 스크린쿼터를 절반으로 축소하겠다는 ‘깜짝선물’을 안기기까지 준비 작업이 있었을 것이라고 의구심을 표하고 있다. 실제로 정치권 안팎에선 “지난해 한국 정부가 미국쪽에 스크린쿼터를 92일까지 줄이겠다는 입장을 전했는데 미국쪽에서는 과거 무산된 BIT 협상 전례를 들어 더 많은 일수의 삭감을 암묵적으로 요구했다”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다.

미 무역대표부, 주한 미 상공회의소 등 그동안 스크린쿼터가 양국의 자유로운 통상 협정을 가로막는 걸림돌이었다고 지적해온 단체들은 한국 정부가 한국영화 의무상영일수를 줄이자 일제히 환영 성명을 내고 반기는 분위기다. 정부 경제부처의 한 관계자는 “미국이 명시적인 스크린쿼터 일수를 원한 적이 없다”며 다만 “73일 축소안은 영화인들의 스크린쿼터 투쟁으로 DJ 정부가 추진했던 미국과의 양자투자협정(BIT) 협상이 무산됐기 때문에 FTA에 앞서 사전에 미국쪽에 협상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덕수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왼쪽)

경제 관료들이 주축이 된 이번 정책 결정 과정에서 정작 스크린쿼터 주무부서인 문화관광부는 ‘FTA 대세론’에 밀려 제몫을 못한 듯하다. 양기환 집행위원장은 “문화부가 1월27일 내놓은 허술한 후속 지원책을 보면 이번 정책 결정 과정에서 문화관광부는 아예 배제된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문화부의 한 관계자는 “고위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 협의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며 “1월26일 오전에 열렸던 관계 장관 회의에서 스크린쿼터 축소에 관한 최종 결정이 내려졌는데, 불가피하게 스크린쿼터를 축소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영화계 안팎의 비난에도 정부는 한번 빼든 칼을 도로 집어넣을 순 없다는 입장이다. 2월2일 한-미 FTA 추진 관련 공청회를 개최한 정부는 미국쪽과 일정 조율이 끝나면 곧바로 대외경제장관회의를 여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테이블 마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소속 위원들이 영화인들과 함께 “스크린쿼터 축소 방침을 철회하라”고 압박하고 있으나 정부는 “번복은 없다. FTA는 예정대로 간다”는 원칙을 반복하고 있다. 외교통상부의 한 관계자는 “이번에도 스크린쿼터 때문에 발목이 잡힌다면 한·미 관계에 엄청난 부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론 1·26 발표 전후로 입장 변화

영화계와 정부가 팽팽히 맞서고 있어서인가. 여론의 향방은 좀처럼 타진하기 어렵다. 그러나 영화계를 향해 “결국 밥그릇 싸움 아니냐” 등과 같은 비난 여론이 이전보다 더 많이 쏟아지는 것은 사실인 듯 보인다. 지난해 12월 조사한 영화진흥위원회 조사 때만 하더라도 60%에 달하는 관객이 스크린쿼터 현행 유지에 찬성했지만, 스크린쿼터 축소 발표 방침을 전후로 각종 인터넷 포털 사이트들이 조사한 결과를 보면 스크린쿼터 축소 의견이 더 높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스크린쿼터 문화연대 게시판에는 “스크린쿼터가 소비자들의 다양한 선택 기회를 박탈하는 것 아닌가”라는 내용의 비난들이 적지 않게 올라 있다.

영화인 대책위 입장에선 이같은 분위기가 적지 않은 부담이다. 정지영 감독은 “1998년 때도 처음에는 여론이 불리했지만, 싸움이 진행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고 낙관하면서도 “스크린쿼터 현행 유지의 필요성을 국민들에게 적극적으로 설득하겠다”는 목표를 최우선으로 설정하고 있다. 특히 스크린쿼터제에 대한 비난 여론이 경제 논리가 어떤 가치보다 우선하는 현 국내 상황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이득보다 해악이 많을 한-미 FTA의 실정을 폭로하는 데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FTA 협상이 체결되면 영화뿐만 아니라 국내 농업, 의료, 서비스 분야 등으로 막대한 피해가 예상된다는 점 또한 강조할 예정이다. 한편, 영화계는 문화관광위원회를 중심으로 국회와 함께 힘을 모아 영화진흥법 개정안 모법에 스크린쿼터를 보장하는 방안도 모색하고 있다. 정부와 영화계 모두 물러설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스크린쿼터제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귀추가 주목되는 시점이다.

