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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대 축구 해설위원 3인방 [1]

백일주는 잘 드셨습니까. 수험생의 마음으로 대망의 월드컵을 기다리는 골수 축구팬이시라면 3월1일 앙골라전을 시청한 뒤 한잔 하셨겠죠. 비록 차가운 깡소주였을지라도 만일 6월9일부터 시작되는 월드컵을 안주 삼아 드셨다면 당신의 속은 산해진미로 그득했을 겁니다. 한국의 16강 진출 여부와 우승팀에 대한 예측이 삼겹살과 광어회 같은 메인 안주였다면, 이번 월드컵을 통해 세계의 스타로 떠오를 선수에 대한 전망은 홍합탕 같은 서비스 안주쯤 됐겠죠. 아, 또 다른 안주가 있었다고요. 각 방송사가 월드컵을 앞두고 새롭게 영입한 신세대 축구 해설위원에 대한 품평이라고요. 모두 30대이고, 축구선수가 아니라 마니아 출신이며, 해박한 지식과 분석적인 설명으로 유럽 축구를 가까이 접하게 해줬다는 공통점을 지닌 박문성, 서형욱, 한준희(가나다순) 해설위원 말씀이군요. 짧은 경륜 탓에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팀 경기 해설자로 나설지는 미지수입니다만, 이들이 다른 주요 경기에서 해박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줄 것만은 확실하더군요. 젊은 축구팬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고 있는, 그래서 각 방송사의 시청률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이들 세명을 만나봤습니다. 아울러 2006 독일월드컵에 대한 이들의 전망도 들어봤습니다. 자, 그럼 축구 해설계의 넥스트 제너레이션 삼인방을 소개합니다.

과학철학을 공부한 원조 축구 마니아

한준희/ KBS 해설위원·축구 커뮤니티 ‘사커라인’ 필자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비슷한 외모인데 마이크만 붙들면 격정적인 해설을 쏟아내는 한준희(36) 해설위원은 최근 인터넷에 가장 많이 이름이 오르는 축구 해설자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전을 중계할 때 그가 외쳤던 “아∼악! 반데사르∼”와 “아∼악! 박지성∼” 등의 ‘샤우팅’이나 한준희 위원과 송재익 캐스터의 가상중계 글은 축구에 관심없는 이라도 흥미를 느낄 만하다. 때때로 캐스터보다 더 흥분하고, 경기 중간중간 갖가지 정보를 청산유수로 설명해주는 그는 스스로를 ‘원조 축구 마니아’라고 말한다.

한준희 위원은 어릴 때부터 ‘구’자가 붙은 스포츠에는 유난히 민감했다. 초등학교 시절 축구, 야구, 배구, 농구 선수 이름 수천개를 줄줄 외우고 다녔을 정도. 그의 기억 속 가장 오래된 축구 경기는 1976년 박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말레이시아와의 경기에서 4 대 1로 지다가 차범근 선수가 종료 7분을 남기고 내리 세골을 넣어 무승부를 기록한, 바로 그 명승부다. 70년대와 80년대에는 MBC를 통해 선보인 독일 분데스리가 중계에 마음을 빼앗겼다. “세상엔 저런 축구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축구에 대한 열정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 것은 미국 유학 시절인 2000년 무렵이다. 서울대학교 해양학과 출신으로 대학원에서 과학철학으로 전공을 바꿨던 그는 박사과정을 밟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스포츠광이었던 그가 미국에서 만난 것은 미식축구도, 야구도, 농구도, 아이스하키도 아닌 축구였다. “마음만 먹으면 미국만큼 쉽게 축구를 볼 수 있는 곳도 없다. 케이블 채널 중에는 잉글랜드, 스페인, 이탈리아 등 3대 리그뿐 아니라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스코틀랜드, 브라질, 아르헨티나 심지어 칠레리그까지 보여주는 곳이 있다.” 주중에는 하루 1∼2경기, 주말이면 하루 4∼5경기를 보며 해외 축구의 세계로 깊이 들어간 그는 한 언론사 스포츠 게시판에 취미로 경기 관전평을 쓰기 시작했다. 곧 그의 글을 본 여러 언론과 축구 사이트로부터 연락이 쇄도했고, 그중 “가장 열악해 보이는” 곳인 ‘사커라인’에 글을 기고했다. 2002년 사커라인이 개편할 때는 학업을 접고 아예 한국으로 돌아왔다.

방송과의 인연은 2003년 MBC에서 네덜란드리그 녹화중계로 시작됐다. 사커라인에 오른 그의 글이 계기가 됐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선수, 클럽, 각 나라 국가대표팀 등의 역사를 종횡무진으로 꿰고 있는 그의 글 덕에 사커라인 회원 수는 300명에서 출발해 수만명대(현재는 15만∼20만명)까지 늘고 있었던 것. 지난해에는 MBC ESPN에서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를 중계했고, KBS의 ‘비바 K리그’에 출연하기도 했다. 올해부터는 KBS 전속 해설위원이 됐다.

