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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 상장시대 [1]
문석 2006-02-22

충무로가 들썩이고 있다. 스크린쿼터 얘기가 아니다. 지난해부터 충무로를 달뜨게 만든 제작사, 매니지먼트사들의 상장열기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동안 상장은 대기업을 등에 업은 투자·배급사나 시장을 선도하는 극소수 영화사만이 상상할 수 있는 일이었으나 지난해를 기점으로 상황은 돌변했다. 이제 상당수의 제작사와 대다수의 매니지먼트사가 우회등록이라는 방법을 통해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주식시장에 진출했다. 엔터테인먼트로 눈을 돌리는 기존 상장기업에 지분이 인수된 기업 또한 많다. 충무로가 주식시장의 영향권 안으로 진입한 것이다. 이같은 상황은 일견 한국 영화산업이 ‘산업’이라는 말에 걸맞은 꼴을 갖추기 위한 발전의 한 단계로도 보인다. 하지만 이들의 상장과정과 향후 전망을 바라보는 금융가의 시선은 그리 고운 편이 아니다. 많은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시적인 바람을 타고 만들어진 분위기인 탓에 머지않은 미래에 상당수 기업이 시장에서 퇴출될 수도 있다는 극단적인 진단도 나온다. ‘충무로 상장시대’의 배경과 허실을 따져본다.

“당사는 연기자 이영애씨가 가족과 함께 자신의 브랜드를 내세워 설립할 예정인 ‘주식회사 이영애’에 지분투자 및 경영권을 확보하여 당해 회사를 당사의 계열회사로 편입시킬 예정입니다.” 지난 2월7일 뉴보텍이라는 한 코스닥 상장기업이 공시를 통해 밝힌 ‘사업계획’은 작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이 발표가 사실이 아니라는 이영애 본인의 즉각적인 주장에 뉴보텍은 다음날인 8일 기자회견을 통해 이영애 오빠와 사업을 펼치기로 구두합의를 했다고 밝혔지만, 이영애와 매니지먼트 업체, 변호사는 일제히 사실이 아니라는 입장을 거듭해서 밝혔다. 급기야 이영애는 변호사를 통해 허위사실 적시로 인한 명예훼손으로 뉴보텍을 고소하기에 이르렀다. 양쪽의 주장 중 무엇이 진실인지는 곧 밝혀지겠지만, 이 해프닝은 최근 영화계를 둘러싸고 있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다. ‘주식회사 이영애’ 사건은 다소 희화적인 방식이긴 하지만, 스크린쿼터 축소 저지와 함께 요즘 충무로의 화두가 되어버린 주식시장 상장이라는 트렌드를 대중에게도 체감케 한 에피소드다.

주식시장 진입의 의미 - 산업의 합리화

요즘 충무로는 상장이라는 마술에 걸려버린 것 같다. 지난해, 특히 하반기부터 최근까지 영화 관련 기업들의 주식시장 진출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1년에 1편 이상의 영화를 만들 능력을 갖춘 중견 제작사 중 대다수가 우회상장이나 기존 상장기업으로부터의 지분 인수 등을 통해 주식시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매니지먼트계의 경우엔 절대 다수가 이같은 흐름을 타고 있다.

멀티플렉스 근간의 대기업 계열사를 제외하면 한국 영화계에서 규모가 있다는 제작사, 매니지먼트 업체, 그리고 배급사의 대다수가 증시에 진입했다는 사실은 겉보기에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한국영화가 꾸준히 질적으로 발전하고 해외시장을 넓혀온 데 비해 그것의 생산시스템은 여전히 낙후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대기업 계열사와 극소수 선도 업체를 제외한 대다수 제작사와 매니지먼트 업체, 배급사는 최근까지만 해도 영세하고 취약한 자본구조와 전근대적인 경영이라는 멍에를 지고 있었다. 그랬던 이들이 주식시장에 진입해 공개시장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고 투명한 경영을 펼쳐나간다는 것은 한국 영화계의 산업화를 좀더 촉진시키는 일이며 합리적인 영화제작 시스템을 갖추는 데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충무로의 상장 붐이 이러한 합리적 산업구조 확립에 기여하지 않을 것이라 보는 시각은 드물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상장 행렬이 길게 이어지면서 비판적인 목소리는 점점 높아가고 있다. 이미 꽤 전부터 엔터테인먼트 관련 주식의 ‘거품론’이 제기돼왔으며, “머지않아 대다수 업체들이 큰 홍역을 치르게 될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특히 요즘 주가가 하락세를 보이면서 이러한 비관론은 서서히 확산되는 분위기다. 증권가와 충무로 일부에서 불거져 나오고 있는 이러한 목소리는 영화, 엔터테인먼트 관련 업체들의 상장 러시가 자연스러운 과정을 통해 이뤄진 게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최근 충무로의 상장열풍은 영화산업 자체의 성장이라는 요소보다 다양한 외부 조건에 힘입고 있다는 것이다.

