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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초보의 영화 만들기 [1]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나도 정재영처럼 ‘원정’을 떠나기 전에, 내 첫 ‘영화원정’을 떠나기 전에, <욥기>의 구절이라도 외웠어야 옳았다, 돌이켜보니. 그냥 나는 김기덕의 영화와 경쟁하겠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초저예산과 초긴박 촬영일정을 김기덕적인 의지로 다 맞추겠다, 그것 말고는 아무런 욕심이 없었다. 카메라 시점은 어떻게 만드는지, 180도 가상선은 어떻게 지키는지 또는 창의적으로 어기는지, 대화신에서 카메라는 어떻게 이동해야 긴장감이 생기는지, 거울과 유리창에 끈질기게 달라붙는 붐마이크는 어떻게 치울 것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도대체 내가 욕심을 낼 수 있는 게 뭐가 있으랴. 겨우 2회차 촬영에 뭘 할 수 있었으랴.

그러나 설령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더라도 욕심은 다부졌어야 옳았다는 생각이, 상영회를 하는 청평산장에서 퍼뜩 들었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연쇄살인극이 일어나면 딱 어울릴 으스스하고 휑하니 넓은 산장 안에서, 사람들이 내 짧은 영화에 아주 지루해하며 몸을 비비 틀고 있을 때, 나는 공개 처형대에 매달린 느낌이 들었다. 여기서 웃어야 된다고. 아니 그렇게 작게 웃으면 어떻게 해. 이거 웃기려고 사흘을 잠도 안 자고 편집했다고. 그러나 내 소리없는 아우성은 끝내 관객에게 도달하지 못했다. 내 작품이(정말 죄송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쓰레기’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첫순으로 상영되는 순간부터 온몸이 중력에 이끌려 땅속으로 꺼져드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다음 작품이 상영될 때 나는 눈을 뜰 수 없었다.

이렇게 나의 유치찬란한 첫 작품이 태어나고 빛을 보았다. 이 어리석음의 기록이 영화를 꿈꾸는 자에게는 격려가, 영화를 만드는 자에게는 우쭐해지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네 영화는 미약하였으나 그 제작기는 심히 창대하리라. 지금으로서는 이것이라도 소망해야 한다.

시나리오 - 지옥에서 살아나오다

우리 오빠 왜 사귀어? 돈이 있어, 차가 있어, 면허가 있어? - <용이 된 사나이> 중에서

<씨네21>에서 잠시 다른 부서로 간 사이에 덜컥 한겨레 영화제작학교에 등록하고 말았다. 휴직을 하고 임상수 감독의 연출부로 들어가려는 계획이 물거품이 된 뒤 딴짓하기 2탄이었다. 그러나 다시 <씨네21>로 발령을 받으면서 두루 여러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게 되었다. 남들은 취재하느라 밤새는 데 말이지. 그렇다고 잠깐 있던 부서가 널널했단 얘기는 아니다. 외딴섬 같은 곳에서 남몰래 조용히 학교를 다닐 작정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개강을 했다. <광식이 동생 광태>의 김현석 감독이 담임 강사다. 학교 일정이 너무 바싹 붙어 있어서 개강 뒤인 1월 초부터 시나리오를 써야 했다. 김 감독 강의 중에 귀에 쏙 들어온 말은 두 마디였다. 끝을 생각하고 쓰라는 말, 그리고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얘기를 하라는 말이었다. 아니, 귀에 들어온 게 아니라 가슴을 후벼파고 들어왔다고 말해야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텅 비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러고보니 이제껏 쓴 난삽한 습작들은 끝을 생각하지도 않고 무슨 대가라도 되는 양 생각 내키는 대로 장르 따위는 생각지도 않고 썼었다. 그러니 당연히 끝은커녕 중간도 모르고 흘러간 것들이다. 정말 하고 싶은 얘기가 아니라 어디서 들은 얘기들이다.