스크린쿼터 관련 주요 일지

1993.1.29 | 스크린쿼터감시단, (사)한국영화인협회 산하 기구로 출범(위원장 정지영) 1993.10 | 임권택 감독, 정지영 감독, 배우 안성기ㆍ박중훈 등 영화인 300명 영화진흥공사 시사실에서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규탄대회 개최 1994.6 | 전국극장연합회 스크린쿼터제를 규정한 영화법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 제기 1995.4 | 재정상의 이유로 <스크린쿼터감시단> 활동 일시 중단 1995.7 | 헌법재판소 스크린쿼터제 합헌 판정 : 극장연합회측이 청구한 <스크린쿼터제 위헌 심판 청구>에 대해 재판관 전원일치 기각 결정 1996.6 | 「스크린쿼터감시단」재출범(공동위원장 정지영, 이춘연) 1998.4 | 미국 영화협회(MPAA) 윌리엄 베이커 회장 “스크린쿼터 일수를 줄여주면 한국에 5억 달러 규모의 투자를 하겠다” 1998.7 | 문성근, 한석규 등 영화인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스크린쿼터 폐지 반대와 한미투자협정에서 영화 분야 제외를 주장하는 집회 개최 1998.12 | 임권택 감독, 배우 김혜수ㆍ김승우ㆍ박중훈ㆍ안성기ㆍ문성근 등 영화인 700여명 광화문서 ‘한국 영화 죽이기 음모 규탄대회’ 개최 1999.1 | 국회, 스크린쿼터제 현행 유지 촉구하는 결의안 채택 1999.6.9 | 문화관광부 스크린쿼터 단계적 축소 검토 1999.6.16 | 강제규ㆍ임순례 감독 등 대학로 동숭아트홀에서 삭발 단행. 배우 전도연ㆍ송강호ㆍ이병헌ㆍ최민식ㆍ강수연 등 참석 1998.6.18 | ‘스크린쿼터 사수를 위한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 광화문빌딩 앞 광장에서 규탄 대회. 배우 최지우ㆍ황신혜ㆍ심혜진ㆍ최민식ㆍ한석규ㆍ이미연 등 등 영화인 700여명 참석. 정지영ㆍ박찬욱ㆍ박광춘ㆍ박광수ㆍ이미례 감독 등 99명 삭발 1999.6.21 | 문화부 스크린쿼터 축소 가능 공식 천명 1999.6.24 | 임권택 감독 삭발. ‘스크린쿼터 사수를 위한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와 ’우리 영화 지키기 시민사회단체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 소속 회원과 시민, 대학생 등 1천여명 광화문 빌딩앞 광장에서 ’스크린쿼터 축소 결사 저지와 굴욕적 한미투자협정 반대를 위한 범국민 보고대회’ 개최 1999.6.25 | 명계남 이스트필름 대표 등 스크린쿼터 비상대책위원회 단식 농성 돌입 2002.1.28 | 임권택 감독 등 영화인 150여명 세종문화회관서 스크린쿼터 수호 의지를 거듭 천명 2003.6.12 | 임권택 감독과 배우 안성기ㆍ박중훈ㆍ한석규ㆍ송강호 등 프레스센터에서 스크린쿼터 축소 논의 중단과 한미투자협정 체결 거부 촉구 2003.6.15 | 김진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스크린쿼터 축소 계속 추진” 2003.7.2 | ‘한미투자협정 저지와 스크린쿼터 지키기 영화인 대책위원회’ 결성 2003.7.9 | 배우 안성기ㆍ송강호ㆍ이병헌ㆍ설경구ㆍ문소리ㆍ박중훈ㆍ명계남 등 서울 스카라극장서 ‘한미 투자협정 저지와 스크린쿼터 지키기 영화인 결의대회’ 개최 2004.6.11 | 이창동 문화부 장관 “한국영화산업의 미래를 위해 스크린쿼터 일수를 축소 조정, 검토해야 할 시점” 이에 따른 3대 원칙을 제시. 2004.6.22 | ‘한미투자협정 저지와 스크린쿼터 지키기 영화인 대책위원회’ 강남역 주공공이 극장서 결의대회 개최 2004.7.14 | 영화인들 하루 동안 제작 전면 중단. 광화문 네거리에서 ’스크린쿼터 사수와 한미투자협정 저지를 위한 영화진흥법 개정 촉구 및 대국민 보고대회’개최. 배우 안성기ㆍ박해일ㆍ김민선ㆍ차승원ㆍ장혁ㆍ조인성ㆍ이은주ㆍ류승범 등 영화인 1천500여명 참석 2004.7.15 | 여야의원 38명 스크린쿼터 현행 일수를 법률에 못박는 영화진흥법 개정안 제출 2004.8.31 | 영화인과 문화부 스크린쿼터 협의체 구성 2004.10.17 | 공정거래위원회 스크린쿼터 축소ㆍ폐지 입장 표명 2005.4.4 |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 “정부는 스크린쿼터 제도에 대해 축소하는 방향으로 검토를 진행중” 2005.6.3 | 롭 포트먼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 스크린쿼터 축소 요구 2005.10.21 | 유네스코 문화다양성협약 채택 2005.11.4 | 박병원 재정경제부 차관 “스크린쿼터 축소 추진” 2006.1.18 | 노무현 대통령 신년연설 “우리 경제의 미래를 위해서도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어야 한다” 2006.1.20 | 권태신 재경부 차관 “집단이기주의가 스크린쿼터에도 있다” 2006.1.26 | 한덕수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 “스크린쿼터 현행 146일에서 73일로 축소해 7월부터 시행” 발표

사진제공 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