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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초보의 영화 만들기 [2]

촬영 - 찍어보기는 했지만

한강변에서의 첫 촬영날. 체감온도 영하 20도의 강풍에 장성미 조감독은 눈물을 질질 흘리며 딱딱이를 친다. 황대진 촬영감독의 손은 얼어붙어 있다. 강도높은 리허설 덕인지 ‘새가슴’(이종도)과 여자친구인 ‘얼굴값’(홍하얀)의 주거니받거니가 나름 괜찮다. 일정이 빠듯해서 모니터를 켤 시간도 없다. 부리나케 한신을 해치우고 현장에 공수된 뜨거운 국물과 김밥과 홈메이드 유부초밥을 스탭들과 나누어 먹다. 와이프와 장모와 처형의 정성이다. 유일하게 스탭들 모두를 만족시킨 건 감독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나 과단성 따위가 아니었다. 아내의 손맛이었다. 꽥!

한강변 신을 다 해치우고 주유소 옆길에서 한신을 찍다. 전기 끌어오는 일을 김효창이 능란하게 해낸다. 역시 관록이 중요하다. 지옥에서 헤매던 프리 프로덕션 과정에 비하면 촬영은 소풍 같았다. 준비한 대로 찍으면 되니까. 영화사 봄의 김민정과 그의 친구 이은하가 핫팩과 도넛을 싸들고 왔고 내친김에 행인과 잡상인 연기까지 했다. 김민정의 연기에 스탭들이 감탄하다. 강의실 장면을 찍고 늦은 저녁을 먹고 당일 마지막 촬영장인 카페 장으로 갔다. 스탭들이 강행군에 녹초가 되어서 구석구석 찾아가 단잠을 잔다. ‘얼굴값’과 그의 친구이기도 한 ‘새가슴’의 여동생간의 대화를 어디서 찍을 것인가가 문제다. 장성미 조감독이 여자 화장실을 보고 오더니 여자 화장실에서 찍자고 한다. <안녕, 형아>의 여자 화장실 장면이 번뜩, 하고 떠올랐다.

‘새가슴’이 ‘얼굴값’에게 칭얼칭얼대는 장면을 찍는데 갑자기 조명이 하나 나갔다. 힘들게 들고 올라온 조명 전구가 나가자 스탭들 모두가 침울해졌다. 전구값 몇 만원이 단편영화의 희망 일부를 앗아간 것. 갑자기 ‘얼굴값’이 대사와 동선을 헷갈려하면서 자괴감에 시달린다. 난 이런 악재를 헤쳐나갈 능력이 없다. 내 표정에 그 무능력이 써 있다. 조명도 꺼졌는데 스탭들이 눈도 밝지, 내 무능력을 죄다 읽어낸다. 여의도 촬영장면부터 놀러와서 일을 거들어준 정성제가 한 예언대로 애초 예정인 새벽 2시 반보다 세 시간이나 더 지체하고서야 카페장면 촬영이 끝났다. 지영랑, 지석희 사장님이 내온 밤참은 입이 아니라 코로 먹은 것 같다.

김효창 집으로 이동해 몇 시간을 잔 뒤 나머지 장면을 몰아찍는다. 제일 중요한 고스톱 장면에서 처음으로 모니터를 확인해본다. 광화문 미디액트의 장비 반납 기한에 맞춰 촬영을 일사천리로 끝냈다. 장비 대여 연체료 몇 만원, 장비 대여 지체로 먹을 수 있는 경고 따위가 저예산 단편영화의 화질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는 걸 누가 알았을꼬. 조명 고장으로 시작해서 허겁지겁 장비 반납으로 촬영이 끝났다. 이것들이 미비한 콘티와 상승작용을 해서 영화는 암만 해도 ‘구릴’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Check! 로케이션

촬영장소를 구하는 것도 배우 구하는 만큼이나 어려운데, 이 문제는 꼭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계산에 넣어야 한다. 사유재산이라면 주인에게 허가를 받아야 하고, 시 재산으로 추정된다면(가령 한강둔치나 선유도, 각종 공원들) 서울영상위원회 등에 문의해 적어도 촬영 1주일 전에 허가를 받아야 한다. 생각없이 시나리오를 쓰고 촬영에 들어가면 뒤늦게 깨달음이 올 것이다. 세상 모든 것엔 주인이 있고, 그 주인과는 협상을 해야 한다는 걸. 그리고 거기엔 돈과 정력이 든다는 걸. 그마저도 할 여력이 없어 윌리엄 프리드킨이 <프렌치 커넥션> 찍듯이, 허가없이 찍고 도망을 가는 사람들도 간혹 있다지만. 그리고 촬영장소를 구할 때는 꼭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게 전기를 어디서 끌어올 수 있느냐는 거다. 돈이 많아 발전차를 부를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허허벌판에서 조명 켜고 모니터 켜려고 생각한다면 그건 정말 ‘깨몽’이다. 조명에 쓰는 전기량이 건물의 능력을 ‘오버’해서 폐교를 태운 사례도 있으니, 촬영장소의 전압은 반드시 확인할 것. 박카스 한 박스 들고 인사 꾸벅 하고 전기를 끌어 쓰는 센쑤!도 잊지 말 것.

