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이창
진리는 어렵다
2001-08-16

정윤수의 이창

옛말에 ‘修身齊家 연후 治國 平天下’라고 하였으되 실은 맨 앞머리의 格物致知, 誠意正心을 빼먹는 수가 더러 있다. 독재 시절, 입신양명의 율법으로 수신제가 운운하는 실용적 처세를 최고 덕목으로 강요한 탓이겠으나 어쨌든 이 항목 중에 가장 어려운 대목이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격물치지, 네 단어다. 치국 평천하라고 해서 왼발로 프리킥 차듯이 조금만 노력하면 될 일은 물론 아니지만 격물치지, 이조차 해석이 달라서 ‘사물의 이치를 파고들어 궁극의 앎에 이른다’는 주희의 성리와 ‘마음을 어둡게 하는 물욕(격)을 물리쳐야 한다’는 왕양명의 도덕적 실천의 두 갈래로 나뉜다는데 실은 고현의 가르침을 편취하여 '혀를 놀리는 즐거움’을 주체하지 못한 천박함의 소산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격물치지’라! 아쉬운 대로 들리는 뜻 그대로 받아들이되 ‘사물의 본질에 도달하는 앎’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이를테면 한때 우리는 텔레비전을 ‘바보상자’라고 불렀다. 그런데 과연 바보상자이기만 한 것일까. 즉물적 미디어 비평의 한계에 불과한 게 아닌가. 파시즘의 ‘3S 정책’ 역시 부족하기 이를 데 없다. 스포츠, 섹스, 스크린을 우민화 방략의 표본으로 앞세우고 그에 대한 비판적 언어를 뒤따르게 하는 것은 손쉬운 분석이지만 사물의 본질에 이르는 앎과는 거리가 멀다. 요컨대 인간의 삶이란 복잡하고 미묘한 것이어서 그것에 이르고자 하면 할수록 복잡하게 뒤엉킨 사유의 미로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난호 <씨네21>에 실린 김규항씨의 ‘진리는 쉽다’는 이상의 내 생각을 되새기게 만든 바 있어, 며칠 궁금했다. 물론 김규항씨는 지식인 집단이 어떻게 견고한 지배블록을 형성하는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들의 지식은 어떻게 오남용되는가를 비판하고자 했음이 틀림없으나 ‘쉽게 전달할 수 있는 진리조차 알아먹기 힘들게 만드는 행태’라는 지적과 바로 이러한 지식인에게는 마오쩌둥이 1942년 연안강화 이후 시도한 하방(下放)을 되새겨야 한다고 한 점은 상당히 위험해 보이는 발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선 앞말에 대하여. 한마디로 진리란 도달하기 어려운 것이며 그것을 전달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물론 <조선일보>가 수구보수언론이고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은 장승업에 관한 영화이며 센강은 파리를 좌우로 가른다는 것쯤은 누구나 아는 사항이다. 이는 진리가 아니라 상식의 문제이며 이에 의문이 들 경우 옆집에 가서 물어보면 된다. 그러나 인간이란 누구이며 그것도 추상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뚜렷한 시공간의 좌표 속에서 지금 당장의 현실을 살아가는 이 한반도에서의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공부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모두가 ‘떨쳐 일어나면’ 풀릴 문제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사회주의권의 패망과 분열 당시 리영희 선생이 <사회평론>의 ‘공세적 인터뷰’에서 말한 ‘인간의 얼굴을 한 중국 인민’에 대한 성찰이 좋은 예가 되겠는데, 천사와 악마가 공존하고 있는 한 인간의 내면에 더하여 수많은 갈등과 모순이 중첩된 현실을 겹쳐놓으면 진리란 ‘손바닥을 뒤집으면 손등이 보인다’는 식으로 풀리는 일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왜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세계화에 반대하는가. 한 인간의 기호품 속에도 손쉬운 언어로는 설명하기 힘든 역사적 상황들이 중첩되어 있는 것이다. 가령 유시민의 <거꾸로 보는 세계사>는 이른바 시각교정용으로 더없이 좋은 책이겠으나 그것은 엘리아스와 홉스봄과 브로델이라는 문을 여는 열쇠로 요긴한 것이지 그 ‘쉬운’ 책 한권으로 역사와 인간을 ‘수난과 저항’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저자는 물론 김규항씨 역시 바라는 바가 아닐 것이다. 그럴진대 진리를 쉽게 전달하는 일이란 그것을 얻는 일보다 어렵다고 하겠다. 아도르노는 “알기 쉽도록 의역하는 것에 대해 저항하는 사유가 바로 진정한 철학”이라고 말한 바 있으며 이 때문에 그의 평전을 쓴 마틴 제이는 몹시 송구스러워 하였다. 손쉬운 의사전달이란 사유의 핵심적 실체를 고갈시키는 것이라고 저항했던 아도르노의 자세란 “의미는 설명할수록 무의미해진다”는 스탠리 큐브릭의 말로써 더욱 값진 경우가 된다. 그에 대응하여 ‘쉽게 쓰여진 책’이 빚을 수 있는 선의의 왜곡과 조작을 항상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또한 독자의 ‘실천’ 영역이다. 물론 김규항씨는 미로를 즐기고 궤변을 탐하는 지식인들의 행태를 비판한 것임이 틀림없지만, 그것이 어려운 책을 소화하기 힘드니까 쉬운 글 좀 써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어서는 곤란하다.

다음 하방에 대하여. 나는 그것을 김규항식 비유라고 이해하고 싶다. <조선일보>의 궤변과는 다른 맥락에서 하방과 홍위병은 또다른 비판적 성찰을 필요로 한다. 그것을 위하여 우리는 첸카이거 감독의 청년 시절을 기록한 책을 섬세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 어쨌거나 어떤 사람이 실제로 하방을 감행한다면 그로서는 나름의 성찰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더 유익하기로는 ‘하방을 감행하는 심정으로’ 책을 읽어야 좋을 일이다. 카센터 직원이 하이데거까지 읽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지식인들이 커먼레일 디젤 엔진의 원리를 굳이 알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 최대공약수가 어디쯤 있을 것이다. 그 최대공약수를 위하여 카센터 직원은 운전은 하지만 자동차는 모르는 사람들을 위하여 성실히 직업의 윤리를 다해야 하며 동시에 지식인들은 ‘책을 읽고 공부하라’고 사회가 허락해준 시간과 경제의 여유를 부끄러워하며 정녕 안광이 지배를 철하는 신념으로 장식용으로 사모은 서가의 책들을 밤새워 읽어내야 하는 것이다.

정윤수/ 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