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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막의 주인공, 펜을 잡다
2001-08-16

심산의 충무로작가열전 30 박철민(1929∼ )

사회적 명망을 누리고 있는 유부남 박사가 자신을 따르던 젊고 매력적인 여자조수를 임신시킨다. 승강이를 벌이던 중 여자조수가 뜻밖의 사고로 죽자 박사는 그녀의 시체를 집 앞의 호수에 수장해버린다. 그날 이후로 박사의 집에서는 괴이한 현상들이 잇따라 일어난다. 지난해에 개봉했던 해리슨 포드 주연의 <왓 라이즈 비니스>라고? 맞다. 그러나 그 이상이다. 박철민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만들어진 남궁원 주연의 <마의 침실>의 스토리라인이기도 한 것이다. 두 작품의 시차가 무려 30년이나 되니 굳이 표절시비(?)를 들먹이자면 할리우드만 손해다. 박철민은 이 작품의 설정이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10년 뒤인 1980년에 제작된 이두용의 <귀화산장>에서도 동일한 스토리라인을 변주하는데 이때에도 주연은 남궁원이었다.

함경남도 혜산 출신인 박철민은 그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친 다음 부친과 단둘이 월남한 실향민이다. 모친과 형제들 모두를 휴전선 너머에 둔 채 아직까지도 애간장을 태우고 있는 전형적인 이산가족인 것이다. 박철민이 시나리오작가로 데뷔하게 된 경로는 참으로 독특하다. 그는 작가이기 이전에 영화배우였다. 한국전쟁의 상처를 딛고 영화제작이 점차로 활성화되던 1950년대 중반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작품의 공개오디션을 통해서 당당히 주연으로 픽업된 그는 이후 <인생화보> <상록수> <어부들> 등의 작품에서 마음껏 연기활동을 펼쳤다. 그의 인생행로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된 작품은 1958년에 발표된 홍성기 감독의 <산넘어 바다건너>. 흥행에서는 대박을 터뜨렸지만 박철민에게는 상처만 남긴 영화다. 본래 김지미의 상대역인 남자주연으로 내정돼 있다가 홍 감독이 돌연 배우 교체선언을 함으로써 출연기회를 박탈당한 쓰라린 경험을 겪은 것이다. 그때 어찌나 울화통이 터졌던지 한때 충무로를 떠날 결심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충무로를 떠나는 대신 직종을 바꿨다. 그로부터 10년 동안 고군분투한 끝에 거의 마흔이 다 되어 시나리오작가로 다시 태어날 때쯤에는 홍 감독에 대한 서운함도 고마움으로 바뀌어 있었다고 한다.

데뷔작인 <백발의 처녀>는 대사업가의 별장에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하녀의 사후 복수극을 다룬 호러영화. 이후 그는 최근작인 <카루나>가 제작된 1996년까지 약 30년 동안 시나리오를 써왔는데, 그와 동시대의 작가들처럼 다작을 하지는 않았으나, 나름대로 다양한 작품세계를 가꿔왔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옥례기>는 일종의 계몽영화. 어렸을 적부터 해녀일을 하며 집안 살림을 돕던 옥례가 산골마을로 시집가는데 그곳에서의 삶은 더욱 모질고 험난하다. 하반신장애인 남편, 혹독한 시집살이, 동네 남정네들의 유혹…. 옥례는 그러나 이 모든 난관들을 이겨내고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워내 어머니상과 효부상을 받게 된다는 내용이다. <옥례기>와 마찬가지로 임권택이 감독한 <아내> 역시 집안이 몰락하자 파출부로 나선 아내가 알뜰살림을 꾸려나가 저축상과 대통령 표창을 받는다는 내용인데, 두 작품 모두에서 유신 말기의 사회적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박철민이 가장 즐겨 함께 작업한 감독은 박호태. <잊어야할 그 사람> <미스김>은 전형적인 호스티스물이고, <아낌없이 바쳤는데> <삼색스캔들>은 멜로에 복수극을 접목시킨 작품이다. 1990년대의 작품인 <휘모리>와 <카루나>는 각각 국악과 도예라는 전통예술의 연마과정을 핍진하게 그리고 있어 노작가의 연륜을 느끼게 한다.

박철민은 다혈질의 호쾌한 성격과 두주불사의 애주가로 유명하다. 한때 시나리오작가협회에서 발행했던 <시나리오회보>를 보면 강철수가 연재했던 <핏대박>이라는 만화가 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불끈 핏대를 올려 사자후를 토하곤 하는 그 캐릭터의 원형이 바로 박철민이라고 하니 그의 성격이 어떠할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고희를 훌쩍 넘긴 그는 오래 전부터 영상작가전문교육원에서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는데, 지금도 여전히 술자리로 이어지는 뒤풀이장소를 끝까지 지킬 만큼 엄청난 주량과 타고난 건강을 자랑하고 있다.심산/ 시나리오 작가 besmart@netsgo.com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67년 박윤교의 <백발의 처녀>

1970년 박윤교의 <마의 침실>

1972년 설태호의 <혈보산천>

1976년 임권택의 <아내>

1977년 임권택의 <옥례기> ★

1980년 박호태의 <아낌없이 바쳤는데> ★

1982년 박호태의 <애인>

1984년 김효천의 <이혼법정>

1986년 박호태의 <삼색스캔들>

1987년 강대진의 <몽마르트 언덕의 상투>

1994년 이일목의 <휘모리> ⓥ

1996년 이일목의 <카루나> ★

ⓥ는 비디오 출시작

★는 자(타)선 대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