그는 원조 마니아답게 “그동안 지켜본 경기 수가 엄청나게 많고, 과거 경기는 비디오 자료로 봤다”는 점을 비교우위로 내세우고 있다. 실제로 그의 해설은 경기 흐름을 읽는 일뿐 아니라 선수들의 신상, 팀의 과거사 등 폭넓은 정보까지 제공한다. 또 하나, 그의 중계는 재밌다. 경기가 이뤄지는 내내 톤은 매우 높고, 때때로 목소리가 ‘뒤집어질’ 정도로 올라간다. “원래 다혈질이라 흥분을 잘하”는 성격 탓이기도 하겠지만, “축구 중계에서 중요한 것은 정확한 정보와 함께 엔터테인먼트”라는 ‘중계철학’의 영향 때문이기도 할 것. “국가대표 경기는 좀더 경륜있고 지명도 있는 분이 하는 게 낫고, 나는 내가 최상의 서비스를 다할 수 있는 영역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한준희 위원은 축구의 저변을 넓히고 시청자의 흥미를 증폭시키고자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축구 전문 기자, 방송국에 가다

박문성/ SBS 해설위원·축구 월간지 <베스트 일레븐> 차장

“때려! 때려! 꼴이에요!” 새벽잠을 떨치며 박지성, 이영표 선수의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보던 이들이라면, 일순 정적을 깨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박력과 리듬감을 갖춘 박문성(32) 해설위원의 축구 해설을 듣고 있노라면 절도가 느껴진다. 정돈된 용어 선택과 경기의 맥을 끊지 않는 매끄러운 진행으로 인기의 폭을 넓혀가고 있는 그는 노력하는 해설자다. 얼마 전 한국 국가대표팀의 A매치(올해 2월12일 코스타리카전)에서 해설을 맡을 정도로 ‘고속승진’한 것 또한 부단한 노력 덕이었다. 자신의 ‘본업’인 축구 기자 일 외에도 중계방송, 포털 사이트 기고, 라디오와 DMB 방송 출연 등 숨찬 일정 속에도 그는 축구를 하루에 한 경기 이상 보고, 또 각종 자료를 들여다보고 있다.

사실 박 위원이 유달리 노력을 앞세우는 데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 그건 ‘출신성분’ 때문이다. “월드컵을 중심으로 한 국가대표팀 경기와 간간이 중계되는 유럽 클럽팀 경기를 시청하며, 축구를 대한민국 남자의 평균치보다 약간 더 봤을 정도”였던 그의 삶은 1999년 급작스럽게 바뀐다. 대학을 졸업한 뒤 기자가 되려 했던 그가 축구 전문지 <베스트 일레븐>에 입사한 것. “면접 자리에서 당시 편집주간이던 김덕기 한국축구연구소 사무총장을 만났는데, 말하는 내용이나 태도가 멋있어 그분께 한번 배워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때부터 축구를 생활의 중심으로 받아들인 그는 숱하게 많은 경기를 봤고, 1970년 창간한 뒤로 엄청난 양의 자료를 확보해온 <베스트 일레븐> 자료실을 도서관 삼아 축구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익혔다. “기자로서 경기장에서 선수와 감독을 만났던 게 가장 도움이 됐다. 현장에서 생긴 궁금증을 그 자리에서 풀 수 있었으니까.”

그러던 그가 방송을 접한 것은 2001년이다. 당시 2002 한·일 월드컵 공식 가이드북 필자였던 그에게 KBS 라디오에서 월드컵 소개를 부탁했던 것. 그해 가을에는 교통방송에서 1주일에 한번씩 방송되는 <월드컵 이야기>에 출연했다. 2002년 봄에는 KBS 라디오의 <스포츠 하이라이트>에 나갔고, 이런 활약을 바탕으로 월드컵 기간 중에는 MBC <오늘의 월드컵>에 출연하기도 했다. 월드컵을 계기로 송종국이 네덜란드 페예노르트로, 설기현이 벨기에 앤트워프에 진출한 2002년 후반, 그는 이들 중계권을 확보한 iTV의 해설자로 일약 발탁됐고, 2003년에는 MBC ESPN으로 옮겨 네덜란드리그와 유럽 챔피언스리그,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를 중계했으며, 올해 초엔 SBS로 스카우트됐다. “역시 노력밖에 없다. 첫 중계를 맡았을 때 김덕기 주간께서는 ‘10분짜리 방송을 할 때 2∼3시간 이상 준비하지 않으면 망친다. 2시간짜리 중계를 할 때는 얼마나 준비를 해야겠나’라고 충고를 해주셨다.”

그는 자신이 해설위원이 된 것을 행운이라고 말한다. 축구 기자라는 직업을 가졌기에 해설까지 병행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물론, 그가 생소하기 짝이 없는 방송에 쉽게 적응했던 데는 고교 시절 스쿨밴드에서 보컬을 맡았었고, 대학 시절 집회 등을 이끌었던 이력이 도움을 줬을 터. “시청자가 경기 자체에 몰입할 수 있도록 간결하고 흐름에 맞는 해설을 하는 게 목표”라는 그는 조만간 대한축구협회 강습회를 통해 축구 지도자 자격증을 딸 계획까지 세워놓고 있다. “축구 보는 눈을 틔우기 위함”이 가장 큰 이유라고 말하지만, 그의 속내는 내친김에 비선수 출신 축구감독이라는 새로운 장을 열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러스트레이션 이우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