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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감독 김형구
2001-08-17

당신은 감정을 찍었군요 (2)

감독 가장 가까이서 감정을 포착하는 눈

김형구의 카메라는 선동하지 않지만 끊임없이 도발한다. 그리고 정확하다. 그가 만들어내는 숏은 넓게 찍든 타이트하게 찍든 고정돼 있든 흔들어서 찍든간에 찍어야 하는 내용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찍어낸다. 단편 <비명도시>부터 <비트> <태양은 없다>, 개봉을 앞둔 <무사>까지 김형구와 짝패를 이루어 작업해온 김성수 감독은 “좋은 시나리오를 구별하는 좋은 눈에, 미세한 움직임의 순간까지 완벽히 포착해내는 타고난 감각. 즉 문학적 머리, 감각적인 손을 가진 김형구는 단순히 그림을 찍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스토리를 이해하고 그 스토리를 영상으로 풀어내는 방식을 고민하는 지적인 촬영감독이다”라고 말한다.

조민환 프로듀서 역시 “촬영이란 풍경을 찍는 행위가 아니라 감정을 찍는 행위다. 영화를 보다가 똑같은 바스트숏이라도 조금 더 들어갔으면, 조금 더 빠졌으면 하는 느낌이 드는 건 감정의 사이즈가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형구 감독이 찍은 <박하사탕>을 보면 더도 덜도 아니고 딱 감정의 사이즈만큼 들어간다. 시나리오 해석능력이 뛰어나다는 것말고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을 만큼 연출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게 보인다. 그것은 굉장한 능력이다”라고 극찬한다.

그러나 김형구의 카메라는 스타일리시한 반면 특정한 스타일을 고집하지도 않는다. 김성수를 앞뒤로 하여 이광모, 박광수, 이창동, 변혁, 허진호에 이르기까지 김형구의 카메라는 늘 감독의 가장 가까운 뒤에서 더 나아가지 않고 머문다. “한편의 영화는 결국 감독의 것이다. 촬영은 한 걸음 뒤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그때그때 감독의 의도와 스타일을 충분히 고려해서 찍는 편이다.”

그의 이런 ‘유연함’이야말로 <비트>부터 <아름다운 시절> <태양은 없다> <이재수의 난> <박하사탕> <인터뷰> <무사> <봄날은 간다>까지 때로는 130컷짜리 영화에서 때로는 2500컷이 넘는 영화로, 정(靜)과 동(動), 피아니시모와 포르티시모의 극단을 아무렇지 않게 오고갈 수 있는 힘이다. 그러나 역으로 그 어디에도 ‘김형구만의 영상’을 드러내지 않는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현하는 이들도 있다. 늘 기대한 만큼의 퀄리티를 보장하는 95점짜리 촬영기사지만 100점이 될 수도 50점 밑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무리한 시도를 감행하지 않는, 태생적으로 수동성을 안고 태어나는 촬영자로서의 운명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는 듯한 태도에 대한 우려이다.

“개인적으로 촬영감독이 소리지르고 나서는 현장이 썩 좋아보이지 않는다. 성격적으로 적극성이 결여된 부분도 있고. 하지만 벌써 12편 가까이의 작품을 찍고나니 어떤 면으로 젊은 감독들이 나에게 확인받고 싶어하고, 의지하려고 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이럴 땐 나도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그러는 게 좋은 건지 아닌지는 아직 확신이 안 선다. ”

시적 서정성 vs 공격적 테크닉

최근 김형구 감독은 두편의 작업을 마치고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봄날은 간다>는 김형구의 서정성이 잘 녹아 있는 영화고, <무사>는 김형구가 가진 테크닉을 가장 잘 이용한 영화가 될 것”이란 것이 조민환 프로듀서의 귀띔이다. <무사>는 김형구 개인에게 작은 변화를 안겨주었던 작품이다. “민환이가 ‘형이 달라졌어’라는 말을 했다. 그전에, 지금도 많은 부분 그렇지만, 나는 소극적인 점이 많고 나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무사>는 전체적으로 보면 황무지 사막, 산과 숲, 그리고 토성이 큰 배경이었다. 사막과 토성은 그럭저럭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는데 숲은 영 자신이 안 생겼다. 김성수 감독은 숲속 전투신을 완전히 베트남전 밀림 느낌이 나길 바랐는데 실제 촬영이 시작되던 시기가 가을이고 이미 잎이 다 떨어져서 영 볼품이 없었고 어느 부분 욕심을 버린 듯했다. 그런데 갑자기 김 감독이 원하는 그림이 뭔지를 아는데 그냥 그렇게 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스탭들을 데리고 산꼭대기에 있는 아직 성한 나무를 옮겨심었고 빅 클로즈업에 극단적인 망원으로 꽤 밀림 느낌이 나게 찍어냈다. 물론 조금만 사이즈가 벌어져도 듬성듬성한 게 보이긴 했지만 예전 같으면 그냥 가자고 했을지도 모를 일에 해보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이 스스로에게 놀란 부분이다.”