2005년 10월, 상장 바람이 시작되다

충무로에 상장 바람이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10월 이후다. 실제로 많은 업체들의 우회상장과 지분인수가 이때부터 올해 초 사이에 집중돼 있다. 하지만 상장이 화두로 떠오른 시기는 지난해 중순이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계기가 있다. 바른손 영화사업본부 최재원 대표는 “금리가 낮은데 부동산 투자가 억제되고 환율까지 낮아져 결국 주식으로 자금이 몰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지난해 초에 붐이 일었던 바이오 관련 주식의 힘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한류, DMB 등 뉴미디어, 콘텐츠의 미래가치 등이 활발하게 논의되면서 엔터테인먼트쪽으로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지난해 초 SK텔레콤이 IHQ의 2대주주로 들어왔고, KT가 싸이더스FNH를 인수하는 등 거대 통신자본의 엔터테인먼트 업체에 대한 투자 또한 증권가의 기대를 부풀렸다. 전망없는 사업을 운영하는 상장기업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런 분위기 속에서 엔터테인먼트 업체에 지분을 매각하면 좋은 조건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머니게임’을 앞서 고려하는 상장기업 대주주라면 엔터테인먼트 업체에 투자하는 것만으로도 주가부양 효과를 얻을 수 있다. 한 시장 관계자는 “게다가 거대한 자금을 갖고 단기차익을 노리는 세력도 관심을 기울이면서 엔터테인먼트가 자연스레 증시의 테마주로 부상했다”고 말한다. “지난해 5∼6월부터 인수, 합병에 참여하지 않겠냐는 문의를 엄청나게 많이 받았다”는 여러 제작사의 말에서 알 수 있듯, 이러한 분위기는 금융권에서 먼저 조성됐다.

충무로의 이해 또한 맞아떨어졌다. “내 일의 80%는 제작비 등 돈을 구하는 일이었다”는 황우현 튜브픽쳐스 대표의 이야기처럼 제작비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개발비에 대한 부담이 가중되는 제작사 입장에서 독자적으로 자본을 확보할 조건을 만들어주는 상장은 생존뿐 아니라 한 단계 성장을 위한 디딤돌이 될 수 있다. 매니지먼트의 경우 상장에 대한 요구는 더욱 절박했다. 스타로 성장할수록 배우에 비해 매니지먼트업체쪽 수익 분배율이 낮아지는 관행과 필수조건이 돼버린 거액의 계약금에 대한 부담 등으로 적자 폭이 커지는 기형적 수익구조를 가진 상황에서 상장은 이들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2006년부터 우회등록 조건이 까다로워진다는 전망과 “상장 분위기가 형성될 때를 놓쳐서는 안 될 것 같았다”(팝콘필름 한성구 대표)는 판단은 지난해 하반기 충무로의 상장열기를 더욱 뜨겁게 한 요인이었다.

상장이 끌어들인 새로운 자본의 물줄기

이러한 상장의 효과는 주가로 먼저 나타나고 있다. 음반업체 이가엔터테인먼트와 비디오 유통사 우성엔터테인먼트가 인수, 합병한 전(前) 골프공 제조회사 팬텀은 한때 700원대에 머물렀던 주가가 3만원을 훌쩍 넘기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다. 태원엔터테인먼트가 우회상장한 스펙트럼DVD는 2천원대 후반이던 주가가 2개월 만에 4배로 올랐다. 이 두 업체가 주가조작 혐의를 받고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는 와중에도 엔터테인먼트 업체의 주가는 비교적 높은 선을 형성했다. 최근에는 장동건 소속사 스타엠엔터테인먼트의 우회상장사인 텐트제조회사 반포텍 주식은 4천원대에서 2만4천원대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올해 들어 코스닥 시장 전반이 침체에 빠져 꽤 하락했으나, 당분간 엔터테인먼트 업체의 주가는 상승세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상장은 새로운 자본을 확보하는 데도 이점을 가져다준다. 박신규 MK픽쳐스 이사는 “상장사라는 크레딧 덕분에 기존 금융권에서 대여받기도 쉬워진다”고 말한다. 주가가 오른다는 기대만 있다면 주식을 새로 발행하는 유상증자나 일정 기한 뒤 주식으로 바꿀 수 있는 전환사채(CB)나 신주인수권부 사채(BW) 등을 통해 대규모 자금을 확보할 수 있다. CB 발행으로 얻은 자금을 통해 투자조합을 결성해 배급사업의 재원으로 삼고 있는 MK픽쳐스의 모델은 대부분의 상장된 제작사들이 참고하고 있다. 대부분의 제작사나 매니지먼트가 우회등록한 직후 유상증자나 CB, BW 발행을 추진하는 것이 일종의 정규코스가 되고 있다. 각 기업에 자금이 풍성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매니지먼트사조차 이 자금을 통해 수익을 내는 길은 대개 영화 외엔 별달리 없는 상황이다. “이들 덕분에 충무로에 2천억원 이상이 신규로 들어왔을 것”이라는 튜브픽쳐스 김동욱 이사의 말을 그대로 믿지 않는다 해도 충무로에 돈이 풍성하다는 이야기는 곳곳에서 들린다. 영화 관계자들은 여기에 힘입어 올해 제작되는 한국영화가 90∼100편에 이를 것으로 내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