귀로는 수업을 들으며, 등으로는 식은땀을 흘리며 내 인생의 단 하나의 시나리오를 생각했다. 그랬더니 입시날 수험표를 빠뜨리고 와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입사시험에서 답안을 밀려 쓰고, 소개팅에선 여자 앞에서 손수건으로 땀을 닦다가 볼일을 다 본 소심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시나리오 경선을 앞둔 1월 중순까지 시나리오를 만지작거렸다. 그 소심한 주인공의 이름을 ‘새가슴’으로 짓고, 그가 우여곡절 끝에 성장하는, 뻔한 이야기를 만들었다. 제목을 <용이 된 사나이>라고 지었다. 시나리오 독회에서 조금 관심을 받기는 했지만 ‘후끈’ 정도는 아니었다. ‘대사가 많다’, ‘신이 많다’, ‘단편 영화적 구성이라고 보기엔 길다’ 등의 반응에 입술이 바짝 타올랐다. 김현석 감독이 마무리를 지었다. ‘가슴으로 쓴 게 아니라 머리로 쓴 것 같다.’ 음, 치명타군. 첫 연출은 글렀어. 나는 얼굴 위로 스멀스멀 기어올라온 절망감을 감추느라 바빴다.

얼마 안 있어 시나리오 경선. 자기 시나리오를 사람들 앞에서 설명하는 ‘피칭’이 있고 그 뒤에 투표가 있을 예정이었다. 두어번 고친 시나리오를 피칭했다. 반응은 여전히 미지근했다. 오세형처럼 ‘데쿠파주’니 하는 유창한 얘기도 못했고, 윤성아처럼 친화력을 발휘하지도 못했다. 영화는 친구들의 우정으로 만드는 거지만, 그 친구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유혹의 기술에 능통해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결국 경선에서 세 작품이 뽑혔고, 나머지 작품 가운데 하나를 더 뽑을 예정이었다. 두 작품이 동수였는데 여기서 한 작품을 재투표로 뽑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삼류영화의 반전이 있었다. 김 감독이 의사진행 발언을 했다. 아깝게 떨어진 다른 많은 작품들에도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애초에 재투표 자격이 없던 내 작품이 그래서 후보로 올라갔고, 결국 내 작품과 김성환의 작품이 최다득표를 기록해 다시 재투표에 들어갔다. 내 것과 김성환의 것만 가지고 재투표, 그러나 다시 동수. 3차투표에 들어갔다. 내 많은 나이와 무모함을 걱정하면서도, 그럼에도 잘되기를 바라던 지인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영화란 참 막막한 것이었다. 이마에 피가 나도록 쓰는 것도 힘들지만, 그걸로 사람을 설득하는 건 더 지난했다. 투표를 했던 사람들은 개표 과정에서 몸을 뒤틀고 있는 나를 바라보는 게 즐거웠다고 말했다.

그러니 연출을 하실 분들은 일찌감치 자기 단편 시나리오 몇편은 써놓고, 사람들 앞에서 모의 피칭도 해봐야 할 거다. 모두에게 연출 기회가 공평하게 돌아가지도 않고, 실력이 있다고 ‘당신, 참 훌륭하군요’ 하고 알아주지도 않는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Check! 시나리오

이마에 피가 나도록, 엉덩이가 땅에 꺼지도록 끝까지 버텨가며 자기 힘으로 엔딩장면까지 써보는 수 말고는 없다. 굉장히 잘 쓴 쓰다 만 시나리오 10개가 아주 잘 못 쓴 완성된 시나리오 1개를 당해내지 못한다. 완성되지 않은 건 찍을 수가 없으니까(찍을 수야 있겠지만 돈만 깨지고 힘만 빠질 거다). 수많은 시나리오 작법서는 쓰다가 힘들 때 먹는 비타민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저 끝까지 써보고,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 오랫동안 존재를 잊었다가, 다시 꺼내어 퇴고하고 그게 전부다. 좋은 시나리오를 끝까지 통독해보는 것도 좋다. 시나리오 작법서는 결국 좋은 시나리오들의 공통점을 나열한 것에 불과하다(그래서 나 같은 초보에겐 실전에선 무용지물. 그렇게 찍어야 하는 것이었군, 하는 가르침은 주지만). ‘위인전’도 큰 힘이 된다. 나는 아마존에서 중고로 산 타란티노 전기를 통해 큰 힘을 얻었다. 학교도 제대로 안 다닌 포르노 극장 문지기가 친구들과 주머닛돈으로 걸작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위로와 채찍이 되었다(도대체 난 뭐 하는 놈이냐).

