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영화읽기
음란 없는 웰메이드의 풍경, <음란서생>

<음란서생>이 세련된 비주얼로 인해 얻은 것과 잃은 것

<음란서생>은 김윤서(한석규)의 무능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당쟁 싸움에 희생양이 된 동생이 갖은 고문으로 망신창이가 되어 실려오고, 가족은 그에게 상소할 것을 요구하지만 그는 핑계를 만들어 그 자리를 피할 뿐이다. 당대 최고의 문필가로 이름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가 무능한 것은 재주가 없어서라기보다는 그것을 펼칠 용기가 없어서이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기

그런 김윤서에게 ‘추월색’이라는 필명 속에 자신을 숨기면서 그 재주를 뽐낼 수 있는 기회란 얼마나 매력적인가. 필명은 단지 기표가 아니라 그가 자신이 위치한 억압적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반칙왕>의 ‘가면’과 유사하다(<반칙왕>의 시나리오 작가였던 김대우 감독은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윤서에게 작가로서의 ‘안경’을 씌운다). 필명 뒤에 자신을 숨김으로써 윤서는 음란물이라는 하위문화의 ‘진맛’에 빠져들고 잃어버렸던 자신의 능력을 조금씩 회복해간다. 진맛이란 독자들이 텍스트를 통해 만끽할 수 있는 ‘꿈같은 달콤함’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인간은 대체로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법이다. 달리 말해 인간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아주기를 바라며, 이는 ‘인정투쟁’으로 이어지곤 한다. 창작의 주체로서 윤서는 독자의 꿈을 실현시켜주는 창작자가 되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자아 실현의 차원이라기보다는 타자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는 편이 옳다. 물론 이는 창작자 전반의 그리고 <음란서생>을 연출한 김대우 감독의 욕망이기도 하다.

또 다른 한편으로, 윤서는 왕의 여인인 정빈(김민정)의 호감을 얻는다. 윤서는 자신이 갖고자 하는 것은 갖고야 마는 성격(이러한 캐릭터가 제대로 구현되었는가는 의문이다)인 정빈에게도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윤서의 추월색으로서의 작가적 역량이 정빈과의 관계를 어느 정도 반영함으로써 얻어졌다는 점에 있다. 음란물 시장에서는 윤서라는 이름을, 정빈과의 관계에서는 추월색이라는 이름을 감출 수 있을 때만 ‘윤서-추월색’은 타자의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황가(오달수)의 보물이 될 수 있다. 달리 말해 창작 과정에서 ‘윤서’는 ‘정빈’과의 로맨스를 ‘추월색’의 입장에서 다듬어 ‘독자’와 소통하지만(이 역의 과정도 성립한다), ‘정빈-윤서’(로맨스의 영역), ‘추월색-독자’(음란의 영역)가 맺는 관계는 각각 독립적인 영역을 유지해야 하며, 이것이 섞여 정빈이 독자가 되거나 정빈과 추월색이 만난다면, 각자의 영역을 유지시키던 달콤한 꿈은 끔찍한 악몽으로 돌변할 것이다.

음란과 로맨스, 말과 시각적 이미지의 분열

특히 음란물과 정빈 모두가 금지의 영역에 존재한다는 것은 윤서를 더욱 아슬아슬한 위치로 몰아간다. 문제는 음란과 로맨스 사이에서 위태롭게 외줄을 타는 윤서의 극중 위치가 <음란서생>이 지닌 근본적인 딜레마와 닮았다는 점이다. 음란물과 왕비라는 극과 극의 금지 대상을 하나의 수렴점으로 몰아가려는 시도는 꽤 흥미로울 수 있지만, 이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이는 <왕의 남자>가 ‘예술적 놀이’라는 자신의 소재를 로맨스의 영역으로까지 확장시키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까다롭다. 음란과 뒤섞인 로맨스를 자신의 ‘진맛’으로 인정할 현대의 관객은 그리 흔하지 않으니 말이다. ‘윤서-추월색’이 이 두 영역을 조화시키지 못한 대가로 참혹한 고문을 당한 뒤 익명의 섬으로 쫓겨나야 했던 것처럼, <음란서생> 역시 이 두 영역의 조화에 실패하고 분열된 텍스트로 찢기고 만다.

먼저 <음란서생>은 극의 초·중반에는 음란의 영역을, 후반에는 로맨스의 영역을 두드러지게 함으로써 스스로를 분열시켜버린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 더 중요한 분열은 음란물이라는 소재와 영화의 로맨스를 뒷받침해주는 우아하고도 웰메이드한 시각적 스타일 사이에서 발생한다. 음란이란 말 그대로 ‘도리에 어긋나 어지로운 것’이다. 음란이 애초에 아름답고,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것이었다면 굳이 금지될 필요가 없다. 달리 말해 음란이 금지 대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다듬어지기 이전의 날것 그대로의 욕망을 솔직하게 까발리기 때문이다. 물론 음란과 웰메이드가 결합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음란서생>은 음란한 욕망에 대한 탐구가 아닌 창작 행위에 대한 자의식적 논평과 정빈과의 로맨스, 그리고 무엇보다 웰메이드한 스타일에 그 지향점을 두면서 음란을 희생시킨다. 즉 음란함이 주는 카니발적 쾌락과 전복적 시도를 오히려 웰메이드한 시각적 스타일의 우아함이 막아버린 것이다.