Check! 장비 대여

돈이 많아 이것저것 다 사겠다면 말릴 일은 아니지만, 일단 없으면 학교에서 무료로 빌려주는 기기를 최대한 활용한다. 이때 유의사항은 빌려갔을 때 점검을 확실히 하고 돌려줄 때도 점검을 확실히 해야 한다는 것. 공연히 다른 사람이 망가뜨린 걸 ‘덤터기’ 쓸 수 있다. 현장에서 사용하려고 보니 고장나 있다고? 그때의 사기저하와 이에 따른 완성도 저하를 어쩔 겨? 전원 연결을 잘못해서 거액의 조명기구가 날아가는 수도 있으니 알아서 혀들. 학교 기기가 노후하거나 부족하면 미디액트(www.mediact.org)에서 빌리는 것도 방법. 회원가입 뒤 교육을 받으면 하루에 2만∼6만원대에 카메라나 조명기기를 대여할 수 있다. 장비 반납을 제때 하지 않으면 어디서나 제재를 받는다는 것도 명심해두라. 촬영일정을 너무 빡빡하게 했다가 사소한 장비문제로 촬영을 그르칠 수도 있으니 장비 대여는 매우 꼼꼼해야 한다.

편집과 시사회 - 지옥의 참된 풍경은 이것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장황하게 지껄인 이 모든 지옥도는, 포스트 프로덕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프리미어라는 편집 프로그램에서 ‘면도칼’ 달랑 하나 꺼내들고 이리저리 맞춰봤지만 애초 소스가 부족하니 달리 뭘 할 게 없었다. 이런 각도로 찍어놓은 게 왜 없지? 저 장면을 조금 더 길게 찍은 건 없나? 당연히 없었다. 게다가 1신 첫째, 둘째 컷이 흔적도 없었다. 왜 그것들이 날아갔을까. 찍기는 분명 찍었는데 캡처가 되지 않는다. 유령이 따로 없다. 미리 충분히 여유를 두고 다양한 각도로 찍어둘걸, 장면 앞뒤를 여유있게 찍어놓을걸, 이런 후회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편집할 거리가 없는데 편집을 한다니, 이런 허망할 데가 있나.

일주일이나 밤을 새워서(대부분 홍하얀 피디가 학생이라는 이유로 그걸 했다) 그나마 얼기설기 영화를 붙여놓았다. 편집 중간에 편집 수업이 있었다. 그 장면은 왜 찍는 건지, 어떤 각도와 크기로 찍었어야 했는지, 앞뒤와 어떻게 이어져야 하는지에 대해 눈을 조금 뜨게 됐다. 강미자 선생 수업 덕이다. 순간 섬광 같은 게 내 돌 같은 머리에 와서 파열음을 낸다. 그래, 그거야. 왜 장면이 붙지 않는지 이유를 알았다. 이미 찍어놓은 걸 교차편집해야겠다는 아이디어, 그리고 새로이 찍어야 할 인서트 장면들이 생각났다. 부랴부랴 일요일에 추가촬영을 하기로 하고 바쁜 황대진 촬영감독 대신 다른 팀에 있는 신윤재를 초빙했다. 선유도와 대학로에서 찍었다. 날밤을 새면서 얼굴이 빠르게 수척해졌다. 산에 다녀도, 헬스클럽을 다녀도 빠지지 않던 살이 이제 도망을 가기 시작했다. 토요일 청평산장 엠티에서 시사를 갖기 전 마무리를 했다. 음악을 붙이고, 엔딩 크레딧을 만들고, 영화를 붙였다. 시체의 살들이 부위를 따라가 붙는다. 얼기설기 꿰맨 프랑켄슈타인이었다. 그런데 그 프랑켄슈타인이 귀엽고 사랑스럽다. 그냥 웃음이 헤헤거리며 나왔다. 나는 이 못생긴 좀비의 어머니다, 평소 똥누는 기계였던 내가 가끔 영화를 만들기도 하는 기계로 승격했다, ‘떡’ 생각만 하던 내 머리가 좀비를 낳는 자궁이 되기도 한다…. 아침 아홉시에 집으로 기어들어갔다.