프리 프로덕션 - 지옥으로의 귀환

탄식과 아쉬움과 축하와 질투가 뒤섞인 술잔이 내 앞에 쌓였다. 경선이 끝나고 팀이 꾸려진 뒤 마구 퍼마셨다. 개강한 지 한달도 안 돼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앞으로 보름 안에 모든 촬영과 편집이 끝나야 할 것이었다. 새벽 다섯시 지나서까지 마시고 잤지만 세 시간 뒤 스르르 잠이 깼다. 설 연휴 뒤 바로 촬영에 들어가는 일정이니 장소 섭외, 캐스팅, 장비 대여를 해야 했고 무엇보다 스토리보드를 완성해야 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시나리오가 부실하다는 거였다. 도대체 이게 촬영을 위한 시나리오란 말인가. 아무리 째려보고 노려봐도 시나리오를 보고 그림을 떠올릴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다시 고치고 고쳤다. 누더기를 고친다고 비단옷 되나, 이런 절망감으로 하나하나 짜나갔다. 그리고 오후에 수정본을 뽑아서 촬영 장소인 대학로 카페 장에서 스탭 회의를 했다. 알코올과 피로에 서서히 맛이 가기 시작하는데, 대본 리딩부터 해야 할지 배우 섭외는 어떻게 할지 갈팡질팡이었다. 허점들이 보이자 스탭들이 불안해하는 눈치다. 제작비도 아낄 겸 직접 연기도 배울 겸 스탭들이 배우를 겸한다는 원칙을 말하자 수군댄다. 아마추어 극단 배우이자 나와 최종경선까지 갔던 김성환은 배우 연기가 부자연스러울 경우 영화가 흔들린다는 저주를 내렸다. 사실 그게 맞는 말 같은데, 그렇다고 김성환의 말을 그대로 따라하자니 또 그것도 답은 아닌 것 같았다.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다시 김성환이 말을 바꿔 자기가 주연을 해보면 안 되겠느냐고 한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정확히 모르니 그저 헤맬 뿐이다. 영화의 화두는 그러니까, 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야, 어떻게 찍고 싶은 거야, 이 두 가지 되겠다. 둘 다 모르는 내가 어떻게 연출가가 된 거야? 알 수 없다. 그때 PD를 맡기로 한 홍하얀이 첫 장면을 왜 그렇게 재미없게 잡았는지 묻는다.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

집에 갔더니 코에 혹이 자라 있었다. 기침이 계속 나서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편두통이 왔다. 주연을 하고 싶은 김성환에게 주연을 시켜야 하는 걸까. 필름메이커스에 들어가서 배우 후보를 물색했다. 모두 번지르르하게 잘생겼다. 내가 원하는 주연인 소심한 스타일은 없었다. 태권도 3단에 이런저런 CF를 한 배우들뿐이다. 난 우디 앨런 스타일이 필요하다고!

다음날 스탭과 배우 명단을 발표했다. 그럼, 주연은 누구인가요. 차마 내가 주연이라고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내 얘기니 내가 할 거야, 이런 말이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참았다. 설 연휴를 보낸 뒤 리허설 이틀하고 하루는 수업, 다음에 바로 주말 촬영 일정을 확정했더니 사운드를 맡은 김효창이 “너무 몰아세우는 거 아니냐”며 영화나 보고 하루 쉬자고 한다. 피 같은 하루를 거르고 영화 보고 쉬자? 다행히 홍하얀 피디가 일정이 빠듯하다며 그건 아닌 것 같다고 마무리를 짓는다.

설 연휴 내내 수십장의 DVD를 쌓아놓고 시나리오를 고치고 콘티를 그렸다. 우디 앨런은 어떻게 했지? 고다르는? 쉬운 대화장면 하나조차 그림이 떠오르지 않았다. 감기는 점점 더 심해졌다. 싸이월드에 만든 <용이 된 사나이> 클럽에는 ‘바뀐 시나리오가 뭘 말하는지 모르겠다’는 불평이 나왔다. 비수가 따로 없다. 연휴가 끝나고 드디어 촬영 장소이기도 한 김효창의 집에서 리허설. 배역이 커진 김효창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대사도 많은데 화투를 치면서 하려니 너무 벅찼겠지. 아마추어 배우 김성환에게 조련을 맡기고 나는 다른 장면을 나머지 배우 겸 스탭들과 연습한다. 다행히 주인공인 ‘새가슴’의 여동생을 맡은 장성미의 연기가 자연스럽다. 중국집에서 배달온 내 짬뽕엔 수세미 일부가 들어 있다. 먹는 순간만이라도 평화를 바랐건만!

