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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동방신기에 빠지다
박혜명 2006-04-07

어떤 기사를 준비하면서 취재를 하던 와중에 SM엔터테인먼트에 대해 조사를 하게 됐다. 무슨 비리가 있어서는 아녔고, 신인 발굴 시스템이 워낙 잘되어 있는 곳이라고 업계 관계자가 강조하기에 기사에도 도움이 되겠다 싶어서였다. 인터뷰 중에 그 취재원이 슈퍼주니어, 슈퍼주니어, 하는데 나는 그 말이 ‘무지하게 어린 연예인들을 일컫는 최신 일반 명사’쯤 되는 줄 알았다. 회사로 돌아와 인터넷 검색창에 SM엔터테인먼트를 쳐 넣었다.

동방신기라는 5인조 아카펠라댄스그룹(이 애매한 명칭…)의 기사가 좍 떴다. 그때까지 내가 아는 동방신기의 멤버 이름은 믹키유천 딱 하나였다. 그나마도 영화평론가 정성일씨의 글에서 언급되었기에 기억하는 거였다. 얼굴 생김새? 당연히 몰랐다. 그런데 아는 것이 병이라고, 아니면 아이돌 그룹에 아직도 열광할 수 있는 내 뜨거운 가슴이 화근이었는지 ‘SM엔터테인먼트’ 검색 반나절 만에, 동방신기 멤버들의 이름과 얼굴 짝짓기를 척척 할 수 있게 됐다. 2차대전 당시 군사암호 해독에 비견되는 일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던 그 짝짓기를 말이다.

10여년 전 재수생의 신분을 망각한 채 H.O.T에 빠져 사경을 헤맬 적엔 토니 안이 내 퍼스트였고 춤과 노래 실력 모두 출중한 문희준이 세컨드였다. 그때 나는 그들과 동갑이었다. 전성기 시절의 토니 안을 빼닮았으면서도 더 훤칠한 키에 더 또렷한 얼굴에 더 훌륭한 스타일을 지닌 믹키유천은, 뭐라더라, 1986년생이라고 했다. 내 나이에서 빼려니까 계산이 빨리 안 돼서 2006년에서 1986년을 빼고 1을 더했다. 나이차만 생각하면 빈정 상하면서도 멤버들 혈액형에 이상형까지 외워버렸다. 음악적인 면이 좋아서 그들의 노래를 즐겨 들었다. 유노윤호가 춤추는 모습은 세상에서 제일 늠름하고 제일 귀여웠다. 최근에 난 <All About 東方神起> DVD 세트를 샀다. 이어 팬북을 질렀다.

팬북 구매는 ‘광’과 ‘비광’을 판단하는 진정한 기준이다. 팬북은 온라인에 올려지는 수많은 팬픽들 중에서도 네티즌 독자들이 열관한 작품에 주어지는 영광이다. 인쇄는 작가가 진행한다. 소장가치가 중요하므로 양장본에 고급 종이를 쓰고 몇 백부에서 몇 천부까지 찍어 온라인 판매를 한다. 사실 읽을 만한 팬픽 찾기도 쉽지 않고 살 만한 것 고르기는 더 어렵다. 사고 싶다고 아무 때나 살 수도 없다. 작가의 제본 공지가 뜨는 순간 달려가 “저요, 저요” 하고 손을 들어야 한다(작품의 질에 관해서는 노코멘트다). 3쇄에 들어가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초판인쇄로 희귀본이 되어 전설로만 남는 작품도 있다. 그러니까 팬북 소장은 정말 엄청난 노력 뒤에 얻어지는 결과다.

이 모든 것이 한달 만에 벌어진 일이다. 나는 이제 동방신기 팬클럽 ‘카시오페아’ 못지않게 박식하고 열정적인 팬이 됐다. 이 열정을 숨길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동방신기 사진이나 동영상을 찾아보는 일, 팬사이트에 가입하고 종종 들어가는 일을 나는 사람들 앞에서 감추지 않는다. 유노윤호를 좋아하는 어느 20대 팬은 제 언니의 말을 빌려 “유노윤호는 성인 아이돌”이라는 명언을 남겼고 오늘도 수만명의 20, 30대 여성팬들은 눈물 흘려가며 영웅재중 사진을 팬사이트에 업로드하고 있다. 살의나 복수심이 아닌 다음에야 어떤 감정도 솔직한 것이 좋다고 믿는다. 가끔씩 '내가 지금 뭐하고 있나' 자책하는 까닭은, 동방신기에 대한 열정이 일상에 깊게 침투해 다른 책임과 의무를 소홀히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10년전보다 지키고 살아야할 것이 많아진 지금 아이돌에 열광하면서 힘든 점이 있다면 그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