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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윌리엄
2001-08-21

기사 윌리엄

■ STORY 어려서부터 기사를 동경하던 윌리엄(헤스 레저)을 지붕수리공 아버지는 액터 경에게 맡긴다. 액터가 돌연사하자 그를 수행하던 윌리엄은 투구로 얼굴을 감추고 마상창술시합에 나가 승리한다. 동료 와트와 롤랜드를 설득해 ‘가짜 기사’ 울리히 폰 리히텐슈타인으로서 각지의 무술시합을 순례하기로 한 윌리엄 일행에, 유랑하던 미래의 문호 제프리 초서(폴 베타니)도 합류해 ‘바람잡이’ 역을 맡는다. 루앙대회에 나간 윌리엄은 귀족의 딸 조슬린(섀닌 소세이먼)과 사랑에 빠지고, 연적이자 라이벌인 기사 아데마 백작(루퍼스 스웰)과 충돌한다. 승승장구하는 윌리엄의 인기와 함께 아데마의 시기심도 높아가고, 런던에서 열린 최고대회에서 윌리엄을 뒤밟아 출신의 비밀을 캐낸 아데마는 비겁한 승리를 획책한다.

■ Review

14세기 유럽의 마상창술(말을 타고 나무 창으로 상대를 공격해 점수를 얻는 경기) 시합장에 입장하는 <기사 윌리엄>의 관객은, 류트나 파이프의 연주가 아니라 20세기 밴드 퀸의 노래 <We Will Rock You>의 영접을 받는다. 화면 밖 음악인가 잠시 생각해보지만, 시합장 관중도 노래가 들리는지 농노, 귀족 할 것 없이 드럼 비트에 맞춰 네 박자 응원을 하고 가사를 따라 부른다. 도대체 이 음악은 어디로부터 들려오는 것일까? <We Will Rock You>가 흘러나오는 미지의 장소, 혹은 윌리엄이 사칭한 가짜 귀족 울리히 폰 리히텐슈타인의 존재하지 않는 영지 ‘겔더랜드’, <기사 윌리엄>은 이처럼 ‘어디에도 없는 곳’에 주소를 둔다.

영화 <기사 윌리엄>은 젊은 주인공 윌리엄처럼 꿈을 이루기 위해서, 태어난 집을 떠나 낯선 품에 몸을 맡기는 영화다. 고향을 떠난 윌리엄이 이방의 땅을 주유할 때 <기사 윌리엄>은 시대착오를 의도한 소품들이 흩뿌려진 연대불명의 공간에서 행진한다. 미묘한 뉘앙스가 베일을 드리운 <LA 컨피덴셜>의 세련된 시나리오를 썼던 브라이언 헬겔런드 감독은 이 영화에서 전혀 다른 종목의 게임에 뛰어든다. 주인공 윌리엄의 여정에는 무찌를 용도, 구원할 공주도 없지만 <기사 윌리엄>은 ‘기사 이야기’(A Knight’s Tale)라는 싱거운 원제가 예고하는 대로 동화와 디즈니식 영웅담의 전형들을 꿰어 ‘10대를 위한 사극’을 조립해간다. 정체를 감추고 세상에 뛰어든 어린 영웅, 익살스럽지만 충성스런 조력자들, 고귀한 신분의 연인, 다스베이더 같은 생김새의 악당까지.

그러나 <기사 윌리엄>의 재미는 여정의 동기나 목적지가 아니라 길가의 소소한 구경거리들에 있다. 재미의 기본 처방은 역시 ‘시대착오’. 월드컵 경기의 서포터를 연상시키는 관객이 운집한 마상 시합장의 바람잡이들은 WWF의 프로레슬러를 소개하는 사회자처럼 허풍을 떨고, 주인공 윌리엄과 조슬린은 졸업무도회에 나온 고교생들처럼 데이비드 보위의 <Golden Years>에 맞춰 국적 불명의 디스코를 춘다. 콜로세움도 군중 전투신도 없는 <기사 윌리엄>의 스펙터클을 대신하는 것은 의상. 기사와 종자, 귀부인과 시녀들이 수시로 갈아입는 옷가지들은 고증된 의상이라기보다 ‘중세’를 컨셉으로 한 오트 쿠튀르 패션쇼에 나올 법한 작품들이다. 특히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스타워즈 에피소드1>의 아미달라 여왕 버금가는 칠보단장을 빠뜨리지 않는 조슬린의 머리와 옷은, 윌리엄 역의 청춘스타 헤스 레저와 더불어 영화의 타깃인 10대 여성관객을 붙잡을 만한 서비스 메뉴다. 이 밖에도 <기사 윌리엄>은 여성관객의 자존심에 민감하다. 그것은 <에버 애프터>를 비롯한 할리우드 개량시대극들의 기본원칙이기도 하다. 아데마 백작이 악한이라는 확증은 여자를 우승 트로피와 말 다음 가는 재산으로 취급하는 오만에 있다. 한편 조슬린은 그녀를 위해 승리하겠다는 윌리엄의 구애를 “어디 나를 위해 패배해봐요!”라는 말로 일축함으로써, 남자들의 승부놀이에 들러리 서기를 거절한다.

굳이 가야 할 곳도 없다는 듯 여러 도시를 소요하는 중반까지 <기사 윌리엄>의 가벼운 행보는 영화의 내용과 조화롭다. 그러나 대단원에 접어들면 영화는 유희의 태도를 황급히 접고 정색을 한다. 시대극 유행을 부채질한 지난해의 히트작 <글래디에이터>의 막시무스 장군이 그랬듯 탁월한 전투력으로 대중의 스타가 된 윌리엄은 비열한 적이 불리하게 조작해놓은 최후의 결전을 통과해 교훈적 해피엔딩으로 진격한다. 일관성에 대한 아쉬움은 세부에도 있다. 윌리엄은 아름다움을 찬미하던 조슬린에게 갑자기 “치장밖에 모르냐”며 짜증을 내고, 삼각관계를 이룰 듯하던 대장장이 케이트의 캐릭터는 어느 순간 시들어버린다. 카메라의 움직임도 특이한 앵글 잡기에 애쓰지만 혼돈을 초월한 하나의 스타일로 완결을 본 것 같지는 않다. 이처럼 <기사 윌리엄>은 분명 독특한 대중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모종의 ‘위원회’에 의해 집체 창작된 조립품 같은 인상을 지우지 못한다. 마치 윌리엄 일행이 전원의 머리를 모아서 조슬린에게 쓴 연애편지처럼.

영화가 과거와 현재를 한 프레임 안에 구태여 비끄러매려고 할 때 우리는 그 영화가 어떤 형태로건 과거와 현재 사이에 길을 내려 한다고 믿는다. 에이미 해커링의 <클루리스>나 데렉 자만의 르네상스 3부작, 바즈 루어먼의 <로미오와 줄리엣>에는 당대인들이 체감한 세계상이나 고전문학의 본색을 노크하려는 야심이 있었다. 그러나 로맨틱 어드벤처 <기사 윌리엄>은 그런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브라이언 헬겔런드 감독은 중세의 병풍을 둘러친 앞에 현대의 소품들을 디스플레이한 다음 “중세도 우리가 사는 지금 세상과 별다르지 않았어”라고 호기롭게 외친다. 시원스럽긴 하지만 룰이 너무 단순한 스포츠를 관람한 기분이다.

김혜리 기자 vermeer@hani.co.kr

▶ 기사 윌리엄

▶ 실존인물 제프리 초서(1340∼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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