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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TV외화 시리즈 [1] - <엔젤스 인 아메리카>
김현정 2006-03-25

머피의 법칙은 TV를 볼 때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중간부터 보기 시작한 에피소드는 재방송을 챙겨도 비슷한 대목부터 보게 되고, 한번 놓친 에피소드 대신 본 것만 또 보게 되고, 재미있는 시리즈들은 같은 시간에 방영되다가 한꺼번에 끝나버리곤 한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을 뒤집어보면 재미있는 시리즈들은 한꺼번에 시작한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다. 마이크 니콜스의 몽환적인 TV영화 <엔젤스 인 아메리카>와 통속적이라는 점에선 일가를 이룬 TV시리즈 <위즈>, 범죄와 유령이라는, 웬만해선 실패하기 힘든 두 가지 소재를 결합한 <고스트 앤 크라임>. 3월 초 일제히 방영을 시작한 이 시리즈들은 출생의 비밀과 철없는 사랑 타령과 백마 탄 재벌가 왕자님에게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줄 것이다. 리모컨만 살짝 눌러주면 그 세계로 탈출할 수 있다.

친절한 천사, 비루한 삶에 빛을 내리다

에이즈 환자와 동성애를 껴안는 레이건 시대의 천사 <엔젤스 인 아메리카>

방영시간 | 일 오전 10시·밤 12시(캐치온), 수 낮 12시(캐치온 플러스)

미국에는 천사가 살지 않는다. 레이건이 집권하던 1980년대 중반, 에이즈에 걸린 동성애자였다면 죽어서도 천사를 보지 못하리라고 어둠 속에 자신을 파묻었을 것이다. 그러나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미국의 천사 이야기다. 천국의 후광을 받으며 날개를 펄럭이는 진짜 천사, 낯선 이에게 손을 내미는, 그저 천사 같은 진짜 사람. 토니 커시너가 레이건 집권 시기에 쓰기 시작한 희곡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황폐한 땅에 유배된 모든 이들에게 언젠가 부엌 천장이 무너져내리며 세상 바깥 천사의 음성이 들려올지도 모른다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퓰리처상과 토니상을 수상한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전도유망한 원작이었지만 십년이 넘도록 방송국과 영화사를 떠돌던 프로젝트였다. 로버트 알트먼과 P. J. 호건, 닐 라뷰트는 너무 바쁘거나 어떻게 이야기를 줄여야 할지 몰라 <엔젤스 인 아메리카>를 거절했다. “사람들은 모두 왜 이렇게 길어야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커시너의 고집이 맞았을 것이다. 에이즈에 걸린 미청년 동성애자 프라이어, 그를 찾아온 선조들과 천사, 프라이어가 죽어가는 모습을 볼 수 없어 떠나버린 연인 루이스, 매카시와 후버의 하수인이었지만 남자와 자는 일까지는 포기하지 못해 에이즈로 죽을 날을 기다리는 변호사 로이 콘, 독실한 모르몬 교도이자 공화당원이면서도 뒤늦게 성 정체성에 눈을 뜬 조, 그를 포기하지 못해 상상의 세계로 도피한 아내 하퍼. 이 모든 이들을 어떻게 하나라도 버릴 수 있었을까. <졸업> <클로저>의 마이크 니콜스는 <HBO>가 제작하는 일곱 시간짜리 TV시리즈라는 형식을 받아들임으로써 <엔젤스 인 아메리카>를 온전히 살려내는 길을 택했다.

니콜스는 “이 이야기에서 가장 먼저 끌렸던 요소는 친절한 행동이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 친절이란 정말 찾아보기 어렵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언뜻 보기에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신성모독에 가까울지 모른다. 천사는 프라이어의 고통을 덜어주겠다면서 “오르가슴의 원초적인 형태”를 몸으로 경험하게 해주고, 면역체계가 무너져 검은 반점이 돋아난 프라이어는 예언자의 검은 두건을 쓰고, 보수정권의 결정체와도 같은 로이의 팔에선 에이즈 바이러스로 오염된 혈액이 뚝뚝 흘러내린다. 그럼에도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선의를 지니고 있다. 사랑과 책임이 어긋나는 아이러니를 동정하고 낯선 이와의 섹스에서 고독을 발견하고 홀로 죽어가는 에이즈 환자의 병상에 천사를 보내준다. 환상과 현실을 오가는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그중 어느 쪽을 택하든 불완전하고 비루할 수밖에 없는 삶에 동반자와 빛을 내리고자 하는 시리즈다. 그리고 이것은 20년 전의 이야기에 머물지 않는다. “매우 잘못된 시점이지만 매우 적절한 시점이기도 한” 부시 정권 시기에 완성된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시간의 범죄, 역사의 퇴행을 증명하기에 또 다른 생명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2004년 골든 글로브와 에미상에서 작품상과 남녀주연상 등을 휩쓴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과감할 정도의 롱숏과 클로즈업을 자유롭게 구사하며 천상과 지상을 넘나든다. 그런 연출력도 배우들이 없었다면 공허한 유희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이 시리즈의 배우 대부분은 일인다역을 소화했다. 조의 어머니 한나와 스파이 혐의로 사형당한 에델 로젠버그의 유령, 거기에 추모사와는 전혀 관계없는 군소리를 늘어놓는 라비까지 연기한 메릴 스트립은 그 독특한 외모에도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면 같은 배우라는 사실을 눈치채기 힘들 것이다. 자신의 마초 이미지를 극단까지 밀고 나가 반대의 경지에 도달하는 로이 역의 알 파치노와 죽음의 공포를 홀로 겪는 프라이어 역의 저스틴 커크, 남편이 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의 마음속으로 숨어버리는 메리 루이스 파커,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자 예언서까지 고치는 천사 에마 톰슨 등도 놀라운 호연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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