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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백남준과 황우석
진중권(문화평론가)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2006-02-24

20세기의 전반이 피카소의 시대, 후반이 앤디 워홀의 시대이고, 전반과 후반을 꿰뚫는 것이 마르셀 뒤샹이라면, 21세기는 백남준의 시대가 되지 않을까? 이미 그는 20세기가 낳은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지만, 내 생각에 그의 작업이 갖는 의미는 아직도 충분히 평가가 되지 않았다. 21세기에 백남준은 아마도 20세기에 위대했던 것보다 더 위대해질 것이다.

지난호 <씨네21>에 실린 ‘바이 바이 미스터 백’이라는 기사를 보았다. 누군가 백남준을 가리켜 “한국이 세계에 준 선물”이라고 했단다. 실제로 현대 미술사의 한 페이지에 ‘한국’이라는 나라의 이름이 적힐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 덕분이다. 이로써 그는… 물론 본인의 의도와는 전혀 관계없이… 한국 사람들이 유난히 밝히는 ‘애국자’가 된 셈이다.

진짜 애국자들은 원래 애국 같은 거 잘 안 한다. 그저 제 잘난 맛에 살다가 나중에 국제적 명성을 얻어 본의 아니게 애국자가 될 뿐이다. 그의 나라사랑을 굳이 입으로 확인하고픈 꼭지 덜떨어진 한심한 기자들의 애국적 질문에 짜증이 났던 걸까? 백남준은 말한다. “나는 한국에 대한 애정을 절대로 발설하지 않고 참는다. 한국을 선전하는 길은 내가 잘되면 저절로 이루어진다.”

반면 가짜 애국자들은 어떤가? 그들은 툭하면 “한국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곤 한다. “과학에는 국경이 없어도,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던 줄기세포 영웅. 얼마 전 기자회견에서 ‘대한민국’이라는 낱말을 여덟번이나 반복했다. “프라이드 오브 코리아”가 고작 세계를 속인 논문조작자로 드러난 상황에서도, 이 낯간지러운 애국질에 여전히 감동 먹는 동포들이 너무 많다. 그게 문제다.

조작으로 판명된 2005년 그의 논문에도 ‘이 연구는 한국의 연구자들에 의해, 한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한국의 기술로 이루어졌다’는 문구가 들어 있다. 반면 백남준은 어떤가? 그는 미국 시민권자이고, 한국 정부의 지원없이, 독일과 미국의 예술의 도움으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했다. 그렇다고 그의 작품이 덜 위대한 것도 아니고, 그의 예술이 덜 애국적인 것도 아니다.

진짜와 가짜는 사기를 쳐도 서로 다르게 친다. “원래 예술이란 반이 사기입니다. 사기 중에서도 고등 사기입니다.” 이렇게 까놓고 사기를 치겠다고 말하는 예술가를 ‘사기꾼’이라 욕하는 이는 없다. 반면 황우석은 어떤가? 휠체어를 탄 환자에게 “반드시 걷게 해주겠다”고 약속하더니, 결국 사기만 치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당당히 외치기를 “이것은 대한민국 기술입니다”.

“미적으로 실패한 것은 정치적으로도 실패한 것”이라는 아도르노의 말도 생각난다. 수염 덥수룩한 박사의 병원침대 신파. 기자회견장에 연구원들을 병풍처럼 두르는 몰취향. 진달래꽃 뿌려가며 애국가를 부르는 기괴함. “한국인의 저력을 보여줬다”고 상찬되는 이 애국 퍼포먼스. 정말 돌아버리겠다. 나라 망신시킨 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촌스러움’ 역시 백남준의 섬세한 국제적 미감과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누군가 “나는 대한민국을 사랑한다”고 요란하게 외치면, “아, 저 사람은 애국자구나”라고 생각해주는 모양이다. 대한민국에서 애국자되는 거, 이렇게 쉽다. 하긴, 그렇게 쉬우니 사방천지가 애국자들로 차고 넘치는 게 아닌가. 이렇게 애국자들이 많은데 나라는 왜 이 모양 이 꼴인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 꼴이 보기 싫었던 걸까? 백남준은 일찍이 이런 명언을 남겼다. “한국에서는 말을 앞세우는 국수적인 애국자가 늘 이기는 것 같다.”

그냥 조용히 애국질만 하면 내가 이 글을 쓰지를 않았다. 그 주제에 ‘매국노’를 잡겠다고 설친다. 황우석 좀 비판했다고 애먼 사람들의 이름을 ‘매국노 리스트’에 올려놓고, 온갖 폭언에 협박까지 해댄다. 이 애국 깡패들이 하고 돌아다니는 짓거리를 보면 괘씸하다가도, 다른 한편으로 ‘저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 저들도 오랜 국가주의 교육의 희생자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면, 마음 저 아래 깊숙한 곳으로부터 처절하도록 슬픈 마음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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