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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괴물은 있다
김도훈 2006-03-24

봉준호 감독은 고등학교 때 잠실대교를 기어오르는 괴생물체를 목격했고, 감독이 되면 꼭 그걸 영화로 만들어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했다고 한다. 봉 감독의 신작 <괴물>의 티저 예고편에 등장하는 말이다. 정신분석에 능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봉군은 투신자살에 실패한 샐러리맨이 잠실대교를 꾸역꾸역 기어오르는 것을 목격했고, 그 정신적 트라우마로 인해 샐러리맨을 괴물로 착각하기 시작했으며, 자가조작된 기억을 구실로 한국 자본주의의 상징인 한강에 대한 사회드라마를 만들고 있는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봉 감독의 말을 문장 그대로 해석하고, 문장 그대로 믿는다. 나도 이를테면 ‘괴물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괴물을 처음으로 믿기 시작한 건 20여년 전이었다. <소년중앙>의 ‘세계의 불가사의’ 섹션을 보는데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의 사진이 눈을 잡아챘다. 놈의 이름은 네시였다. 스코틀랜드의 네스호에 살고 있는 놈은 고대로부터 살아남은 수장룡(首長龍)이라 했다. 학교에 가자마자 흥분에 가득 찬 목소리로 외쳤다. “너희가 네시를 알어?” 애들은 물었다. “증거 있냐?” 나는 말했다. “<소년중앙>에 나왔거등!” 당시 <소년중앙>은 초등학생들의 바이블이었다. 하지만 신앙심이 옅은 아이들은 의심에 가득 찬 눈초리로 되물었다. “본 적 있냐?” 나는 대답 대신 잡지에 실린 사진을 디밀었다. 열악한 인쇄로 뭉개진 33년 사진이었으나 아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개중에도 똑똑한 놈들은 있었다. “호수에 사는 고기를 다 잡아먹고나면 굶어죽었을 텐데.” 다행이었다. 나는 더 똑똑했던 것이다. “네스호와 북해는 칼레도니아 운하로 연결되어 있어서 네시가 맘대로 드나들 수 있거등. 바닷물고기는 너무 많아서 다 못 잡아먹거등.” 자라면서 세상에는 네시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콩고의 호수에는 모케레 음베음베라는 괴물이 살고, 캐나다의 오카나간호에는 오고포고가 살고, 아이다호의 페이에트호에는 슬리미 슬림이 살고, 스웨덴의 스톨스혼호에는 스톨츠쥬츄어렛이 살고 있었다. 갑자기 세상은 괴물로 가득했고, 나는 시골을 달리는 차창 밖으로 저수지가 보일 때면 침을 꼴깍 삼켰다.

나이가 들면 신앙도 옅어지는 법이다. 게다가 네시가 없다는 증거들도 속속들이 발견되었다. <BBC>는 음파탐지기와 인공위성자동위치측정시스템까지 동원해 호수를 샅샅이 뒤진 뒤 “네시는 없다”고 결론내렸고, 네시의 유일한 증거인 33년 사진(위)을 찍었던 외과의사 윌슨은 죽기 직전에 사진이 조작된 것이라 고백했다 한다. 하지만 머리는 과학적 증거들을 따르라는데 수줍은 가슴은 차마 그럴 수가 없단다. “어머, 아직도 동심이 남아 있었네” 따위의 협잡꾼 같은 소리를 하자는 건 아니고. 언젠가 사진기를 들고 네스호로 가야겠다고 다짐하는 30대와 고교 시절 목격한 잠실대교 괴물을 영화로 만드는 30대도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거다. 레이 해리하우젠과 <소년중앙>을 보고 자란 세대가 나이를 먹었고, 특수효과도 이만하면 쓸 만해졌으니, 한국영화도 덜 자란 성인의 몽상을 건드려줄 만한 이야기를 슬슬 늘어놓을 때가 되지 않았나. 혹시 어릴 적에 성수대교나 한남대교를 기어오르는 괴생명체를 보신 감독님은 없으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