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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눈물 나는 이름, 아빠

응급실. 막 수술을 마치고 나온 듯한 남자가 누워 있다. 그 옆에는 딸로 보이는 여자가 서 있다. 갑자기 남자의 숨이 가빠진다. 소녀는, 그를 멀뚱멀뚱 바라볼 뿐 아무 말이 없다. 그렇게 남자는 세상을 등졌고, 소녀는 그제야 울음을 터뜨린다.

며칠째, 아니 몇년째 같은 꿈이다. 이 꿈이 나를 찾았다는 것은 곧 3월이 온다는 암시다. 남들에게 3월은 꽃 피고 새 우는 설레는 계절이라지만 내겐 악몽이다. 지금으로부터 6년 전. 아직 쌀쌀함이 남아 있던 3월의 어느 날, 난 아빠를 잃었다. ‘음주가무’ 중 아빠의 소식을 들었던 터라 걱정보다 짜증이 앞섰다. 아빠는 곧 수술실로 들어갔고, 난 속 편히 잠들었다. 하지만 아빠는 만신창이가 돼 수술실을 빠져나왔다. 놀랐다. 아빠가 저렇게 가녀린 허벅지를 가졌는지, 아빠의 눈꺼풀이 저토록 무거웠었는지 처음 알았다. 그 사이 아빠는 조금씩 세상과의 짧았던 인연을 거두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속이 울렁거렸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눈물이 많아진 거다. 별것 아닌 일들에 감동 먹고 툭하면 울어댔다. 처음에는 엄청 감정적인 인간이 된 줄 알았다. 하지만 얼마전 이런 변화의 원인을 알게 됐다. 아빠의 죽음. 나는 이를 떠올리게 하는 모든 일들에 눈물을 쏟아냈던 거다. 하지만 내 진짜 트라우마는, 아빠의 죽음이 아니라 아빠 자체였다.

나는 술을 좋아해서 주사가 있었고 가족에겐 유난히도 엄격하고 무뚝뚝했던 아빠를, 어려서는 무서워했고 커서는 싫어했다. TV 속에 등장하는 부녀는 우리와는 다른 세계 이야기였다. 아빠와 난 둘이서만 외출을 한 적도, 당연히 외식이나 영화를 본 적도 없다. 세월도 우리의 서먹함은 삭이지 못했다. 그의 주사가 가슴에서 곪고 곪아 터진 상처라는 것을, 그의 엄격함 뒤에 애정이 숨어 있다는 것을 내가 알게 된 때와 내가 눈물이 많아진 때는 놀랍게도 일치했다.

그래서 내 눈물의 대부분은 아빠와 관계된 장면들에서 비롯된다. <브로크백 마운틴>을 보면서도 울었다. 분명 시작은 그들의 위대한 사랑에 가슴이 아파서였다. 한데 영화가 끝나고, 짧게 나온 에니스(히스 레저) 아버지가 자꾸 밟혔다. 어린 에니스에게 동성애자가 어떤 비극을 맞이하는지 기어이 보게 했던 아버지. 아들은 자라 그런 아버지를 원망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버지가 왜 그랬을까. 나는 자꾸 그 속마음이 궁금해졌다. 자식들은, 자주 아버지의 그림자 뒤에 숨겨진 사랑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위기의 주부들>을 보면서도 크게 울었던 적이 있는데, 수잔(테리 헤처)이 40년 만에 아버지를 만나던 장면에서였다. 수잔의 존재를 모르던 그는 자신의 인생에 끼어들지 말아 달라고 냉정히 말한다. 수잔의 절망도 슬펐지만, 그의 무표정한 얼굴이 나를 더 속상하게 했다. 그의 이야기가 내게는 나의 구질구질한 삶에 너를 끼어들일 순 없다,로 들렸기 때문이다. <브로큰 플라워>의 마지막 장면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다. 자신의 아들이라 믿었기에 베풀었던 짐 자무시의 친절에 대한 소년의 반응. 자식들이 이렇게 철없고 무심한 존재임을 다시 한번 깨달은 나는, 그때도 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