몇 시간 자고 저녁, 청평. 네 작품 가운데 첫 순서로 빔프로젝터를 타고 올라갔다. 정말 숨을 곳이 없다. 엉터리 바느질로 꿰맨 좀비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귀여워해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그건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싸, 역시나 분위기가 이상하다. 웃기라고 한 대사에서 사람들이 웃지를 않는다. 울라고 한 대목에서 사람들이 웃는다. 반응 싸하다. 나는 조금씩 방바닥 속으로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제 관객평. 사운드가 안 들려요, 음악을 과다하게 사용했네요, 마지막 신의 의미가 뭐죠, 본인 연기가 좋았다고 생각하세요? 장점이라든가 재미있게 봤다든가 그런 건 일체 없었다. ‘무대 인사’를 허둥지둥 마치고 돌아가는데, 귓가가 갑자기 무거워진다. 대사가 유일한 장점인 시나리오인데 사운드가 안 들려서 뭔소리인지도 모르겠네요!

약속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는 새벽 다섯시 반에 부리나케 도망나와 첫 기차를 탔다. 창으로 가로등 불빛을 받은 한강이 희미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창 한편에 피로와 부끄러움으로 반쪽이 된 내 얼굴이 어른거렸다. 그건 유령의 얼굴 같기도 했고, 마치 유리창과 거울에 끈질기게 달라붙었다가, 영화 상영하면 반드시 구석에서 나타나는 붐마이크 같기도 했다. 첫 영화, 온통 어리석음의 기록. 그러나 세상을 만드는 건 현명한 ‘무위’가 아니라 어리석은 ‘행동’이 아니더냐. 그래도 내 시작은 매우 미약하였으나….

Check! 딱딱이, 스크립터, 녹음, 모니터

정말 사소한 거지만 딱딱이를 잘 쳐야 나중에 편집에서 촬영장면을 찾는다. 딱딱이 소리도 크게 ‘딱’ 쳐야 컷을 나누어 편집할 수 있다. 딱딱이의 등장과 크게 외친 ‘컷’의 외침이 있어야 컷을 찾아서 연결할 수 있다. 카메라 안에 딱딱이가 안 들어왔는데도 촬영에 들어간다든지 ‘컷’이라고 외쳐야 하는데 ‘액션’이라고 한다든지 하면 나중에 편집할 때 한강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사태가 벌어진다. 매번 테이크가 OK인지, NG인지, keep인지 꼼꼼하게 스크립트에 적어두는 것도 빠뜨릴 수 없다. 아무리 바빠도 현장에서 신 촬영이 끝난 뒤 모니터로 확인은 필수다. 혹시라도 모를 사고(찍은 테이프 위에 다시 찍는다든지 하는)가 늘 당신의 영화를 잡아먹으려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마귀가 따로 없다!). 잘 찍힌 것인 줄 알았는데 붐대와 스탭의 얼굴이 천연덕스럽게 잡힐 수 있다. 편집에서 도저히 고칠 수 없는 것들이니(남는 게 돈이라 CG로 처리하겠다면 말릴 생각이 없다) 현장에서 마귀들과 싸우라. 그리고 이겨라.

Check! 편집

편집은 영화의 신이다. 그러나 신도 하지 못하는 일이 있으니 촬영시 포커스가 나갔다거나, 붐대가 자신이 출연배우인 줄 알고 들어왔다거나, 찍은 테이프 위에 덮어 찍었다거나 하는 ‘마귀들의 공작’이다. 만약 촬영을 하면서 마귀들의 공작에 잘 대처했다면 이제 편집의 신에게 모든 걸 맡겨야 한다. 편집은 당신의 누더기 영화를 그래도 영화 비슷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히치콕처럼 스토리보드 그대로 찍어서 편집이 따로 필요없다고 하더라도 편집을 통해 당신의 영화를 더 나은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아무 관련 없는 소스를 하나의 일관된 톤으로 묶어주는 게 편집이니 온갖 정성을 다 들여야 한다. 학교 편집실을 미리 넉넉하게 예약해두고, 편집실이 붐비면 미디액트 편집실이라도 빌려서 여유있게 할 필요가 있다.

만든 사람들

전단지 김민정 노가리 & 시험관 & 조명 김성환 카페녀 & 시험관 김현주 원나잇 & 사운드 김효창 카페남 & 선유도 촬영 신윤재 시험관 윤성아 행인 이은하 새가슴 & 연출 & 각본 이종도 여동생 & 고민녀 & 조감독 장성미 행인 & 수험남 정성제 어머니 & 학부모 지영랑 수험녀 최보람 얼굴값 & 프로듀서 & 편집 홍하얀 스티커 강승재

왼쪽부터 김민정, 신윤재, 이종도, 홍하얀, 황대진, 강승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