<음란서생>의 음란과 웰메이드적 스타일의 분열은 말(글)과 시각적 이미지의 분열이기도 하다. <음란서생>에서 시각적 이미지가 자신의 우아함을 버리고 음란을 묘사할 때는 그것이 말의 보충물로서 기능할 때이며, 대체로 웰메이드한 시각적 이미지는 자신의 우아함을 음란으로 물들이려 하지 않는다. 이는 두 장면을 대조할 때 명확하게 드러난다. 장면 하나. 탁자를 두고 성 체위에 대한 갑론을박하는 윤서와 광헌(이범수)의 대화를 보조하는 역할로서의 시각적 이미지. 이같은 방식 속에 시각적 음란함은 광헌이 그리는 이야기 속 삽화 같은 보조적 위치를 가질 뿐이다. 반면에 말(글)에서 독립하여 시각적 이미지 자체가 음란함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에서 <음란서생>은 자신의 우아함을 잃지 않기 위해 금욕을 선택한다(실제로 몸의 전시에서 <음란서생>은 18세 관람가가 무색할 정도이다). 윤서와 정빈간의 정사 장면에서, 정빈의 몸에 걸친 ‘조선식 브래지어’를 인상적으로 보여주고, 몸이 아닌 사물에 관객의 시선을 붙들어맴으로써 몸이 음란할 수 있는 기회를 ‘물신화된 사물’(마르크스가 아닌 프로이트적 의미에서)로 대체한다. 이 장면에서 관객은 몸이 아닌 물신화된 사물의 전시에 만족해야 하는데, 이는 겉으로는 음란을 말하면서도 이를 보여주기는 거북해하는 <음란서생>의 이중적 태도를 보여준다. 물론 이는 음란과 로맨스의 영역을 양분하면서 두 영역의 뒤섞임이 파국으로 이어지는 서사 구조에서부터 예고된 것이다.

<음란서생>의 매력은 창작 과정에 대한 자의식적 논평과 그것이 비록 이미지가 아닌 말의 힘에서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음부를 음부라 부르지 못하고 음경을 음경이라 부르지 못하는’ 억압의 층위를 뚫고 나오는 카니발적 쾌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윤서가 의금부에 끌려간 이후, 음란함없이 오직 로맨스에만 집착하기 시작할 때 이러한 매력은 증발된다. <음란서생>은 윤서와 정빈뿐만 아니라 조 내시에서 왕까지 동원하며 질보다 양으로서 로맨스를 강화하고, 특이한 살해 도구나 하드고어(hardgore)적인 신체의 전시, 그리고 무엇보다 색감이 두드러지는 궁궐 실내 공간의 이미지를 강화하지만, 음란의 카니발적 생명력을 되살리기는 역부족이다.

역사의 풍경을 재창조하는 현대 사극

<음란서생>은 지금의 한국영화의 대세처럼 보이는 웰메이드한 시각적 스타일의 추구가 지닌 위험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특히 이러한 웰메이드한 시각적 스타일이 사극과 만났을 때, 그것은 지금의 우리에게는 낯선 공간이나 사물들의 물신적 전시에 치중하는 경향으로 이어질 수 있다. 현재 다시금 부활한 사극은 일정한 경향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혈의 누>가 하드고어적인 신체와 제지소의 실내, 다양한 검시도구 등 같은 사물들의 전시에 공을 들인다면,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왕의 남자> 그리고 <음란서생> 등은 궁중이나 사대부들의 화려한 실내 공간과 그 속에 놓인 다양한 사물이나 색감이 풍부한 의상을 시각적으로 전시하려는 전략을 공유한다. 이는 지금의 사극이 민속(folk)적 삶이 아닌 사대부나 왕의 생활 공간 속에서 사건을 전개해나가는 것과도 관련있다. 이들 작품들은 조선조의 (성에 대한) 억압적 문화에 내재된 은밀한 욕망을 들춰내는 것뿐만 아니라 더 핵심적으로는 사대부나 왕의 생활 공간에서 찾을 수 있는 다양한 볼거리(물론 이는 현대적으로 변형된 것이다)를 전시함으로써 그 시대를 ‘익명적이고 이국적인 풍경’으로 제시하는 데 관심을 보인다.

물론 이는 갑작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이러한 경향이 한국사회와 징후적으로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를 아쉬운 대로 배제하고) 한국영화의 내적 발전 과정으로만 말한다면, 이는 2000년대 초반 불어닥쳤던 일련의 향수 영화에서 다양한 소품을 통해 한국의 70, 80년대 근대사를 추억으로 호명했던 방식의 변형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사극에서는 그것이 추억의 호명이 아닌 ‘역사의 풍경’을 재창조하려는 시도와 관련있다는 점에서 질적인 차이가 있다. 일본의 민속학자였던 이케다 야사부로가 지적했던 것처럼, 풍경은 조망되는 대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망하는 인간에게 존재한다. 때문에 인간이 풍경을 인식한다는 것은 그 이전에 각종 예술(그리고 교육) 표현에 의해 산출된 심미적 인상이 전제되는 것이고, 결국 풍경이란 우리 외부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의식에서 만들어진 역사적 산물이다(이에 대해서는 <표상 공간의 근대> 2장을 참고하라). 이러한 면에서 지금의 사극들은 새롭게 ‘역사의 풍경’을 재창조하려는 시도로 읽힐 수 있는데(이러한 경향이 갖는 현재적 의미에 대한 분석은 또 다른 글이 필요할 것이다), 이는 80년대 ‘에로 사극’이 여성 몸의 전시를 통해 역사를 외설화했던 것과 구별되는 것이다. <음란서생>은 재창조된 역사적 풍경이 심미적으로는 꽤 매력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음란함이 존재했던 실재로서의 역사적 풍경을 배제한 대가로 얻어졌다는 면에서 동의할 수 없는 작품이 되고 말았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