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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쇠약 직전의 남자
2001-08-16

<소름> 동시녹음 오세진

진수(珍羞)의 비법은 별다른 게 아니다. 좋은 재료를 구하는 것. 그게 절반이다. “원 소스가 좋으면 열 가지 변형이 가능하지요. 반대로 나쁘면, 아무 데도 쓰지 못하는 것이고.” 붐 마이크를 끼고 살아온 지난 13년, 오세진(33) 기사가 털어놓는 현장 원칙도 성찬을 준비하는 요리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녹음기라는 장바구니 안에 얼마나 신선하고 깨끗한 소리를 담아낼 것인가, 하는 고민은 이번 <소름>에서도 이어졌다. “공포스런 분위기를 위해서는 일단 현장이 조용해야 하는데, 서대문 산꼭대기 아파트가 어디 그런가요. 별별 잡음의 소굴인데. 생선파는 마이크 소리가 지나가면, 저 멀리서 공사장 망치 소리가 한번 변죽을 울리고, 언덕길이라 차까지 붕붕거리니, 원….”

그렇다면, ‘기다림’만이 능사? 아니다. 때론 선택이 필요하다. 어떤 ‘노이즈’도 없는 진공상태의 촬영상황을 기대하기란 무리다. 그러다간 촬영일정도 문제지만 정작 자신이 “환청이 들리는 신경쇠약 직전”에까지 들어서니까. “감정 몰입이 필요한 장면에서 둔탁한 잡음이 끼어들면 문제지만, 대사와 물리지 않거나 자연스러운 노이즈라면 굳이 다시 갈 필요가 없지요.” 그건 그의 신념과도 맞닿아 있다. “녹음은 기계가 하는 게 아니거든요.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철저히 사람 몫이에요.”

동시녹음의 또 하나의 임무는 ‘대사 살리기’다. <소름>에서 기주봉씨가 비밀의 방 504호를 등뒤로 하고 중얼거리는 장면은 대사 전달이 명확지 않아 지금 봐도 찜찜하다. 현장에선 분위기만 살리면 된다고 해서 넘어갔는데, 편집본을 보니 대사를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 후시까지 했지만, 이번에는 ‘감정’이 살지 않아 그냥 동시본을 써야 했다. “제가 너무 지쳤나봐요. 좀더 어필했어야 하는데. 윤종찬 감독이 사운드에 관한 한 꼼꼼한 전문가여서 너무 믿었을 수도 있고. 다 제 실수지요.”

그가 현장밥을 먹게 된 건, 10년 터울 고향 형님인 김범수 기사의 제안 때문. 처음에는 아르바이트 한다는 셈치고 뛰어든 것인데 지금까지 눌러앉게 됐다. “얽매이지 않는 생활이나, 한편 할 때마다 얻는 성취감 때문이었겠지요.” 물론 녹음분야가 촬영현장에서도 상대적으로 ‘3D’ 직종이다보니 생활이 넉넉했을 리 없다. 녹음기사가 되려면, 기술뿐 아니라 장비 일체를 자신이 갖춰야 하니, 박봉을 쪼개 목돈을 마련했던 지난 10여년의 생활은 보지 않아도 상상이 간다. 그래도 그는 “현장에서 평생 배필을 만났으니, 그리 아쉬울 것 없다”고 말한다. <북경반점>을 찍을 때 분장팀을 도우러 나온 지금의 아내를 만나 영화가 개봉하기도 전에 결혼식을 올렸던 것. “사실 연애하느라 녹음이 이 모양이 됐다고 뒤에 핀잔 들으면 어쩌나 조마조마했지요.” <소름> 다음 그가 귀기울일 작품은 이미숙씨와 박제현 감독이 차린 메이필름의 <유리케이크>. “불러줄 때까지 현장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그는, 나이가 좀더 들면 사운드 전반에 관한 공부를 시작하고픈 맘이 있다.

글 이영진 기자 anti@hani.co.kr

사진 손홍주 기자 lights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