극한을 오고가는 중국 날씨 속에 반년간의 혹독한 촬영, 철저한 준비 없이는 작업에 들어가지 않는데다가 ‘코뿔소’ 같은 추진력을 가진 김성수 감독과의 <무사> 이후 들어간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는 다시 한번 그에게 긴 호흡을 요구한 영화이자 인생의 스승인 유영길 촬영감독의 그림자를 절실히 느끼게 해준 영화였다. “아카데미 졸업하고 운좋게도 장선우의 <성공시대>, 박광수의 <칠수와 만수>, 이명세의 <개그맨> 같은 좋은 감독의 작품에서 유영길 촬영감독의 조수로 일하게 되었다. 그때 생각하면 카메라 다리 붙들고 덜덜덜 떨었던 것밖에 기억이 안 난다. 한번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잠깐 졸다가 깼는데 등에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유영길 감독은 생전에 김형구를 특별히 아낀 것으로 유명하다. “<봄날은 간다>는 유 감독님의 유작이 된 를 같이 했던 허진호 감독의 작품이라 처음부터 정말 신경이 많이 쓰였다. 게다가 허진호 감독의 스타일은 뚜렷한 콘티가 있는 게 아니라 가령 어떤 신을 찍을때 ‘이런이런 느낌이다’라고 설명하는 게 전부였다. 리허설도 많이 하지만 평균 테이크가 열번도 넘었다. 뚜렷한 NG나 실수가 있어서가 아니라 ‘더 좋은 것, 또 다른 것’을 만들어내기 위함이었다. 촬영은 거의 픽스에 와이드숏이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허 감독이 배우들에게 조금이라도 다른 것을 끄집어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였다. 처음엔 ‘이번 작품은 컷도 많이 나누고 카메라도 많이 움직이자‘고 했는데 결국엔 원래 스타일대로 찍었다. 둘 다 말이 많은 편이 아니라 멀뚱하니 필요한 이야기만 하고, 그냥 설명하면 듣고, 찍고 ‘됐네요’ 하면, ‘컷’이었다. 사전에 어떻게 찍어야겠다는 생각 이전에 이건 허진호라는 작가의 영화이니 감독의 스타일을 따라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별말 없이 작업했는데 서로 뭔가 통한 건지 그냥 물 흐르는 것처럼 흘러갔다.”

`조력자`로서의 새로운 자리매김

김형구는 얼마 전 큰 프로포즈를 받았다. <몽유도원도>의 감독을 맡으며 방한한 첸카이거로부터 함께 일해주겠냐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올해 초 베이징전영학원에서 열린 한국영화전에서 <아름다운 시절>과 <태양은 없다>를 본 첸카이거는 차기작의 촬영감독으로 김형구를 직접 지목했고, 원래 <몽유도원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을 했는데 후반작업중인 <킬링 미 소프틀리>와 <몽유도원도> 사이에 찍을 <베이징 바이올린>도 찍어주길 원했다. “영화공부하던 학생 시절부터 <황토지> 같은 영화를 만든 첸카이거는 나의 꿈이었이었다. 그의 제안은 영광이고 거절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다만 <플란다스의 개>를 만든 봉준호 감독이 신작 <날보러 와요>를 하자며 오랫동안 이야기를 해왔고 영상원 수업에 지장을 줄까 해서 망설이는 부분이 있다. 봉 감독은 ‘첸카이거니 제가 어쩌겠어요’라고 하지만 미안한 마음이 크다. 만약 <킬링…>의 작업이 조금 늦어지면 학교 일정에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걱정은 첸카이거와 <패왕별희>를 비롯해 늘 함께 작업했던 촬영감독 구창웨이보다 잘 못 찍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다.” (웃음) 30대 중반 유학길에서 돌아왔던 패기만만했던 신세대 촬영감독은 이제 12편의 영화를 거쳐 40대 중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나는 늘 모자르고, 젊고, 시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그건 나만의 생각이었던 것 같다. 자기가 나이든다는 걸 모르는 거지. 이제 내가 응석부릴 감독들보다는 내 경험을 이야기해주고 그들의 능력을 더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단순한 도우미가 아니라 진짜 조력자로서 말이다.” 작가영화와 상업영화를 오가면서도 늘 알맞은 색깔로 만족스럽게 채색해왔던 창조적 촬영자 김형구. 이제 그가 그저 지적인 100점짜리 테크니션에서 머무느냐 아니면 자기문법을 구축한 영상작가로 자리매김하느냐 하는 것은 그의 개인적 고민이자, 유영길의 부재를 안고 있는 한국영화계가 김형구의 카메라에 부여한 무게이기도 하다.

글 백은하 기자 lucie@hani.co.kr·사진 손홍주 기자 lightson@hani.co.kr

필모그래피

1993년 단편 <비명도시>

1994년<우연한 여행>

1995년 <닥터봉>

1996년 <박봉곤가출사건>

1997년 <비트>

1998년 <아름다운 시절>

1998년 <태양은 없다>

1999년 <이재수의 난>

2000년 <박하사탕> <인터뷰>

2001년 <무사> <봄날은 간다>

▶ 당신은 감정을 찍었군요 (1)

▶ 당신은 감정을 찍었군요 (2)

▶ 김형구가 말하는 “잊기 힘든 이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