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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 내한공연 [2]

너는 나의 원더월이야

공연이 무르익어간다. ‘모닝 글로리’, ‘마스터플랜’, ‘시가렛&알코올’ 등 몇곡 이외에는 새로 나온 앨범에 실린 노래들을 많이 부른다. 관객은 참을성있게 기다린다. 더 유명한 노래들이 나오기를…. 아, 드디어 나오기 시작한다. 공연은 이제 절정으로 가파르게 올라갈 것이다. 원더월. 그 시작이다.

간단한 단어인 것 같아도 ‘원더월’(Wonderwall)은 공식 사전 어디에도 없다. 1960년대 영국에서 나온 예술영화의 제목에서 유래한 단어라는 설이 유력하다. 주인공이 옆방 커플의 성행위를 자기 방의 뚫린 구멍을 통해 본다는 이야기. 원더월은 뿅가게 만드는 벽이다. 오아시스의 노엘 갤러거가 그 의미를 되살려낸다. 여자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걸어야만 하는 길은 다 구불구불해 우리를 인도하는 불빛들은 너무 눈부셔 네게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너는 나를 구해준 바로 그 사람 나의 원더월이거든.

90년대 한국 젊은이들의 송가가 크라잉넛의 ‘말달리자’라면 90년대 영국 젊은이들의 송가는 바로 오아시스의 이 노래다. “너는 나의 원더월이야.” 여자친구더러 그렇게 말하는 이 노래는 부흥한 영국 젊은이들의 몽환적인 희망을 상징한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거기서 다시 비틀즈가 발견된다. 영국 록의 따뜻한 자궁 비틀즈. 영국 록이 만난 희망의 오아시스, 맨체스터에 있었다. 때는 90년대 중반이다. 리암은 형 노엘이 만든 이 노래를 너무 싫어해서 안 부르겠다고 억지를 쓴다. 그러나 90년대를 대표하는 노래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록 스타는 절대 웃지 않는다

형이 노래하면 동생은 들어간다. 형의 노래가 끝나면 동생은 다시 등장한다. 형을 밴드에 참여시킨 건 동생이다. 형은 기타 테크니션으로 일하고 있었다. 유명 밴드의 투어에 따라다니면서 기타를 튜닝하고 곡에 따라 기타 바꿔주고 하는 일이다. 그러다가 고향에 돌아왔는데 동생이 이미 밴드를 하고 있었다. 어느 스포츠 클럽을 본떠서 ‘오아시스’라고 밴드 이름을 지었다.

둘 다 불만에 가득 찬 표정이다. 둘은 서로 시기한다. 노엘은 리엄의 줏대를, 리엄은 노엘의 멜로디를 시기하는 걸까. 맨체스터의 궂은 날씨, 지퍼를 목까지 다 채운 방수점퍼와 무표정. 오아시스는 절대 웃지 않는다. 하긴, 록 스타는 웃어서는 안 된다. 엘비스 형님이 이미, 1950년대에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열창하고 있는 리엄 갤러거

“적어도 젊은 세대라면 여자애들이 우리한테 왜 넘어오는지 알걸. 우린 우울하고 음침하고 뭔가 위협적이었거든. 웃으면 섹시할 수 없어.”

그렇게 따지면 오아시스는 엘비스의 자식이다. 록 평론가 그레일 마커스는 엘비스를 미국식 평등주의, 민주주의와 연결시킨다.

‘나? 너 못지않아. 너? 너도 나 같은 놈이지 뭐.’

깡촌 트럭운전사 출신이 아랫도리를 휘두르며 노려본다. 맨체스터의 젊은 형제도 그런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 있다. 대학 문턱에도 가보지 않은 그들의 마음속에 그늘은 없다. 대신 적의가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분노에 차서 돌아보지 마’(Don't look back in anger)라는 노래를 만들었다. 시적인 가사. 영국에서 거지도 따라 부른다는 이 노래는 영국 대중문화의, 노동자 문화의 수준을 가늠케 한다.

Don’t look back in Anger

공연 내내 이 노래를 기다렸다. 개인적으로 오아시스의 노래 중에서 가장 좋아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곡으로 ‘로큰롤 스타’를 부른다. 관객이 앙코르를 외치고 오아시스는 다시 등장한다. 존 레논의 ‘이매진’ 도입부를 차용한 인트로가 나오자 절정의 환호를 지른다.

네 마음의 눈 속으로 미끌어져 들어가봐 더 좋은 놀이터를 발견한 것 같지 않니 너는 가본 적 없다고 했지 허나 네가 본 모든 것은 천천히 사라질 것을

그래서 나는 너의 침대에서 혁명을 시작하지 (...) 모닥불 가에 서서 네 얼굴의 그 표정을 걷어내봐 너는 끝내 내 심장을 다 태워 없애진 않을 테지

여기까지 노래하더니 노엘은 다음 가사, 이 노래의 절정 부분을 부르지 않는다. 한국의 관객이 그 대목을 받아서 목매어 외쳐 부른다.

그래서 샐리는 기다릴 수 있어. 이미 늦었다는 걸 알고 있어 우리는 계속 따라 걷고 그녀의 영혼은 사라져가지만 분노에 차서 돌아보진 말자고 난 네가 그렇게 말하는 걸 들었네

나중에 들으니 오아시스도 한국 관객이 이 노래를 그렇게 따라할 줄은 몰랐다고 한다. 뜻이 분명치 않은 이 어렵고 사이키델릭한 가사를 한국 관중은 어감만으로 외우고 따라하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 록의 자의식은 구성된다. 어감만으로 외우고 따라하고 추억 속에 저장시키면서.

우리 로큰롤, 소문에서 로컬로 이행하기를

오아시스 공연 모습

공연이 끝났다. 10시30분쯤? 잘 기억나지 않는다. 생각이, 처음으로 돌아간다. 그들과 우리의 ‘시차’에 관한 생각으로. 사실 ‘시차’가 우리 로큰롤의 자의식을 구성해왔다. 형님은 오지 않습니다. 고도가 오지 않는다고 탄식하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처럼, 이 땅의 로큰롤 키드는 체념에 젖는다. 단비는 내리지 않는다. 그래도 묵묵히 록 음악을 듣고, 한다. 한번도 제때에 강림하지 않으사 단지 소문으로만 존재하는 그 로큰롤을…. 어느덧 그렇게 우리에게 로큰롤이 소개된 지도 반세기가 지났고 소문으로만 갈고닦은 우리의 로큰롤이 존재하기 시작한다. 시차 자체가, 하나의 문화를 구성하고, 그렇게 로컬의 정서는 시차와 관계없이 독립한다. 그렇게 소문에서 로컬로 이행해 갔으면 좋겠다고 희망해본다.

갔던 길을 되돌아온다. 길은 어느덧 텅 비어 있다. 오아시스의 노래말을 자꾸 되뇌게 된다. 분노에 차 돌아보진 말자. 일상적인 분노의 상태에 있는 우리들이지만, 그렇게 화가 잔뜩 나 백미러를 보지는 말자고 생각하면서 백미러를 보는데, 이런저런 생각에 젖어 천천히 가는 나의 뒷차를 보는 분의 잔뜩 화난 얼굴이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보인다.

사진제공 소니BM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