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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단위 기억 좇아 살해범 쫓기 - <메멘토>
2001-08-21

고난도 퍼즐게임인 <메멘토>의 구성처럼 이 영화 소개의 서두를 열어보자. 첫 장편이자 독립영화 <메멘토>를 만든 각본·감독의 크리스토퍼 놀란은 현재 알 파치노, 로빈 윌리암스가 주연인 5천만달러짜리 <불면증>을 찍고 있다(3). 지난 3월 미국에서 단 11개의 극장에서 개봉했지만 3개월 뒤 극장 수는 500여개로 늘어났다(2). 올해 <트래픽>으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은 <메멘토>를 본 뒤,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들이 이 영화의 배급을 거절한 사실에 분노를 표시했다(1). 이는 <메멘토>의 개봉 뒤에 나타난 몇가지 재밌는 결과를 역순(3→2→1)으로 나열한 것이다.

<메멘토>는 사전정보를 많이 알고 볼수록 감상의 폭을 넓힐 수 있는 희한한 영화다. 유례없이 실험적이지만 성공적인 영화의 형식이 지적 쾌감을 주는 동력인데, 자신의 두뇌 회전력에 자부심이 크더라도 자칫 방심했다가는 허를 찔리기 딱 알맞다.

일단 첫 장면이 시작되고 몇초 안에 첫번째 힌트를 알아채야 한다. 주인공이 누군가를 총으로 죽이고 그 주검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는 장면인데, 필름이 거꾸로 돌고 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시간이 반대로 흐른다는 암시다. 주인공은 10분 이상을 기억할 수 없는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 레너드(가이 피어스)이고, 영화는 관객에게 그가 보고 듣는 것 이상의 정보를 가질 수 없도록 1인칭 시점으로 만들어졌다. 이제 관객은 주인공의 기억 단위 만큼 쪼개진 이야기 토막들을 하나씩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처음 시퀀스의 첫 장면을 다음 시퀀스에서 마지막 장면으로 만들어 놓은 토막들이 고리처럼 이어져 `라→다→나→가'식의 흐름을 좇아가야 한다.

레너드는 아내가 강간살해된 충격으로 그 이후의 기억을 잃게 됐는데, 삶의 남은 목적은 아내의 복수를 하는 것 뿐이다. 하지만 그 처지가 참 곤혹스럽다. 격렬히 뛰고 있던 그는 누군가와 나란히 달리는 걸 보고 `내가 저 사람을 쫓고 있군' 하고 추측하지만, 상대방이 자기에게 총질을 하자 `이런, 내가 쫓기고 있었군' 하고 깨닫는 식이다. 레너드가 범인을 추적하는 방법은 그 단서들을 문신으로, 메모로,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기록해두는 것 뿐이다.

두번째 힌트. 거꾸로 흐르는 이야기 속에 흑백 화면이 반복적으로 끼어든다. 특이하게도 관찰자 시점으로 레너드를 지켜보게 만드는 데, 가만히 보면 이건 시간의 흐름 그대로다. 이제 형식은 `라(칼라)→a(흑백)→다→b→나→c→가'로 수정된다.

영화 막판, 두 흐름이 하나로 이어지면서 지금까지 어떤 일이 벌어져온 건지 비로소 뚜렷해지는 동시에 또 다른 고민을 던져준다. 레너드의 아내가 정말 잔혹하게 살해당한 것인지, 레너드가 기억을 잃기 전의 기억이 정말 맞는 것인지 등이 흐릿해지면서 지금까지 이야기의 전제를 흔들어 버린다. 이건 인간의 정체성 문제를 제기해온 하나의 방식으로 쓰여온 `기억'에 관한 훌륭한 변주다. 또 하나, 레너드를 이용하는 경찰 테디(조 판톨리아노)와 마약상 애인 나탈리(캐리 앤 모스)의 대결 구도에서 레너드를 움직이는 메모가 어느 순간 조작되면서 반전이 일어난다. 이런 류의 장면들로 엮어진 <메멘토>는 “기표(언어)가 끊임없이 미끄러지면서 기의(의미)에 닿지 않는다”는 현대 프랑스 철학의 한 명제를 떠올리게 하면서, 아직도 영화에는 새로운 사유를 가능케하는 새로운 형식이 남아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이성욱 기자lewoo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