대사가 많아진 김효창이 이튿날 리허설을 회사 회식 때문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청천벽력 대사를 날린다. 암울하다. 다행히 그날 밤 김효창이 불콰해진 얼굴로 돌아와 맹연습을 한다. 그의 연기가 점점 훌륭해진다. 제일 중요한 화투장면의 골격을 만들고 나니 불안이 조금씩 가라앉는 것 같다. 촬영 전날 밤, 임상수 감독에게 찾아갔다. “하나도 모르겠다. 겁난다”고 자백했다. “다 알면 뭐 하러 찍나? 영화를 만드는 과정 모두가 두려움”이라는 말을 선물로 받아들고 왔다.

Check! 학교 고르기

독립영화 워크숍, 한겨레 문화센터 등 여러 사설기관에서 대개 4∼6개월 코스로 영화 만들기를 가르친다. 비용은 90만∼150만원이며 분납, 환불 등이 가능한 곳이 있으니 확인요! 시나리오 쓰기부터 후반작업까지 다 가르치지만 자기가 원하는 걸 확실히 알아야 더 많은 걸 얻어갈 수 있다. 조명, 촬영, 녹음 등 전 과정을 차근차근 배우고 싶은지, 첫 작품부터 연출을 하고 싶은지, 준비한 시나리오는 있는지를 스스로 점검하는 게 먼저일 것이다. 모두에게 연출 기회가 돌아가지는 않는다. 좋은 시나리오를 갖추고, 그걸 잘 설명할 수 있는 ‘피칭’ 능력이 있어야 시나리오 경선에서 뽑힐 수 있다(말발이 왕이다!). 친화력, 제작비 동원 능력, 프레젠테이션 능력이 있으면 더 좋다. 그러나 협력과 우정의 과정을 중시한다면 이 모든 걸 관찰하고 직접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영화 보는 눈이 달라질 것이다. 강사의 명성이나, 홈페이지의 댓글에 의지하기보다는 체험한 사람에게 직접 얘기를 들어보고 학교를 고르는 게 안전하다.

Check! 스토리보드 만들기

그러나 시나리오는 항상 촬영 가능한 시나리오여야 한다. 나처럼 단돈 40만원 달랑 들고 단편영화를 만들 거라면 눈높이를 한없이 낮춰야 한다. 현실 가능한 소품, 대여 가능한 조명과 촬영도구 안에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돈이 없으면 조명이 안 들어가는 야외장면을 더 많이 넣어야 한다는 건 너무나 자명하지 않은가. 시나리오만 봐도 견적이 나올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사이즈(바스트숏인지 클로즈업인지)를 촬영감독과 상의해서 미리 스토리보드를 만들어야 촬영이 제대로 진행된다. 현장에서 스탭에게 ‘대화장면을 어떻게 찍어야 하지?’라고 해맑게 묻는 순간 영화는 공중분해될 것이다. 사전에 현장을 답사하고 가능하다면 배우들의 동작을 사진으로 찍어두고 현장의 변수까지 고려해서 치밀한 스토리보드를 마련한다. 그림을 잘 그릴 필요는 없다. 배우와 스탭들이 이해할 수준이면 된다. 현장에서 더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 수도 있다.

Check! 배우 섭외

필름메이커스(www.filmmakers.co.kr)가 대표적이다. 서울영상위원회(www.seoulfc.or.kr)에 소개된 매니지먼트사에 연락해도 된다. 돈이 없다면 평소 친구나 동료, 이웃 가운데 배우 기질이 있는 사람을 눈여겨볼 것. 친구들을 배우로 쓸 거라면 어렵고 장황하게 대사를 쓰면 안 된다. 친구의 말투와 습관과 성격에 맞게 대사를 쓰는 게 더 효과적이다. 완성도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배우로 실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평소 연극이나 TV 드라마를 눈여겨보고 작은 배역도 잘해내는 배우를 점찍어두는 것도 방법이다. 단편영화를 만든 사람들끼리 인적 네트워크를 이용해 배우를 구하는 것이 더 안전하고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